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애초에 빚진 삶이었으니
부웅!
개리슨의 주먹이 내 안면을 향해 짓쳐들어왔다.
신성력으로 보강된 대행자의 강권.
레오노르를 상대했던 것처럼, 타이탄의 주먹이 그에 맞섰다.
그리고 뒤이어, 충돌.
쿠콰아아아앙-!
레오노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굉음이 저택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단순히 주먹질만으로도 이 정도의 위력.
앞서간 두 대행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야말로 격이 다른 힘의 농도였다.
“아키몬드-!”
이젠 날 본래의 이름으로조차 부르지 않는 신부.
전투가 시작되자, 그는 그간의 감정을 전부 폭발시키듯 날 향해 돌진해왔다.
키기기기기기-!
내게로 날아오는 개리슨의 존재감.
그리고 그 이상으로 위험한 힘을 줄기줄기 내뿜는 그의 무기, 성법기 엔릴.
언데드의 몸은 닿는 것만으로도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절대상성의 무기가 날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레이븐, 키예스.”
정확히는, 내리찍으려고 한 것이겠지만.
카아아아앙-!
엔릴의 충격음은 내 머리가 깨지는 소리도, 언데드다 소멸되는 소리도 아니었다.
신성력의 덩어리나 다름없는 엔릴에게서 난 소리는, 금속이 부딪치는 파열음.
“……!”
자신의 공격이 가로막혔다는 것을 깨닫고 눈앞을 보자,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끼긱, 끼기기기……!
- 젠장, 보강을 해도 죽을 맛이군!
- 인간의 몸으로도 이만한 힘을 휘두르는데, 신 본체는 어떨는지……!
성법기로 내지른 일격이 막힌 찰나의 순간.
자신의 공격이 막혔다는 걸 알아챈 개리슨은 잠시 놀란 듯 움직임을 멈췄다.
“내가 이 시간까지, 널 상대할 때의 대책을 하나도 연구하지 않은 줄 알아?”
성법기를 막아낸 것은, 앙헬의 마력으로 보강된 두 자루의 마력검이었다.
마기로 골격을 이루는 언데드를 신성력에서 보호하기 위한 임시방편.
완전히 막아내는 것을 불가할지언정, 한 번의 공격은 버텨날 수 있었다.
“그리고 언데드의 최대 강점은 재생력. 역소환만 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어.”
네크론의 은총과 타이탄을 만드는 과정에서, 지금의 내 마기는 최고조에 다다른바.
얼마 지나지 않는다면, 전생의 힘을 회복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 뭐, 죽기 직전까지 갔다 살아나는 우린 죽을 맛이지만 말이지.
- 계약자를 잘못 만난 탓이지. 혹은 단장님의 성격이 옮았을 수도 있겠군.
촤르륵-!
레이븐과 인격이 돌아온 키예스의 잡담과 동시에, 듀라한들이 개리슨을 향해 창을 찔러 들어왔다.
‘동시에 네 방향에서 찔러 들어오는 창날. 아무리 저 괴물 같은 신부라도 한두 대 정도는…!’
콰득-!
…방금 한 생각 취소.
저 정신 나간 곰 새끼, 신성력을 폭발시켜서 그를 포위하던 언데드를 한 번에 날려버렸다.
- 우왁?! 저게 뭔….! 방금 두 놈이랑 같은 대행자가 맡기는 한 거야?!
- 폭발의 반동 만으로도 네 명이 역소환 당했다. 듀라한들은 더 보내봤자 헛수고야.
중급 언데드조차 한 방에 박살 내버리는 강대한 힘.
그것을 확인한 데스나이트들이 곧바로 진형을 가다듬었다.
‘원래 같았으면 이대로 말려 죽이면 그만이긴 한데….’
그렇게 생각하며 오른손을 보았다.
지속적인 마기 배출을 감당하지 못하고 경련하는 팔.
‘이대로면 길어야 두 시간 정도로군.’
네크론의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몸은 아직 내 마기를 전부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신성력으로 몸을 치유하며 싸우는 개리슨은 아직도 활력이 넘치는 상황.
이런 대치 구도가 계속된다면, 말라 죽는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한 방에 걸어볼 수밖에 없겠군.’
생각을 마친 난, 눈을 가늘게 뜬 채 리치인 앙헬을 불렀다.
