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증명하는 수밖에 없지
얼음성.
그 말을 듣자 좌중의 공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얼음성이라니…. 장벽 너머에 있는 그걸 말하는 건가요?”
모르기 때문에 나온 질문은 결코 아니었다.
200년 전, 대륙을 공포로 몰아넣은 네크로맨서, 아키몬드의 거점.
주인이 사라진 지금에 이르러서도, 끊임없이 언데드를 뿜어대는 살인공장.
북부에 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라 할지라도 그 성의 존재를 알고 있다.
우는 애들 달래는 데엔 얼음성 귀신 얘기가 제격일 정도였으니까.
“얼음성이…. 신을 강림시킬 수 있는 장소라고?”
“동쪽 끝에 있는 원초의 화로처럼 말이야.”
내 대답을 듣자, 나와 함께 순례길에 올랐던 스텔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럼 그때 공자님이 네크론을 부른 것도…?”
“정답입니다. 놈들이 사용하기 전에 선수를 친 셈이죠.”
네크론. 그 뺀질거리는 상판이 절로 떠올랐다.
“원초의 화로를 사용했단 말인가? 그곳은 교단의….”
“원초의 화로는 무슨, 그건 신성교단이 멋대로 붙인 이름이야.”
개리슨의 질문에 쓰게 웃으며 답했다.
“실제 이름은 아이신기오르 동부 만신전. 누가 관공서 아니랄까 봐, 참 멋대가리 없는 이름이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평이한 이름.
옛 제국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내듯, 직설적인 명칭이었다.
“신성교단이 대륙에 뿌리내리지 않은 옛날, 이 대륙에는 수많은 신격들이 존재했었다.”
그렇게 운을 뗀 내 손짓에 맞춰, 검게 피어오른 마기가 푸른 빛을 내기 시작했다.
“번개, 불, 구름, 땅…. 수많은 자연물을 관장하는 신격이 있었고, 그들을 섬기는 관들 역시 다들 제각각 다른 힘을 사용했었지.”
번개의 신, 페루온을 숭배하는 신관은 하늘을 찢는 뇌전을.
생명과 풍요의 신, 테미르를 모시는 무녀는 상처를 아물게 하는 생명력을.
죽음의 신, 네크론을 모시는 네크로맨서는 망자를 인도하는 마기를.
“그럼, 신성력이란 건…….”
“신적 존재로부터 부여받는 힘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제가 다루는 마기도 본질적으론 교단의 신성력과 같죠.”
대륙에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아니, 대륙에 알려지지 않도록 교단이 숨겨왔던 사실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만신전이란, 그렇게 각기 다른 신을 믿던 신관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낸, 일종의 공용 제단이고요.”
수많은 신들의 고유한 힘을 한데 모아 만들어낸 ‘신의 심장’을 중심으로 건설되는 거대한 신전.
만신전 중앙에 위치한 심장에 각 신격에 부합하는 힘을 불어넣음으로써, 그들이 찾고자 하는 신을 현실 세계에 강림시키게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째서 교단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거죠?”
설명하던 내게 물은 것은 말을 듣고 있던 프리실라였다.
“자신들의 종교가 위험하다면, 항상 그랬듯 신을 부르면 될 텐데, 어째서?”
“만신전이 현현시키는 것은 신의 의지뿐, 육신까지 부를 순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생각에 잠긴 난 피식 웃으며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이제 얼음성이 아니라면 남아있지도 않은 만신전.
금기를 발설한들, 날 탓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정확히는, 신의 육체를 현신시켜서는 안 됐으니까.”
“안됐, 다고요?”
질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난, 씁쓸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교황이 데려오는 2만 명의 병사는….”
그렇게 말하자, 얼굴이 새파래진 스텔라가 입을 틀어막으며 내가 다음에 할 말을 대신했다.
“케르시아스를 강림시키기 위한, 제물…….”
신의 의지와 대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해진 양의 신성력 뿐.
