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잘 잤냐?
크워어어-!
괴성과 함께 본드래곤의 몸이 밝게 빛났다.
아니, 빛나고 있는 것은 그의 몸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 각인된 수십, 수백 개의 방어술식, 폭격마법, 그리고 저주.
수백 개의 마법진이 투명한 얼음성의 표면을 뒤덮고, 이윽고 끝을 알 수 없는 힘이 내 눈앞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타이탄 전위. 앙헬은 강화마법 준비하고, 레이븐 키예스는 나와 함께 돌입 준비한다.”
그렇게 말하자 다른 언데드들 역시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임무는 내게로 이어지는 저 공격을 최대한 분산시키는 것.
카앙-!
일제히 돌입한 데스나이트들이 검기를 내뿜어 사하크의 머리를 가격했다.
한 명 한 명이 단장급 기사에 필적하는 위력.
몇몇 기사들은 생전에 자신들이 그러했듯, 서로의 마력을 동조시킨 합격기를 내보내기도 했다.
- 첸! 연계가 두 박자 늦는다! 한 번 죽더니 감 다 죽었나 보지?
- 웃기고 자빠졌네, 네가 두 박자 더 빠르게 들어간 거라고!
서로에게 악담을 퍼부으면서도, 연계는 착실하게 맞아떨어졌다.
괴수와 같은 거대한 적을 상대하는 정석과도 같은 방법에, 수십 년 동안 합을 맞춰 온 경험.
그렇지만 문제는, 그 기술을 맞는 상대가 용이라는 점이었다.
- 크워어어어어---!
키이이이이-!
공중에 떠오른 술식들이 점멸하는 동시에, 수많은 마법들이 사방으로 작렬했다.
쿠콰아아아앙-!
용의 심장에 담긴 마력의 양은 그야말로 마르지 않는 바다.
퍼져나가는 저 불꽃과 전격 하나하나가 요새를 부수는 대마법이었다.
- 크아아악?!
- 이런 미친, 뭔 놈의 마력이!
단 한 번의 공격에 언데드들의 상당수가 힘을 잃고 쓰러졌다.
기교, 전술, 병진.
그 모든 것을 깡그리 무시하는 압도적인 힘.
다른 언데드들이 주춤하는 동안 멀쩡히 남아있는 것은 양팔을 교차한 타이탄과 그 뒤에서 후속타를 준비 중인 데스나이트들뿐이었다.
- 대행자들보다 위험하다고 한 말, 취소해야겠는데?
- 비교 자체가 안된다는 말이지?
- 이길 수 있기는 한 것인지.
앙헬과 데스나이트들은 그렇게 말하며 투덜댔지만, 적어도 전의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그런 내 지시에 따라 묵묵히 다음 공격을 준비할 뿐.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건 이안 노친네의 영향인지, 아니면 그 노친네가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난 내 뒤에서 마력을 모으고 있던 앙헬에게 시선을 돌렸다.
“준비는?”
- 다 됐네. 명령만 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웃어대는 해골.
데스나이트들의 분전 덕분에, 이 한 수를 내지를 시간이 마련된 것이었다.
“타이탄.”
- 명령 확인.
내 말을 들은 강철거인이 교차시킨 두 팔을 풀었다.
투웅-!
이윽고 포탄처럼 쏘아져 나간 타이탄을 눈치챈 사하크가 곧바로 그를 향해 입을 벌렸다.
우우우우우---!
입 안에서 스멀스멀 모여드는 불길한 기운.
생명체의 본능이 끊임없이 경고를 보내는 것을 느끼면서, 난 내 추론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마법을 다시 쓰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브레스를 준비하는군.’
브레스.
풀이하자면, 용의 숨결.
용의 혈통에 따라 그 성질과 효능은 제각각 달라지지만, 적어도 그 기술은 단 한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현존하는 그 어떤 마법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내뿜는 순간, 일대의 생명체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 크워어어어어---!
승리를 확신한 듯, 사하크의 입에서 새하얀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숨결에 닿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절대적인 힘.
그렇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난 절망하는 대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바꿔 말하자면, 그것 말고는 수가 없다는 소리겠지!”
쿠우-!
광선에 정면으로 충돌한 타이탄의 거체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요동쳤다.
빠직, 빠지직-!
레어메탈로 이뤄진 몸체 곳곳에 금이 가고, 관절부는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했다.
