188. 내가 그때도 말했잖아.
“그래…. 그런 것이었군요!”
- ?!
사하크와 내 대화를 듣고 있던 것은 언데드들 뿐만이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자, 오랜만에 보는 상판이 날 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팔리만, 엘.”
새하얀 법복과 빨간 갈레로.
설산과 빙원을 거쳐왔음이 분명한데도, 그가 두르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옷은 조금도 상하지 않은 채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별동대. 아니, 선발대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혼자 오지는 않았을 터.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그의 등 뒤에서 거대한 형체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르……!”
그의 주위를 경계하는 시커먼 거인들.
얼굴에는 태양 십자가 깊숙이 박혀, 몸과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래, 그게 너희들이 완성한 병사냐?”
그것들을 둘러본 난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팔다리에 묶인 사슬과 관절을 따라 일자로 박혀있는 수많은 금침.
그리고 심장 부근에 박혀있는 검은 말뚝까지.
저것들 전부가, 대행자들이 심장에 박아넣었던 성물이었다.
“성기사를 언데드로 만들어서 성혈을 주입해 몸을 키우고, 거기에 혈도마다 성물을 박아넣어서 신성력을 강화했다?”
“하하, 이것 참.”
옅게 웃으며 말한 내 해설에, 팔리만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역시 대륙의 공적 아키몬드의 환생입니다. 한눈에 알아보시는군요.”
“…….”
“아니지, 생전의 인격이 그대로 살아있으니 아키몬드라고 불러드리는 게 좋을까요?”
전에 만났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개리슨이 이녀석을 왜 마음에 들지 않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웃고 있는 가면 속에 숨어있는 추악한 진짜 얼굴.
날 보는 팔리만의 눈은, 끝을 알 수 없는 욕망에 가득 차 있었다.
쿵-!
그가 손을 들자, 다섯 마리의 거인이 나란히 섰다.
- 좋지 않군. 저 거인, 하나하나가 괴물들이야.
- 교황이 대행자들을 내친 이유가 납득이 갈 정도인데.
참으로 그랬다.
하나하나가 대행자. 아니, 그 이상에 달하는 괴물들.
만전의 상태에서 싸운다 해도 승리를 장담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다.
촤륵-!
검을 뽑은 레이븐과 키예스가 내 앞을 막아섰지만, 전황은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반면, 이쪽은 힘이 쭉 빠져버렸다는 게 문제인데 말이야.”
사하크와의 싸움으로 내 마기는 얼마 남지 않았다.
만일 격돌한다면, 한 번을 막아내는 것이 고작.
암울하다는 말로도 모자란 것이, 실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말해봤자 들을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만, 예의상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전투를 전부 지켜본 것일까?
한 것 여유를 부리며 어깨를 으쓱인 팔리만이 날 보며 말했다.
“얌전히 투항하십시오, 클라인 공자.”
“…….”
“교단의 대업을 이루는 데에 협조한다면, 적어도 당신의 주변인 정도는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풉.
그렇게 말하는 팔리만 본인마저도 우스운 듯 했다.
협조? 목숨?
이 지경까지 와서 그런 것이 쓸모가 있을 리 없다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알고있을 터.
“누가 개리슨 친구 아니랄까 봐, 성질 더럽네.”
그렇게 말하며 나 또한 헛웃음을 흘렸다.
팔리만이 저 말을 한 의도는 순전히 날 조롱하기 위해.
그리고 동시에, 압도적인 전력차를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하크.”
난 팔리만의 조롱에 더 반응하는 대신, 내 뒤에 늘어져 있는 골룡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겠지?”
- ……그래, 알고 있네.
그 대답을 든는 동시에, 난 소환시켜놓은 모든 언데드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촤르르륵-!
순식간에 팔리만을 향해 쇄도하는 두 명의 데스나이트.
그 뒤를 엄호하는 것은, 마지막 마력을 짜낸 리치의 매직 미사일.
쿠콰아아앙-!
공격이 들어가는 동시에 폭음이 얼음성을 가득 메웠다.