그렇기에 옛 신관들은 원할 때마다 만신전에 들러, 자신들의 신과 직접 교감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의지가 아닌 육체를 현실 세계에 현현시키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피와 살이 필요하다.
예를 들자면, 지금 교황이 데려오고 있는 2만 명의 신자.
예를 들자면, 교단의 종교전쟁에 대항하고자 자결을 택했던 루스펠 교단의 신자들.
그리고, 예를 들자면.
고통과 원한에 미쳐, 복수를 울부짖던 수십만 윈터폴의 시민들.
“네크론을 강림시킨 시점에서, 원초의 화로에 위치한‘신의 심장’은 힘을 다했습니다.”
만신전의 중심이 되는 요소, ‘신의 심장.’
다른 신격을 인정하지 않는 신성교단의 박해 덕에, 이제는 더 이상 만들어낼 수 없는 물건.
그것을 언급한 난 고개를 돌려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북쪽 끝에 위치한 얼음성에는…. 한 번밖에 사용하지 않은 온전한 ‘신의 심장’이 잠들어있죠.”
제국과 교단이 윈터폴을 노린 가장 큰 이유.
그들의 손에서 고향을 지키기 위해, 나와 내 동료들이 복원해낸 물건.
그리고 원한에 미친 내가 성의 형태로 빚어내어, 복수의 도구로써 재탄생시킨 물건.
“교황은 북쪽 끝으로 가서, 케르시아스를 강림시킬 겁니다.”
“의지를 죽여 껍데기만 남은, 거대한 힘의 집합체를 말이지.”
그렇게 말한 것은 미리암.
오랜 시간 동안, 교황 브리간테의 행적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예. 그리고 그걸 막기 위해선…….”
잠시 말을 흐린 난, 한참 만에 준비해 둔 말을 입에 담았다.
“그들보다 먼저 얼음성에 도달해서, 그 제어권을 되찾아야 합니다.”
“웃기는 소리.”
역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개리슨이 차가운 눈이 내 모습을 담고 있었다.
“아키몬드의 환생인 네놈을, 다시 그 얼음성에 보내라는 말인가?”
“그래, 그렇게 되겠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개리슨의 표정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케르시아스 님의 성직자가, 대륙을 뒤집어놓은 네크로맨서가 본거지에 돌아가는 걸 두 눈으로 보고 있으란 말이냐?”
“싫으면 뭐, 교황 앞에 기어가서 사이좋게 손잡고 뒤지던가.”
콱!
말이 끝나는 순간, 눈앞에 나타난 개리슨이 내 가슴을 잡아챘다.
멱살을 잡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저절로 숨이 막혀왔다.
“공자님!”
“괜찮아. 내버려 둬.”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는 기사들을 제지하며 그렇게 말했다.
대행자의 습격을 막아낸 직후라 기사들의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상황.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저들은 당장에 개리슨을 향해 달려들 터였다.
“야, 신부. 만날 때마다 이렇게 이빨 세우는 것도 슬슬 지겹지 않냐?”
“잘도 지껄이는군. 머리를 짓이겨도 그렇게 태평할 수 있는지 볼까?”
“허이구, 무서워서 한 마디를 못하겠네.”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군.”
야차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린 개리슨이 입을 열었다.
“네놈이 교황과 대면하는 상황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겠나?”
대행자 둘을 소모품으로 사용하면서까지 날 확보하려 한 교황.
그 사실을 상기시키며, 개리슨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얼음성에 간 네놈이 사로잡히기라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교황이 원하는 바일 터.”
“…….”
“헌데, 얼음성으로 가겠다고? 그곳에서 네놈이 뭘 할 수 있길래?”
“할 일이야 많지. 예를 들면….”
그렇게 묻는 개리슨에게, 난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200년 전에 준동한 아키몬드의 언데드를 다시 일으킨다던가.”
그리고 그 순간, 날 보고 있던 개리슨의 표정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냉기 서린 불신에서, 서슬 퍼런 적의로.
쿠우-!
개리슨이 손을 뻗어 내게로 겨눴다.
녀석의 성법기인 망치, 엔릴.
