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단지 아이들일 뿐이었는데
오랜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남부 분쟁지역의 낡은 판잣집.
오물로 얼룩진 세 평짜리 공간에서 뒤엉켜 살아가는 스무 명의 어린아이.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쥐새끼와 그 쥐새끼로 허기를 달래보고자 바닥을 뒹구는 형제.
누가 쥐인지, 누가 사람인지 구별조차 가지 않는 아비규환 속에서, 내게 손을 내밀어준 빛의 존재까지.
‘스무 명의 아이들 중에서, 너희 둘만이 선택되었다. 왜 그런지 알겠느냐?’
처음 밟아보는 카페트와 처음 먹는 흰 빵. 따뜻한 수프.
혹여 뺏길까 두려워 어떻게든 입 안에 그것을 넣는 사이, 인자한 빛은 내게 그렇게 물었었지.
‘왜인가요, 브리간테 추기경님?’
글자에 밝던 케이런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고, 빛은 인자한 얼굴을 한 채 답했다.
‘그것은 너희가, 가장 강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너희들의 자질은 훗날,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되겠지.’
‘어떠냐? 내 도구가 되어준다면, 내 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마.’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따뜻한 집, 금화, 음식, 거기에 성직자라는 지위까지.
‘고맙다. 그렇다면 이제 너희는 이것을 명심하거라.’
케이런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빛은 전에 없이 밝은 얼굴로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는 도구이니, 지금부터 고민하지 말 거라.’
‘너희는 무기이니, 지금부터 판단하지 말 거라.’
‘너희는 칼날이니, 지금부터 생각하지 말 거라.’
모든 것을 받는 대가로썬 너무나도 값싼 대가.
자신과 친우를 구원한, 찬란한 빛의 한 마디.
기억 속에 묻혀있던 그 말을 떠올리자, 복잡한 머릿속이 단번에 맑아졌다.
도구는 고민하지 않는다.
무기는 판단하지 않는다.
칼날은, 생각하지 않는다.
***
“아키몬드의 야망에서 대륙을 구원한 것은, 제국의 기사 베르켈과 그의 손에 들린 성검이었으니.”
그렇게 중얼거린 프리실라의 말에, 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요하지 않는데.’
내 전생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지금의 내가 누구인지.
하나같이 처음 듣는 사실에, 받아들이기조차 어려운 이야기일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말하는 그녀에게선 놀라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클레어 공후. 아니, 어머니한테 미리 언질이라도 받은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시조이신 베르켈 전하의 사후, 대륙의 구원자라는 칭호는 멜디르 제국과 케르시아스 신성교단에게 돌아갔어요.”
“…….”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 칭호는, 제국의 확장정책을 정당화하는 논리로써 소모되고 있죠.”
그렇게 말하던 프리실라의 무표정에 미미한 균열이 일었다.
“라인란트는 영웅의 가문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기사들을 전장에 동원해야 했고요.”
날 죽여 세상을 구한 영웅, 베르켈 라인란트.
말년의 그는 전장에서, 기사들을 퇴각시키던 도중 전사했다고 한다.
베르켈 뿐만이 아니었다.
서대륙 연합군의 대원정, 사하르 칸의 난, 루스펠 교단의 성전….
제국을 위협하는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역대 라인란트 공작은 제국의 선봉에 서도록 강요받았고.
수많은 전투 속에서 그들은 점점 마모되고, 또 죽어갔다.
‘생전의 루델이 그랬고, 젊은 날의 하인켈이 그랬었지.’
눈부신 영웅담과 그 이면에 암약하면서 이득을 취하고자 획책하는 이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술수에 놀아나, 자신의 위업을 보상받지 못한 채 몰락하는 영웅.
“적어도 지금에 와선, 이것 하나만큼은 명확해졌군요.”
허탈한 듯 그렇게 내뱉은 프리실라가 말했다.
“지금의 멜디르 제국과 케르시아스 신성교단은, 대륙을 대표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
프리실라 엘크라이어.
본래 제국의 귀족이었을 그녀였지만, 지금 그녀의 표정에선 그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그곳에서 보이는 것은, 그녀가 몸담아온 제국이라는 체제에 대한 끝없는 환멸과 권태뿐.
“아키몬드를 죽인 공으로 대륙의 수호자라는 영예를 얻어놓고, 뒤에서는 그 아키몬드의 힘을 추종하고 있다라.”
재밌다는 듯 큭큭 웃어 보인 프리실라였지만, 입을 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스산한 한기가 맴돌고 있었다.
북부의 기사는 제국의 도구로써 소모되고, 제국은 라인란트의 피를 먹고 덩치를 키운다.
제국이 부강해질수록 라인란트는 쇠락하는 일방적인 착취.