그렇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은 채, 두 데스나이트와 함께 정면으로 달려나갔다.
“레이븐! 키예스!”
촤르륵-!
양옆에서 나타난 두 명의 기사.
그것을 확인한 앙헬은 곧바로 손을 뻗어 그가 모아둔 마력을 내게로 보냈다.
“크으-!”
내 것이 아닌 마력을 몸에 순환시키는 작업.
당장이라도 온몸의 혈관이 터져 나올 듯 거부반응을 일으켰지만, 지금의 난 그것을 참아낼 수 있었다.
“지난번에 했던 것보단 훨씬 낫구만!”
그렇게 말하며, 난 앙헬의 마력 파장을 조절했다.
- 하여튼, 끝나고 쓰러지지나 말라고.
- 동감.
수정검에 몰려드는 마력을 눈치챈 두 데스나이트가 자신들의 마력을 동조시켰다.
하나의 점을 중심으로 갈라진 세 자루의 검.
바람개비가 돌아가듯, 정확한 나선으로 맞물린 세 검사의 검은, 그대로 사하크의 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 크워어?!
그제서야 눈치챈 듯, 골룡의 머리가 올라간 순간.
콰득-!
다 부서져 가는 타이탄의 강완이, 골룡의 머리를 잡아 그대로 짓눌러버렸다.
- 사수한다. 존재를 걸고서라도.
짧은 한마디와 함께 드러난 것은, 골룡의 머리와 목뼈 사이의 연결부.
그곳에는 붉게 빛나는 보옥, 드래곤 하트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키이이이잉-!
내지른 검은 한 점으로 검을 찌르는 ‘트라이던트’
동조시킨 마력이 공명하자 그 위력은 제곱, 세제곱이 되어 용의 머리를 꿰뚫었다.
쿠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얼음성이 요동치고, 곳곳에 금이 간 수정들이 땅에 떨어지며 산산이 비산했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듯, 처참한 광경의 얼음성.
자욱한 연기가 걷히자, 그곳에는 힘을 잃고 쓰러진 사하크의 거체가 있었다.
쿠르르르르…….
천천히 무너지는 골룡의 거체.
그것을 바라보던 사이, 텅 빈 용의 해골에 미약한 빛이 감돌았다.
- …!
- 아직까지도…!
그것을 확인한 키예스와 앙헬이 곧바로 다시금 전투를 준비했지만, 나와 레이븐은 그들을 제지했다.
“괜찮아. 칼 내려.”
그러자 서서히 돌아온 사하크의 안광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처럼 이성 잃은 야수처럼 날뛰던 눈이 아닌, 이지와 지성을 갖춘 본래의 눈.
- 그대는……“
천천히 입을 여는 용의 목소리에, 난 옅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너나 베르켈 그 새끼나, 어떻게 좋게 넘어가는 법이 없냐.”
- ……아키몬드.
은발에 푸른 눈을 한 열 다섯 소년.
그렇지만 언데드의 눈은 외형이 아닌 혼을 보는 법이다.
곧바로 내 이름을 부른 사하크는 한결 편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그런가, 드디어…. 약속한 날이 된 것이로군.
“정작 당사자한테는 말도 안하고 잡은 약속이지만 말이야.”
그렇게 투덜거리며, 난 축 늘어진 골룡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잘잤냐? 망할 도마뱀 새끼.”
***
- 보아하니, 아직도 복수를 원하는 것 같지는 않군.
사하크는 그렇게 말하며 내 눈을 보았다.
- 두 번째 삶. 그 짧은 시간동안, 많은 일을 겪었어.
“별걸 다 꿰뚫어 보는구만.”
언데드가 되었다 한들, 그의 본질은 용족.
모든 생명의 정점이라 칭해지는 용의 권능은, 존재의 마음을 읽는 것이었다.
- 윈터폴의 옛 왕 레빈, 그의 명을 수행한 기사 베르켈. 그리고 예언가로써 베르켈의 의지를 전한 클레어….
“…….”
- 그대가 지닌 푸른 눈은 그들의 안배인 동시에, 우리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네.
희생.
담담하게 그 말을 내뱉는 모습을 보며, 난 이를 악물었다.
- 그럼에도 의문이 드는 것은 어떨 수 없군.
그렇지만 그 순간, 내 쪽을 바라본 사하크가 머리를 들며 말했다.
