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178화 (178/209)

178.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브리간테 성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일은 빈민을 구제하고, 고아들을 보살피는 것이었다.”

자신의 손에 들린 성법기, 경전 타나크.

뚫을 수 없는 방어막을 제공하는 그 성물을 펼치자, 여느 교단의 경전과 같은 문구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난민촌, 빈민가, 하수구…. 브리간테 성하께서는 그 어떤 곳도 마다하지 않고 직접 들어가, 그들을 전부 구원하시던 분이었다.”

“그렇겠지.”

경전의 한 구절을 읽으며 그렇게 말하는 개리슨이었지만, 녀석과는 달리 내 목소리는 심드렁하기 짝이 없었다.

“내일 하루를 버티기도 힘든 애들만 골라서, 빵 한 조각과 방 한 칸.”

“…….”

“최저 가격으로 최대의 충성을 얻는 방법이잖아. 안그래?”

나란히 누워있는 두 대행자의 시신을 보며 나무라듯 말했다.

한 줌의 빵.

몸을 누일 한 칸의 공간.

대륙 도처에 널려있는 수많은 난민들은 그 조그만 호의를 은총이라 받들며, 금실로 수놓은 그들의 상징을 숭상한다.

그들이 누구 때문에 난민이 되었는지.

그들을 빈곤하게 만든 원흉이 누구인지는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리고, 단지 그날 빵을 던져주는 자의 발 앞에 엎드릴 뿐이다.

고통의 근원을 찾기 이전에, 그들은 살아야 하니까.

전쟁과 착취에 맞서 싸우기 이전에, 굶주림과 가난에 맞서 싸워야 하니까.

그렇게 몸을 숙인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그들은 마치 신이라도 된 듯 지껄이는 것이다.

우리들의 말을 들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우리의 말을 전하면, 낙원에 갈 수 있다고.

“신성력을 사용하는 교단의 경우엔 그 효과가 훨씬 컸을 테고 말이야.”

재능과 자질로 결정되는 마력이나 망자와 소통할수록 쌓이는 마기와는 달리, 신성력의 근원은 사용자의 감정.

그리고 그들이 주입하는 믿음과 확신, 그리고 신앙심은 신관을 양성하는 데에는 적격이었다.

“브리간테, 이 미친 새끼가….”

죽은 케이런의 시신을 바라보던 미리암이 혀를 찼다.

“그 어린 핏덩이들을 손수 키우던 것이, 이따위로 쓰다 버리기 위함이었던 거냐…?”

뿌득-!

케이런과 레오노르는 개리슨과 동년배.

교황과 면식이 있는 미리암은 저 두 사람의 성장을 지켜봤던 것 같았다.

“네 말이라면 뭐든 하겠다던 그 순진한 것들을, 이따위 더러운 수에……!”

“…….”

그렇게 말하며 이를 악문 미리암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보이던 것과는 다른, 진짜 분노한 모습.

그런 미리암을 바라보던 프리실라는 그녀에게서 눈을 뗀 뒤, 내게 물었다.

“……뭐가 보이나요?”

“예. 보입니다.”

죽은 케이런의 시체에 푸른 빛으로 빛나는 네크로맨서의 술식이 새겨졌다.

죽은 뇌에 남아있는 기억의 파편과 감정의 편린.

상흔이나 흉터가 보여주는 망자의 삶까지.

진즉에 환원시킨 혼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아직 형태가 온전한 케이런의 뇌는 내 생각보다도 많은 정보를 들고 있었다.

“대행자들이 출발하는 같은 날, 교국에서 병력이 출병했군요.”

그리고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상황은 급격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교국이 직접?”

그것을 들은 프리실라가 되묻자, 난 곧바로 준비해 둔 부연설명을 붙였다.

“수는 어림잡아 약 2만. 이단심문관, 심판관, 성기사단까지 합류한 것도 모자라서, 교황 본인도 직접 행차했습니다.”

“흡……!”

내 설명에 그녀 주변에 있던 행정관들이 마른 숨을 삼켰다.