그런 불합리와 고통 속에서, 이들은 200년의 시간을 견뎌온 것이었다.
“이런 자들이 대륙의 질서를 바로잡고, 신의 은총을 가져다준다고 하면…. 대륙의 어느 멍청이가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한 프리실라는 대행자인 레오노르를 향해, 못 박듯 입을 열었다.
“라인란트의 이름으로, 성혈과 관련된 모든 사실을 대륙에 알리겠습니다. 물론, 제국과 교국이 지금까지 해온 수많은 악행들까지요.”
“…….”
“제국의 압제에 짓눌려있던 모든 이들이 일어나겠죠. 그렇게 된다면 당신들은…….”
그렇게 프리실라의 말이 계속되려던 그때.
“웃기는군.”
잠자코 그것을 듣고 있던 레오노르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 쳤다.
“자격이 없어? 그래서, 그것이 뭐 어쨌다는 것이냐.”
“?!”
투콰앙-!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레오노르의 몸이 프리실라를 향해 쇄도했다.
“안돼!”
그의 움직임을 포착한 스텔라가 곧바로 몸을 날려 프리실라의 몸을 낚아채고, 그 사이를 가로막은 타이탄이 그의 몸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쿠콰아아앙-!
“이 새끼가 그래도……!”
진실을 알려준다 한들, 싸움이 멈출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렇게나 망설임 없이 달려든다니.
신앙의 발로일지, 오갈 데 없는 충성의 발악일지.
“끄으으으으-!”
생각없이 몸을 내민 레오노르는 타이탄의 주먹에 정통으로 맞았다.
아마 저 정도라면 온몸의 뼈가 으스러졌을 터.
“……잠깐만.”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타이탄의 주먹에 맞고 날아가는 놈의 표정을 본 난, 곧바로 놈이 날아가는 경로를 확인했다.
“이 새끼가 설마?!”
내가 그렇게 외치는 순간.
레오노르는 처음부터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듯, 더 앞으로 몸을 뻗어 무엇인가를 낚아챘다.
“교단의 의도가 추악하다? 진짜 악은 네가 아니라 제국과 교단이었다? 웃기는군.”
시선을 돌려 곧바로 상황을 확인했다.
개리슨은 그의 돌진을 피해 옆으로 이동한 상태.
그리고 레오노르는 죽은 케이런의 시체를 낚아챈 뒤, 그것을 한 손에 든 채 내와 개리슨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성법기를 회수하려 한 건가? 그렇지만…….”
케이런이 들고 있던 무기, 타나크를 떠올린 내가 그렇게 말하자, 개리슨은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그곳에 들려있는 낡은 양장 재질의 책 한 권.
그 사이에 케이런의 품에서 성법기를 빼낸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 시체에 남아있는 건 하나뿐이군.”
그것을 확인한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대신, 곧바로 언데드들을 재배치했다.
그러는 사이, 레오노르는 낚아챈 케이런의 시체에 손을 뻗었고.
“그깟 쓸데없는 사실을 말한다 해서, 이 내가 꿈쩍이기라도 할 줄 알았나?”
콰득-!
그 말과 거의 동시에, 무엇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레오노르가 서 있던 방향에서 난 소리.
그곳을 돌아본 프리실라의 얼굴이 단박에 창백해졌다.
“동료의, 시체를……?”
부러진 것은 케이런의 가슴.
산산이 으스러진 그의 몸에서 뽑혀 나온 것은, 그 몸에 박혀있던 또 하나의 말뚝이었다.
“말했을 텐데? 교단에게 있어서, 너와 네 동료는 실험체에 불과했다고.”
그에게 그렇게 말해봤지만, 레오노르는 손에 들린 말뚝을 빤히 바라볼 뿐.
내 말을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너와 네 동료를 소모품 취급한 것이 교황이야. 그런 놈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어디에 있지?”
마지막 권유이자, 인간으로서 죽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것을 알고 있음이 분명함에도, 레오노르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험체라 한들 상관없다. 쓰다 버릴 소모품이라 한다면, 오히려 바라던 바지.”
“……!”
그렇게 말한 레오노르는 케이런의 시신을 헌신짝처럼 버린 뒤, 말뚝을 하늘 위로 치켜들었다.
“쯧.”
그 광경을 본 내가 혀를 차며 언데드들의 마기를 보강하던 사이.
“나와 이 녀석은, 성하의 도구가 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으니까.”
대행자 레오노르는, 아무 망설임 없이 치켜든 말뚝을 자신의 가슴팍에 내리꽂았다.
푸욱-!
또 하나의 말뚝이 레오노르의 심장에 박히고, 눈부신 섬광이 좌중을 밝게 비췄다.
파아아아앗-!
눈이 멀 정도의 눈부신 빛무리.