- 말하게. 준비할 테니.
내 쪽을 흘깃 바라본 앙헬이 그렇게 말했다.
대규모 마법은 한 번 뿐이랬던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난 앙헬에게 지시했다.
“네 마력이 필요해. 남아있는 거 전부다.”
***
카앙-!
‘소모가 점점 심해지는군.’
자신을 포위한 기사들의 검을 걷어내며, 개리슨은 자신과 맞서고 있는 소년을 보았다.
클라인 라인란트.
아니, 아키몬드.
자신의 인생을 망가트린 원흉이자, 대륙을 둘러싼 이 모든 악의 근원.
‘이미 한계까지 몸을 혹사했다. 이대로 대치한다면, 놈은 군단을 유지하지 못해 스스로 자멸할 터.’
대치상황을 유지한 뒤, 힘이 빠지면 놈을 죽인다.
그렇게 생각하던 개리슨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성직자라는 인간이, 이 참상을 목도하고도 가만히 있겠다고?’
그 어린 나이에, 자신을 향해 탄원하던 소년의 목소리.
‘그럼 꺼져. 나 혼자라도 갈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구덩이로 뛰어가던 소년의 등을 떠올렸다.
어쩌면 개리슨은 그때, 이미 알아챘을지도 몰랐다.
이 소년이 어떤 인간인지.
아키몬드가, 사실은 어떤 인간이었을지를.
“그렇다 해도!”
쿠웅-!
신성력을 끌어내 잡념을 털어냈다.
아니, 그의 잡념을 털어낸 것은 신성력이 아닌, 그때의 기억이었다.
‘어서 네 몸을 바치렴!’
‘아키몬드 님을 위해!’
부모가 기꺼이 자식을 죽이려 하는 광기의 장에서, 그들은 일제히 그의 이름을 외쳤었다.
아키몬드.
아키몬드!
아키몬드!!
“네놈이 남긴 잔재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단 말이다-!”
이성이 아무리 외친다 한들, 수십 년간 쌓여온 감정은 조금도 깎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개리슨은 생각했다.
내 손으로 제거해야 한다고.
그 모든 비극의 원흉,
그 모든 욕망의 근원.
그 모든 동경의 끝을, 내 손으로……!
“아키몬드으으-!”
콱-!
그리고 그 순간, 개리슨의 손이 소년의 새하얀 목을 낚아챘다.
“커흑!”
어떻게 소년의 언데드들을 뚫었는지조차 제대로 생각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 병진을 뚫었다는 것과, 이미 손 안에 들어온 소년의 목.
빛을 바래가는 성법기를 쓸 필요도 없었다.
손을 뻗어 목덜미를 거머쥔 뒤, 그것을 쥐어 터트리면 될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손아귀에 힘을 쥐려는 순간.
“부탁이다.”
목이 짓눌리는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소년이 그에게 말했다.
“부니 나와 같은 괴물만큼은, 되지 말아다오.”
괴물.
상실감에 미쳐, 눈앞의 모든 것을 지워버린 괴물.
복수라는 감정 하나만을 지닌 채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
문득, 개리슨은 움직임을 멈춘 채 생각했다.
그런 내 삶이, 그토록 증오하던 아키몬드의 삶과 달랐을까?
그러던 그때.
“고맙다. 망설여줘서.”
그의 손에 잡혀있던 클라인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목이 짓눌렸는데 어떻게 목소리를…. 설마?!”
그렇게 중얼거리던 개리슨이 아차 싶어 외친 그 순간.
“그래, 정답이다.”
“?!”
퍼석-!
그렇게 말한 클라인이.
아니, 클라인의 형상을 한 도플갱어가 석고상처럼 굳어버리며, 종국에는 바스라졌다.
‘뒤!’
본능적인 감각에 등을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클라인은 이미 그를 향해 뛰어내리며 검을 세우고 있었다.
스걱!
수직으로 찔러 온 검에 맞아, 개리슨의 어깨에 피가 튀었다.
언데드들의 견제와 그사이에 섞어 놓은 허수, 그리고 결정적인 한 수.
“크으-!”
먼저 피를 본 개리슨은 곧바로 신성력을 끌어올려, 눈앞을 막았다.
그렇지만 개리슨은 자신의 방어를 우회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면으로 몸을 날리는 클라인의 모습을 보았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
날카로운 예기.