북부의 주공 대부분이 부켄하임에 남아있는 와중에, 동쪽에 위치한 교국에서 2만 명 규모의 침공이라니.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형국이었다.

“제국과 합을 맞춘 겁니다. 부켄하임 성에 병력이 집중된 사이, 후방을 치려고…!”

“아뇨, 그건 아니에요.”

행정관 중 한 명이 그렇게 외쳤지만, 그 말을 들은 프리실라는 고개를 저었다.

“제국이 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다른 귀족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입니다. 라인란트는 그 본보기이죠.”

복종하라.

이들처럼 파멸하고 싶지 않다면.

제국은 라인란트를 짓밟으며, 다른 귀족들에게 그렇게 말하고자 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한 프리실라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을 열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제국의 압도적인 승리. 교단의 협조로 얻어낸 ‘비겁한 승리’가 아니에요.”

그녀가 입에 담은 것은 제국이라는 거대한 힘이 내포한 약점이었다.

본디 전쟁을 치름에 있어, 비겁이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 법.

그렇지만 제국이 두른 권위는 역설적으로, 그 궤변을 성립할 수 있게 만들고 있었다.

효율적인 전술은 비겁자의 술수로.

한 번의 후퇴는 아성의 몰락으로.

그렇게 논란을 재생산하고 왜곡하며, 끊임없이 제국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단이 움직인 이유는,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그렇죠. 제국이 북부를 굴복시켜 성장한다면, 그만큼 교국의 위치가 위태로워질 테니까요.”

내 물음에 그렇게 답한 프리실라였지만, 그녀의 표정은 편치 않았다.

“거기까지는 유추해냈지만…. 아직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느낌이에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못내 미심쩍은 듯한 마디를 입에 담았다.

“단지 그런 이유뿐이라면…. 교황은 왜 ‘직접’ 북부로 오는 걸까요?”

“…….”

프리실라의 그 말에,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두 명의 대행자가 나와 프리실라를 확보했다면, 북부의 주도권은 교국 측으로 넘어간다.’

이것만으로도 제국을 견제하기엔 충분할 터.

그렇지만, 교황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직접 북부로 오고 있다.

성물로 강화된 수만 명의 병사들과 정예 성직자, 그리고 기사들과 함께.

‘대행자 두 명이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마당에, 교황이 직접 온다는 결정을 내릴 리가 없어. 다른 목적이 있는 거다.’

단순한 외교가 아닌, 더욱 본질적인 이유.

교황의 목적.

그리고 교단이 북부를 노리는 이유.

그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면, 교황이 이곳으로 오고자 하는 의도는…….

“……이런 미친.”

그렇게 생각하던 끝에, 난 깨달았다.

교황이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

아니, 무엇이 되려고 하는지를.

‘교국이…. 얼음성의 사용법을 알고 있다고?’

저들의 목적지는 나와 같은 지점.

아키몬드의 옛 요새, 얼음성이다.

***

“아일라시스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교황의 목적을 생각하던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을 때.

행정관 중 한 명이 다가와 프리실라에게 소식을 전했다.

“2만 명 규모의 교국 병력이 라인란트 측으로 이동하는 것을 확인했고, 그들은 ‘성전’을 위해 라인란트로 향했다 합니다.”

“하, 성전이란 말이지요.”

그 말에 가당치도 않다는 듯 혀를 찬 프리실라는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교황의 목적이 뭐든 간에, 당장 들이닥친 문제부터 해결해야겠군요.”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라인란트 입장에서는 진퇴양난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물자를 갖추고 장기전에 대비한다 한들, 동시에 두 개의 전선을 감당할 수는 없었으니까.

“아일라시스에서 포착되었다면 이곳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일주일…. 그 안에 수비군을 확충해야 한다니.”

공격군 2만을 수비하기 위해선 아무리 적어도 5천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다.

이미 제국과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라인란트로써는, 불가능한 주문.

“우선, 어떻게든 부켄하임에서 병사들을…….”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렇지만 교황의 목적을 깨달은 난, 골머리를 앓던 프리실라를 향해 말했다.

“저들의 관심사는, 저희들이 아니니까요.”