“마지막 일격 치고는, 시시하군요.”
자욱한 연기가 걷히자, 팔리만의 앞에 서 있는 것은 다섯 거인 중 하나.
앞서 돌진한 두 명의 데스나이트는, 이미 상반신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죽이지는 마라.”
“크워억-!”
이어진 팔리만의 명령에, 곧장 튀어나간 거인이 주먹을 내질렀다.
- 제길!
이미 데스나이트들은 전멸한 상황.
리치인 앙헬이 급히 나서 방벽을 펼쳐봤지만, 거인의 주먹은 그것을 간단히 분쇄해버렸다.
파창-!
언데드의 상극인 신성력.
리치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주먹은, 이윽고 아무런 저항 없이 내 몸을 엄습했다.
쿠콰아아앙-!
다시 한 차례, 폭음.
정타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팔리만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쉰 뒤 내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에 만났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 조롱을 위한 한 마디.
“그래, 똑같네.”
“?!”
하지만 예상외로 멀쩡한 내 목소리에, 흠칫한 팔리만이 두어 걸음 물러섰다.
쩌적, 쩌저적.
내 몸을 두르고 있는 것은,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보호막.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 책의 전 주인인 팔리만이 더욱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성서, 타나크……?”
예상외의 상황에 말을 흐리던 그 순간.
쿠웅-!
한 차례의 울림과 함께, 내 등 뒤에 선 골룡의 거체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날 살리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우우웅-!
사하크의 몸을 감싼 계약문이 완성되어,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어중간한 야생 언데드가 아닌, 정식 계약을 맺은 본드래곤.
- 그대의 새 언데드에게 명령하게. 계약자, 클라인 라인란트.
그렇게 말하며 곧게 선 골룡의 목소리와 함께, 난 보란 듯 엄지손가락으로 내 목을 가리켰다.
“내가 그때도 말했잖아? 진작에 목을 쳤어야 했다고.”
***
“이쪽에도 부상자가 있다!”
“들 것 좀 가져와주게! 여기엔 병사들이 묻혀있어!”
“자자, 아직 걸을 수는 았잖아. 힘 내 보라고….”
세 번의 전투를 마친 장벽의 상태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곳곳이 무너진 성벽에, 피로에 지쳐 돌무더기에 기대있는 기사들.
“하아…!”
치유사인 파이를 중심으로 마을 아낙들이 분주하게 그들을 챙기고 있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한계에 달한 듯 했다.
“증원군과 장벽 덕에 우리 측 사상자는 비교적 적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태에선….”
“다음에 또 한번 전투가 벌어진다면, 삽시간에 붕괴할 수도 있겠군.”
코락스의 말에 부관인 보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의 침공으로 벌 수 있는 시간은 벌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공자님의 계획대로….’
그렇게 생각하던 사이, 집무실 문이 열리고 백발의 노기사가 그 안으로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폴와이번에서 온 증원군의 지휘관, 고든.
노쇠한 몸으로 선봉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곧게 펴진 노기사의 풍채는 도무지 굽어질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감시자들로부터 소식이 왔습니다.”
적진을 염탐하라 일러둔 감시자들.
그들의 보고서를 내민 고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상한 대로, 태양 십자군 측도 손실이 적지는 않습니다. 병사들의 수가 급격히 줄었죠.”
“보급선도 붕괴한 상황이니, 앞으로 가능한 공격은 한 번뿐이겠군요.”
코락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고든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편치 않았다.
“일반적인 수성전이라면 그리 생각하겠지만…. 뭔가가 이상합니다.”
그렇게 말한 고든은 손가락을 들어 보고서 한편을 가리켰다.
“일반병의 수가 급감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은 거인들은 오히려 수가 불어났습니다.”
검은 거인.
교국에서 풀어놓은 괴물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안한 것은…. 성기사단장인 주스틴 경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주스틴 경이 말입니까?”
상대측 지휘관의 이름이 나오자, 코락스의 눈이 잠시 커졌다.