- 그대가 지키려는 북부의 인간들은 이미 얼음성 아래에 묻히고, 남은 것은 그들의 시체 위에 번성한 생명 뿐.
“맞는 말이긴 하지.”
- 그렇다면 내 질문하겠다.
내가 승낙하자, 사하크는 덤덤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 그대의 고향은 이미 짓밟혀 얼음 아래에 파묻혔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그 시체 위에 선 자들을 동지라 여기는 것인가?
잠시, 정적.
그렇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그 본질이 아니라 행동. 그리고 그가 내리는 선택이니.”
몇 번이나 입에 담았는지도 모를 원수의 격언.
“내가 지키려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선택을 한 사람들이니까.”
- 선택이라.
그것을 입에 담으며, 난 지금도 내 뒤에서 싸우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지금 저 뒤에 서서 교단을 막는 이들, 제국의 침공을 막아내는 라인란트의 기사들, 그리고 내 어처구니없는 계획에 동참한 수많은 사람들까지.”
“같잖은 힘에 매료된 멍청이들을 막아선 순간, 이들은 200년 전 윈터폴을 지키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아.”
내가 무엇이었는지를 알았음에도 그들은 날 지켜보았다.
그들을 보며, 난 결정한 것이다.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로.
- 허어…….
그렇게 말하자, 스마우그는 납득한 듯 눈을 감았다.
- 그렇다면 난 안심하고, 그대에게 다음을 맡길 수 있겠군.
그 말과 동시에, 사하크의 눈앞에, 자그마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우웅-!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아키몬드의 시신.
성검에 심장을 꿰뚫리고, 노르트빈트에 의해 목이 달아난 악당의 시체였다.
- 이건, 자네의 시신 아닌가?
다른 언데드들 또한 의아한 듯 그것을 보고 있었다.
- 이 상황에 자네의 시신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마법사인 앙헬이 그렇게 말한 순간.
내 시신을 본 그의 입이 다물어지더니, 이내 앙헬은 전에없던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아키몬드는, 홀로 대륙을 휩쓴 네크로맨서라고 했었지.
연구실에서 틈틈이 읽고 있던 대륙의 역사.
그것을 읊은 앙헬이 계속해서 말했다.
- 한 명의 인간이 대륙 전체를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수백만이 넘는 수의 언데드를 실시간으로 통솔했다고.
마법사인 그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고강한 마력을 가졌다 한들, 한 사람의 인간.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그릇에는 염연히 한계가 존재했으니까.
-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거대한 규모의 마법은 존재한다.
요새를 부수는 대마법을 사용하고자, 여러 명의 마법사들이 합동으로 술식을 구축한다.
거대한 괴수를 쓰러트리기 위해, 기사들은 서로의 마력 파장을 동조시켜 합격기를 만들어낸다.
하나가 안된다면 둘, 둘이 안 된다면 넷.
인간의 싸움이란 언제나 그렇게, 연계와 연합을 통해 이뤄진 것이었다.
- 어떻게 혼자서, 그 많은 언데드를 통솔할 수 있었던 건가.
그렇지만 아키몬드.
그는 달랐다.
고향 땅은 황폐화되고, 동료들은 얼음성을 만들고자 자신의 존재를 바쳤었지.
끝없이 펼쳐진 설원 속, 남아있는 것은 그 하나.
친구도, 동료도, 뜻을 함께하는 이도 없이, 그는 홀로 얼음성을 통솔하고, 수백만 언데드로 자신의 복수를 실현시키려 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한 가지 수단.
그것은….
- 자네, 얼음성과 자기 몸을 동화시켰군.
그렇게 말하며, 앙헬은 죽은 아키몬드의 시체를 모았다.
얼음성의 외벽과 같이 투명한 수정으로 화한, 옛 네크로맨서의 시신을.
“…….”
- 인간의 육신을 포기하고, 스스로 신의 심장이 된 것이었어.
그 짧은 시간에 거기까지 추론해낼 줄이야.
역시, 언데드로 전락했을지언정 아이신기오르의 궁정마법사라는 것일까.
- 신의 심장에 자신의 의지를 깃들여, 절대적인 힘을 휘두르는 자.
그렇게 생각한 내가 한동안 말이 없자, 앙헬은 천천히 날 보며 입을 열었다.
- 황제와 교황의 최종목적을, 그대는 200년 전에 이루어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