순도 높은 신성력 덩어리가 날 향하자, 코끝부터 저릿한 감각이 마구 올라왔다.
“그 때의 네놈으로 돌아가겠다고?”
이글거리는 눈을 마주한 채, 개리슨이 씹어뱉듯 말했다.
“네 과오를 씻기 위해 그동안 온갖 난리를 쳐 온 주제에, 이제 와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겠다?”
“…….”
내가 대답이 없자, 개리슨의 적의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온갖 감정이 뒤엉킨 표정.
환멸인지, 후회인지 모를 얼굴을 한 채, 개리슨은 재차 내게 말했다.
“지금 대륙에서, 북부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누구인지, 네놈이 가장 잘 알 텐데.
“나와 내 연구 때문이야. 잘 알고 있지.”
아마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그렇게 말하려는 것을 눌러 담은 사이.
“그래, 전부 네놈 때문이다.”
울분에 찬 개리슨의 목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오래전 수많은 이들을 불행으로 밀어 넣은 네놈이, 이제는 다시 그 성의 꼭대기에 서겠다고?”
날 비탄하는 그의 목소리에 굳이 항변하지 않았다.
그는 내 연구로 인해 인생을 잃은 자.
그가 겪었던 불행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 쓴소리는 충분히 받아줄 수 있었으니까.
“그래, 그럴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교황의 계획을 저지하고, 침공을 막아낼 수 있는 확실한 수. 거기에 더불어, 제국과 진행 중인 전쟁의 향방도 뒤집을 수 있겠지.”
수백 만에 달하는 언데드와 수천에 달하는 고위 언데드.
200년의 시간은 대부분의 혼들을 환원시켰지만, 아직도 그곳에는 한을 풀지 못한 영혼들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거두는 것도, 내 몫이고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자세를 바로잡은 난,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날 노려보는 개리슨에게 말했다.
“결국 지금 네게 필요한 건 믿음이란 거잖아?”
“믿음이라고?”
“그래. 내가 교황을 이기고, 200년 전의 미친놈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믿음.”
말을 마친 난, 맞은편에 선 개리슨을 향해 검을 세웠고.
“그럼 뭐, 우리 가문 식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지.”
쿠르르르르……!
그 한마디가 끝나는 동시에, 그를 겨누는 노르드빈트를 중심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촤르르륵-!
- 방금 전 두 명보다 이 쪽이 훨씬 더 까다로워보이는데.
레이븐과 키예스를 주축으로 한 데스나이트 기사단이 그렇게 말하며 검을 세웠다.
- 대규모 마법은 한 번이 한계일세. 저 금침들 때문에 아주 죽을 맛이었어.
쿵-!
굉음과 함께 몸을 일으킨 타이탄이, 개리슨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 위협 감지. 계약자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지금의 내가 만들어낸, 언데드 군단의 최정예.
대행자 둘과의 싸움으로 힘이 소진된 그들이었지만, 개리슨을 마주한 그들의 예기는 조금도 빛을 바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말 안 해도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렇게 말하자, 개리슨은 눈을 크게 뜬 채 날 바라보았다.
설마 내 쪽에서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네놈이 지금……!”
“내가 말은 안 해도 말이야…. 하지도 않은 악행에 얽혀서 욕먹는 게,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거든.”
반쯤은 개리슨을 엮어내기 위한 도박.
그리고 반쯤은, 저 신부새끼한테 쫒길 때마다 쌓여왔던 억하심정이었다.
아니, 생각을 해 봐라.
아키몬드 교단도 내 탓이다.
크리펠도 내 탓이다.
제국도 내 탓이다.
심지어는 날 못잡아먹어 안달이던 교단의 타락도 내 탓이리고?
대체 어디까지 가야 속이 후련한 건데?
“그러니, 지난날 겪어왔던 억울함까지 싸그리 묶어서…. 한 번에 증명해주마.”
그렇게 말한 난, 이를 드러내며 개리슨을 향해 말했다.
“이참에 결판을 내자고. 덤벼, 망할 신부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