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진짜 목적
푹, 푹.
몇 분 전에 남겼던 발자국은 이미 눈보라에 파묻혀, 어디가 어디인지도 제대로 분간이 가지 않았다.
살을 에는 냉기를 견디며 눈을 들자, 두 눈에 담기는 광경은 200년 전과 같은 차가운 공간.
지평선까지 이어진 새하얀 설원과 군데군데 솟아있는 빙산.
그리고 그 정중앙에 우뚝 서 있는, 얼음성의 첨탑이었다.
크르르르르……!
키익, 키이이익-!
“이건 또 뭐야.”
이곳은 망자의 땅.
그렇지만 난 의아한 듯 성문 주변을 배회하는 언데드들을 살폈다.
200년 전에 생성되었던 언데드라면, 이미 영체가 마모되었을 터.
그렇지만 이 언데드들은 영체가 아닌 자신의 육체를 아직 보존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아직 남아있었단 말이야?”
흐린 눈으로 그들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환생한 뒤 처음 얼음성에 도달했을 때.
내 힘을 얻겠다며 무작정 얼음성으로 향한 멍청이들.
“분명 돌아오는 길에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머릿속으로 레이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크레바스 아래로 떨어진 시체들일세. 원혼들이 언데드화 시킨 뒤, 그곳을 기어 올라온 게지.
“허, 질기다고 해야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그렇게 말하며 난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아린을 보았다.
“아린.”
“네!”
내 부름에 활기찬 대답이 들려왔다.
맨몸의 인간이라면 한 시간만 서있어도 얼어죽는 혹한의 빙원.
방한장비와 설피, 보온용품으로 몸을 꽁꽁 둘러맨 나와 달리, 아린은 이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도 원래의 하녀복 차림을 유지하고 있었다.
“키이이익-!”
“크워어억-!”
내 존재를 눈치챈 언데드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빙원에 떠도는 원혼들은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는 상황.
육신에 각인된 적의가 반응하여 날 치려 든 것일 터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내게 다가오지도, 손을 뻗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잘 씹어먹어야 한다. 알았지?”
“네에!”
마치 봄날에 마실이라도 나온 듯 활기찬 모습의 아린.
다른 세계의 존재인 것 같은 이질감을 풍기는 소녀의 몸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퍼석-!
“키이익?!”
육체의 정중앙을 꿰뚫은 아린의 그림자.
당혹한 표정의 시체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아린의 그림자가 그들을 남김없이 에워쌌다.
으적, 으적.
얼음을 깨부숴 먹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괴성으로 가득한 얼음성 문 앞은 고요해졌다.
“오랜만에 돌아왔더니, 웬 쥐새끼들이 설치고 있어.”
별다른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난 얼음성의 문에 손을 댔다.
구우우웅…….
한때 내가 직접 이 땅 위에 올렸던 성.
높이 솟아있는 얼음 문에 손을 대자, 성이 내 존재를 감지한 듯 한 차례 고동쳤다.
“열어라. 내가 누구인지 알 것 아니냐.”
나지막이 읊조리자, 얼음으로 이뤄진 거대한 성문이 천천히 양옆으로 갈라졌다.
“우와아-!”
처음 보는 광경에 아린이 감탄한 듯 소리를 냈다.
모든 구조물이 수정과 얼음으로 이뤄진 성의 내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 투명하고 새하얀 공간은 성의 내부가 아닌, 그것을 본떠 만들어낸 거대한 유리 조각인 것처럼 보였다.
“도련님, 여기가 도련님 성이에요?”
“아니, 여긴 입구야.”
진짜 얼음성은 나오지도 않았지.
그렇게 덧붙이며, 난 안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다.
“출발한 지 일주일. 하루 정도 단축했군.”
바람이 닿지 않는 고요한 공간.
시계를 확인한 난 그렇게 중얼거리며 얼음성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허, 이건 또 새삼 그리운 광경이구만.
공동 중앙에 난 흠집과 상흔을 보며 레이븐이 그렇게 말했다.
아키몬드 교단의 네크로맨서에게 붙잡혀, 그의 도구로써 사용되었던 레이븐.
- 자네 기억나나? 그때 나 때문에 죽을 뻔한 것 말일세.