그 말에 프리실라와 다른 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뭔가 떠오른 것이 있는 건가요?”

“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요.”

그렇게 말한 난 잠시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다.

“제가 무엇인지, 누구의 환생인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이미 짐작하셨을 테죠.”

프리실라는 날 아키몬드라 불러대는 대행자들의 언행에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떠올리며 묻자, 그녀는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클라인을 품었을 때, 클레어가 놀러와선 하도 떠들어댔으니까요.”

“……예?”

잠깐만, 뭐?

난 이제야 깨달은 줄 알고 물어봤던 건데,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고?

“물론 처음엔 늘 하던 헛소리라 생각했었지만, 수도에서 소식을 전해 듣다 보니 확신이 들었죠.”

그렇게 말한 프리실라는 옛일을 생각하듯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세 살짜리 애가 ‘전 아키몬드가 아니에요!’라며 또박또박 항변하질 않나.”

아, 그때 내가 그랬던가?

“그 크리펠을 뒤집어놓고 돌아온 것도 모자라서, 교화소에서 데려왔다는 아이는 밤중에 목장에서 말을 산 채로 잡아 먹어대고.”

움찔!

내 발밑의 그림자가 흠칫 떨리자, 난 도끼눈을 뜬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사령술을 쓰길래 어디서 배웠냐고 물었더니, 있지도 않은 클레어의 방에서 익혔다고도 했죠.”

“…….”

그간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보니, 정말로 그랬다.

나름 숨겨 보겠다고 한 일들인데.

이러면 되려 안 들키는 게 이상할 정도잖아?

“거기에 영묘에서 아버님까지 끄집어냈다고 하니, 교단에서 찾아올 땐 올 게 왔구나 싶었죠.”

“우와아…….”

프리실라의 말을 듣고 있던 스텔라가 질렸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다른 건 그렇다 치는데,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언데드로 되살린 건 좀 그렇지 않아요?”

“아니, 그건 그럴 만한 사정이…….”

“돌아가신 조부님을 되살린 사정이 도대체 뭐였는데요?”

와, 미치겠다.

이렇게 물어보니까 진짜 할 말이 없네?

-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진짜 잘못한 일이라 그런 거 아닌가?

- 아무리 네크로맨서라도 자기 가족을 건드리는 건 좀…….

- 단장님 조카라길래 좀 싹싹한 줄 알았더니, 완전 후레자식이었구만?

옆에서 거드는 송장들의 말을 들으니 안 그래도 복잡한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루델 본인은 좋아했다니까?

오랜만에 아들들도 만나고, 하고 싶은 말도 하고!

물론, 중간에 이안한테 죽을 뻔하긴 했지만…….

“뭐, 이 얘기는 나중에 차차하기로 하고.”

그렇게 나와 언데드들이 투닥거리던 사이.

분위기를 다잡은 프리실라는 긴장이 조금 풀린 듯, 날 향해 물었다.

“그들의 관심사가 라인란트가 아니라고 했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곧바로 나왔다.

“그들이 북부를 점령할 계획이었다면, 아일라시스에게 발각되는 우를 범하진 않습니다.”

시엘이 지배하는 아일라시스는 교국의 잠재적인 적.

그곳을 경유해서 침공한다면, 아일라시스는 곧바로 교국의 보급로를 차단할 것이다.

“확실히, 침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급한 경로군요. 보급선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 듯한….”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필요가 없는 거죠.”

지도를 보며 고민하는 프리실라를 향해, 무거운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들의 목적을 케르시아스의 강림. 2만 명의 병사는 그 강림의식을 위한…. 제물일 테니까요.”

제물.

그렇게 말하는 내 한마디에, 개리슨의 시선이 날 향했다.

“케르시아스 님은 교국의 신이다. 그런 분의 강림 의식을, 왜 북부에서 진행한다는 거지?”

“그야 당연히, 이제 대륙에는 신을 강림시킬 만한 장소가 없으니까.”

잠시 숨을 고른 뒤,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북부 대장벽 너머에 있는, ‘얼음성’을 제외하고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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