“전투에서 전사한 겁니까?”
“아니요. 교전했다는 보고는 몇몇 있었지만, 쓰러트렸다 말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성기사단장 주스틴.
머나먼 서쪽의 기사인 고든과 북부의 기사인 코락스에게도 그 이름은 그리 낮선 것이 아니었다.
케르시아스의 창이라 불리우는 고강한, 그리고 고결한 성품을 지닌 남자.
기사로서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그는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었으니까.
다만 서로 칼을 맞댄 채 적대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이었다.
“평소에는 군영을 돌며 병사들의 상태를 살폈다던데, 이틀 전부터 모습을 보이니 않는다는군요.”
“그렇다면 혹시……?”
감시자들이 전한 보고를 들은 코락스가 미간을 좁혔다.
그가 어떻게 됐는지를 짐작한 모양이었다.
“교황은, 자신을 위해 싸우는 기사마저 적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군요.”
“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락스가 탄식했다.
전투 중에 지휘관을 숙청하다니.
그 공백을 도대체 어떻게 메꾸려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때, 고든은 창문 족으로 걸어가 다음 전투를 준비 중인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저 많은 군대를 앞에 두고도 주눅 들지 않다니, 오늘 북부의 기사들을 다시 보게 된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성벽 곳곳에 널브러진 검은 거인의 시체.
저것들 중의 태반은 증원으로 온 자신들이 아닌, 큰까마귀 기사단의 작품이었으니까.
“단지 하던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 말에 답하는 코락스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적국의 기사와 싸우는 대신, 괴수와 같은 인외의 존재들을 상대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기사들.
그렇기에 저 검은 거인과 같은 괴물들을 처리하는 것은, 큰까마귀 기사단의 전문분야였으니까.
“그렇지만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
이어지는 고든의 말에, 코락스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아군의 피해는 최소로, 적군의 피해는 최대로.
그렇게 말한 클라인의 지시를 떠올린 코락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보란.”
“예.”
그의 부름에 답한 부관이 부동자세를 취했다.
“적의 다음 침공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있지?”
“이틀입니다.”
이틀.
그 말에 코락스는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좋아. 그렇다면 전 장벽에 전해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얼음성을 지킨다.
언젠가 다가올 그 날을 위해.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큰까마귀 기사단은 장벽의 수호자를 맡아왔다.
‘그리고 결국, 그가 찾아왔었지.’
클라인 라인란트.
클레어 공후가 예언한 아이.
얼음성을 깨워, 라인란트의 사명에 종지부를 찍을 자.
그가 지시를 떠올리며, 코락스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우리들이 할 일은, 전부 끝났다고.”
북부를 가로막은 대장벽이 세워진 지 200년.
그 사명을 끝마칠 때가 된 것이다.
“……!”
그 말을 들은 보란은 잠시, 할 말을 잊은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다.
한평생을 지켜온 장벽을 포기하라니.
사전에 지시가 있었다 한들,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린, 이곳에서 죽어서는 안 돼.’
“큰까마귀 기사단장 코락스가, 전 장벽에 명한다.”
200년의 세월.
그동안 인내해 온 수많은 외압.
라인란트와 그 기사들에게는, 정산해야 할 빚이 있었으니까.
“현 시간부로, 큰까마귀 기사단과 감시자들은 대장벽을 포기. 부켄하임에 있는 라인란트 본대와 합류한다!”
얼음성은 이제 주인의 손으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지금, 그들의 칼이 향해야 할 곳은 북부가 아닐 터였다.
“……!”
그 사실을 깨달은 듯, 보란은 서둘러 집무실을 뛰쳐나왔다.
“…아무리 작전이라지만, 불안하기 짝이 없군요.”
그렇게 말한 것은 아직 집무실에 남아있는 고든이었다.
“얼음성의 악명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저 많은 수의 병력을 혼자서 상대하실 수 있을는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런 고든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코락스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곳은 아키몬드의 요새. 저 병력의 수백 배를 동원하고도, 끝내 뚫어내지 못한 곳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