불길한, 아니, 어쩌면 편안한 예감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끼기기기기긱-!
뭔가가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소년의 검이 일렁거렸다.
마력 없는 맨몸의 인간이 휘두르는 검.
그렇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개리슨은 신성력을 엔릴에 담아 소년을 올려쳤고.
파창-!
그의 망치는 유리조각처럼 깨져버린 채 허공에 잔해를 흩날리고 있었다.
교단의 3대 성물이 파괴된 순간.
그 장본인인 소년의 검은, 시리도록 투명한 수정검이었다.
쿠콰아아아아앙-!
후폭풍만으로도 저택의 외벽이 산산이 터져 나왔다.
유성검을 역순으로 재배치하며 만들어낸 기술, 상승유성.
거기에 오르간의 비기가 더해진 기괴한 기술이, 거의 완벽에 가까운 형태로 완성되어 있었다.
“………!”
개리슨의 골이 뒤흔들릴 정도의 강한 충격.
교단의 방패요, 교단의 창이었던 남자는 그것을 보며 깨달았다.
“자, 이 정도면 증명이 되나?”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의 목에는 클라인의 노르드빈트가 겨눠진 채였다.
“망할 신부새끼.”
교단의 대행자이자 엔릴의 계승자, 개리슨 비어크만.
그가 처음으로 겪는 패배였다.
***
“…….”
“….”
한동안, 나와 개리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투의 결과는 내 승리.
죽이지 않았으면 결투는 끝나지 않았다며 달려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녀석은 침중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은, 근원이다.”
한참 만에 입을 연 개리슨은, 마치 무언가가 빠져나간 듯 허한 목소리였다.
“제국을 미치게 한 장본인이요, 교단을 타락시킨 시작점. 네 추종자로 하여금 내 인생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가트리게 한 악당.
쉴새 없이 쏟아지는 악담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제국에 교단에 뭐에.
아주 눈에 뵈는 건 죄다 나 때문이지?
그렇게 생각하던 것도 잠시.
“그리고 동시에, 내가 구해낸 첫 생명이었다.”
“…….”
“복수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던 내가, 네놈을 시작으로 누군가를 살릴 생각을 했단 말이다.”
처음으로 입 밖에 꺼낸 말.
그것을 곱씹을 틈도 없이, 개리슨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네게 모든 것을 잃고, 네게 모든 것을 받은 자로서 요구하니.”
부서져 버린 망치.
처음으로 맛본 패배.
그 상실감이 모두 섞인 얼굴로,
“이번에야말로, 네 손으로 세상을 구해 봐라.”
그렇게 말한 개리슨은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마치 이 자리에서 삶을 놓아버릴 심산인 듯, 그는 자신의 목에 닿은 노르드빈트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지긋이 바라본 난….
“어우 씨, 닭살 돋아서 더 이상은 못 하겠네.”
그 말과 함께, 들고 있던 노르드빈트를 놓은 채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지금까지 시비란 시비는 지가 다 털어놓고 이제 와서 뭘 해탈했다는 듯 굴고 있냐?”
“…….”
이윽고 이어지는 내 독설에 개리슨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목에 남은 피나 닦고, 다음 전투 준비해. 교단 놈들 쳐들어온다고 한창 바쁜데 힘까지 빼게 하고, 하여튼….”
“날 죽이지 않을 셈인가?”
내 말을 끊은 개리슨이 그렇게 묻자, 난 되려 코웃음 쳤다.
“죽여? 돌았냐? 안 그래도 인원 부족인데, 너 같은 인간병기를 그냥 버리라고?”
“난 네놈을 죽이기 위해….”
“200년 전에는 온 대륙이 다 나 한번 죽여보겠다고 안달이 났었다. 그동안 너 같은 놈을 한두 명 만나본 줄 알아?”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반면,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마기의 과다사용 때문에 시야는 흐릿하고.
그렇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저 신부놈의 요구에는 확실히 답을 줘야겠지.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내 힘껏 구해볼 테니 염려 마라.”
그렇게 생각한 난, 그렇게 말하며 심장 부근을 툭툭 두드렸다.
크리펠에서 사용하던 수신호.
‘믿어라’라는 수신호에, 스텔라가 잠시 마른 숨을 들이켰다.
“네가 크리펠에서 날 구한 그때부터.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