“글쎄, 이제는 이름도 기억 안 나는데.”
얼음성에 흙발로 들어온 멍청이와의 싸움을 떠올리며, 난 허리춤에서 수정검을 뽑았다.
우웅-!
허공에 그것을 놓자, 둥실 떠오른 수정검의 검신에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 돌아온 네 주인이 고하니, 열어라.
입구에서 했던 말을 반복하자, 수정검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투명한 벽에 떠오르는 새파란 룬어들.
하늘 위로 올라가는 그것은 이윽고 점차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원형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 북부의 공간이동 술식이라….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
앙헬의 감탄을 들으며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순간, 하얗게 물든 시야가 되돌아왔을 때.
내가 서 있는 공간은 유리로 이뤄진 넓은 공동으로 뒤바뀌어있었다.
“결국, 돌아왔군.”
눈을 아래로 내리깐 난 그렇게 읊조렸다.
얼음성의 첫 번째 층.
유리처럼 투명한 빙하 아래에 잠들어 있는 것은 옜 북부 왕국인 윈터폴의 수도, 하이델베르그였다.
“…….”
유리관 속에 박제된 도시.
기억 속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나의 고향.
20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찰나.
“정면. 전력으로 막아.”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두 명의 데스나이트가 검을 교차해 허공을 후려쳤다.
쿠콰아아아앙-!
아니, 후려친 것은 허공이 아니었다.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튕겨 나간 것은 거대한 발.
파충류의 뼈로 이뤄진 거대한 발톱이, 날 향해 날을 번득이고 있었다.
“이 몸으로 태어난 이후, 항상 생각했었지.”
그렇게 말하면서, 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사라진 후 200년 동안, 이곳에 남아있던 망령들은 북부를 벗어나지 않았다.”
얼음성의 중추인 내가 사라진 시점에서, 그들을 제어할 방법은 없었음에도.
“그리고 베르켈 녀석과 그 후손들은, 마치 그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느긋하게 저 거대한 장벽을 쌓았지.”
언제 아키몬드의 잔당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지금의 장벽을 만들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첨탑에서 설화수정을 가져오던 때.
얼음성을 점검한 난, 200년 전 전투에 있었던 한 존재를 알아챈 것이다.
쿠우-!
투명한 얼음성의 공동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거체.
- 크르르르르…….
푸른 안광과 으르렁거리는 이빨, 벽을 짚고 있는 거대한 날개.
생전의 검은 비늘은 간데없이 뼈만 남은 모습이었음에도, 그 모습은 200년 전, 그때의 싸움을 떠오르게 하기 충분했다.
“네가, 이들을 붙잡아두고 있었구나.”
베르켈과 그 기사들이 수백만 언데드를 뚫고 얼음성까지 침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200년 전 싸움에서 나 아키몬드의 제1심복, 타이탄과 동귀어진하며 진입로를 뚫어낸 자.
“최후의 용, 흑룡 사하크.”
크아아아아아---!
내가 이름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그의 거체가 날 향해 쏟아졌다.
베르켈의 계약자, 흑룡 사하크.
모든 언데드의 정점에 선 최고위 언데드, 본드래곤의 출현이었다.
***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가 올 줄은 몰랐네.”
대장벽 중앙에 위치한 기사단장의 집무실.
그렇게 말한 코락스의 맞은편에는 그와 같은 나이대의 기사가 서 있었다.
“듄켈.”
붉은수레 기사단의 단장, 듄켈.
그가 이름을 부르자, 그 역시 새삼 놀라운 듯 피식 웃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인가, 두 번 다시 얼굴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동감일세. 심지어 우릴 한자리에 모은 사람이…. 그분의 아들이라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눈을 내리깐 코락스를 보며 듄켈은 주먹을 쥐었다.
“공자님께서는…. 알고 계신 건가?”
“아니, 그렇진 않을걸세.”
자네는 오래전부터 공자님을 보필했었고 나 또한 공자님에게 충성하니, 이렇게 한 자리에 모으신 것뿐일 테지.
그렇게 말한 코락스는 회한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듄켈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일 알고 계셨다면, 그분이 어찌 우리를 믿겠는가.”
“…….”
“모시던 귀부인조차 지키지 못했던 기사에게, 등을 맡기실 리 없지.”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기라도 한 듯, 코락스의 말을 들은 듄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만, 지금은 때가 아닌 듯싶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두 기사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고든 경….”
“급한 소식을 전하러 찾아왔건만, 늙은이가 본의 아니게 실례를 저질렀군요.”
“아닙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렇게 말한 노기사가 고개를 숙이자 코락스는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헌데, 급한 소식이라면…?”
“정찰병들에게서 소식이 왔습니다.”
앞으로 다가온 고든은 전서구가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쪽지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코락스의 표정이 굳자, 듄켈은 올 것이 왔다는 듯 허리춤에 채워진 검을 잡았다.
“태양 십자군을 육안으로 확인. 수는 약 2만. 대장벽을 향해 진군하는 중이라…….”
“극동 지역으로 우회하여 설원으로 진입하는 소수 병력도 포착되었습니다. 교국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진짜는 그쪽이겠지요.”
고든의 분석이 이어지자 코락스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별동대는 먼저 얼음성으로 가 공자님을 처리하고, 남은 병력은 장벽을 지키는 우릴 뚫고 갈 생각이군요.”
말이 별동대지, 보고서에 따르면 그 수만 5천이다.
거기에 이 원정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저 별동대에는 교황이 있을 터.
그를 호위하는 성직자, 전투수사, 그리고 거기에 포함된 성물.
아무리 대행자 두 명을 쓰러트린 자라 한들,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병력을 쪼개도 장벽 정도는 우습게 짓밟을 수 있다 생각한 것이겠지. 대단한 자신감이야.”
듄켈의 분석에 코락스가 불쾌한 듯 미간을 좁혔다.
장벽의 전투 가능한 인원을 전부 끌어모은다 한들, 그 수는 약 2천.
아무리 장벽을 점유하고 있다 한들, 일곱 배가 넘는 병력 차이를 이겨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저들은 저희들의 존재를 모릅니다.”
고든의 한 마디에 코락스의 눈이 빛났다.
“폴와이번의 기사단, 아일라시스의 전투마법사까지. 막아낼 수 있다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계획을 일그러트리는 것은 가능하겠죠.”
“아뇨.”
최대한 조심스러운 예측을 내보인 고든이었지만, 코락스는 단호하게 그 말을 정정했다.
“이겨야 합니다.”
장벽은 언제나 변치 않고 북부를 지키고 있었다.
아키몬드 교단이 보낸 수천 언데드의 군세에서도.
수많은 몬스터들의 침공 속에서도, 그들은 언제나 그랬듯 이 벽을 지켜왔으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그에게는, 이 침공을 막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클레어 님을 지키지 못한 죄. 그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
대답을 듣지 않은 채, 코락스는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단장님!”
“적은 이미 공성전을 준비 중입니다. 그리고 성직자들 사이에서 이런 것이….”
적진을 살피고 온 감시자들이 종이에 그려진 그림 하나를 건넸다.
“교단 놈들, 기어이 괴물을 만들어냈군.”
그림을 본 코락스가 그렇게 말하며 치를 떨었다.
이단심문관들과 같이, 얼굴에 태양 십자를 박아넣은 거인.
사슬에 묶여있는 그 모습은, 지금의 교단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명실상부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미안하게 됐어.”
그가 말한 그대로, 괴물과 같은 모습.
그렇지만 보고를 하는 감시자들도, 보고를 받는 기사들에게서도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괴물을 잡는 건 우리 전문분야라서 말이야.”
두려워하기는커녕, 코락스의 말에 맞장구치듯,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전 병력은 들어라!”
코락스의 고함에 곳곳에 배치된 병사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이 곳을 지켜온 지 200년. 드디어 우리에게 주어진 진짜 임무를 수행할 때가 왔다!”
흔히들 말한다.
대장벽의 존재 의의는, 얼음성의 언데드로부터 대륙을 지키는 것이라고.
그렇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우린 장벽의 수호자로서, 대륙의 위정자들로부터 얼음성을 지킨다!”
코락스가 입에 담은 말.
이것이 대장벽의 진정한 존재 의의이자, 큰까마귀 기사단의 진짜 임무.
“시조 베르켈 라인란트의 맹약이 우리와 함께하니, 장벽은 결코 스러지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