이윽고 그것이 전부 사라지자, 레오노르는 천천히 자신의 몸을 일으켰다.
“아까보다 두 배는 성가신 게 온다. 준비 단단히 해.”
- 그러지.
- 산 넘어 산이구만.
- 동감.
내가 언데드들에게 그렇게 명령하고, 그들이 전열을 가다듬는 사이.
까득, 까드득.
곳곳에 널브러진 금침들이 그의 발끝에 모여, 마치 갑옷처럼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아아….”
그 말과 함께 발끝에서, 머리까지.
검은 거체를 전부 감싼 금침은 마치 근육처럼 그에게 얽혀, 그 거체를 황금빛으로 빛나는 성상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
“함께 해주는가, 케이런.”
무언가에 홀린 듯 그렇게 중얼댄 레오노르가 내 앞에 섰다.
“설령 교단의 신성이 악의로 가득 찬 것일지라도. 성하께서 천인공노할 야망을 지닌 사악이라 할지라도.”
현세에 강림한 신의 화신과 같은 형상을 한 채, 대행자 레오노르가 날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린 신성의 첨단이자 그분의 검으로써, 최후의 최후까지 이단을 처단하리라.”
***
레오노르가 몸을 숙인 순간, 클라인의 검은 이미 정면을 베어나가고 있었다.
카카앙-!
반응할 수 없는 속도임이 분명할 텐데도, 보란 듯 그의 돌진을 잡아내는 클라인의 검.
그렇지만 레오노르는 두 개의 성물을 박아넣은 상태.
“마력 한 줌 없는 몸으로!”
한껏 끌어올린 신성력은 이미 클라인의 몸을 녹여버리기 직전이었다.
그렇지만 그 열기가 소년의 몸에 그을음을 남기는 순간.
파츳-!
서로 교차된 두 자루의 창이 곧바로 그의 몸을 얽어,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마력 동조 후 양동. 맞출 생각 말고 공격 경로에 놈을 가둬버려.”
- 움직임을 봉하라는 말이군.
- 확인했네!
촤촤촥-!
뒤이어 곧바로 두 방향에서 이뤄지는 나선창격.
정확히 맞물려 회전하는 두 개의 창이 레오노르를 향해 찔러 들어왔다.
“능숙하지만, 약해.”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몸 안에 쌓여있던 신성력을 한껏 토해냈다.
투웅--!
신성력의 반동을 이기지 못한 채 언데드들이 뒤로 밀려났다.
천하의 데스나이트라 한들, 한낮 언데드.
고고한 케르시아스의 위광에 버틸 수 있을 턱이 없다.
그렇게 생각한 레오노르가 다음 공격을 준비하려던 찰나.
투화악-!
신성력의 파도를 뚫고, 그를 짓쳐 드는 한 존재가 있었다.
- 보호체계 가동.
“?!”
쿠콰아아아앙-!
섀도우 골렘, 타이탄.
노도처럼 몰아치는 신성력의 틈바구니를 뚫고 들어온 강철 거인은, 그대로 레오노르의 몸을 손으로 짓눌러버렸다.
이전의 그였다면,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압사할 터였다.
끼기기기기긱……!
- ?!
금속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레오노르를 짓누른 타이탄의 팔이 점점 위로 솟아올랐다.
거인의 팔을 한 손으로 짚은 채 서 있는 남자.
금빛 철갑 사이로 새하얀 안광을 내뿜는 그 모습은, 더 이상 사람의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저건…….”
익숙한 불안감이 클라인을 엄습했다.
200년 전, 자신의 언데드 병진을 뚫고 들어온 기사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저 성직자에게서 보이는 기백은 당시의 그들에 견줄 만한 수준이었다.
쿵-!
굉음과 함께 타이탄이 균형을 잃었다 생각한 순간, 레오노르의 신형이 클라인에게로 쇄도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레오노르의 거구.
“성하의 적. 내 몸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이제 팔을 한 번 뻗기만 하면, 소년의 목숨은 완전히 끝장날 것이다.
“죽어라! 클라인 라인란트!”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이 레오노르의 몸을 휘감았다.
자신의 희생으로 인해 교단의 적이 사라지고, 마침내 그분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래, 그렇게 되면.
그렇게 한다면.
도구로써의 사명을 다해낸다면, 나는 비로소!
비로소 난……!
…
……
………
‘난, 뭐가 되는 거지?’
촤륵-!
잠시동안의 공백.
하릴없는 잡생각으로 인한 잠깐의 틈이, 소년에게 기회를 주었다.
“아까까지 죽이겠다 말하던 것이 창피해지는군.”
완전히 열린 정면에, 자세는 무방비.
그 사이 레오노르는, 소년의 검이 바뀌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희들은 그저, 말 잘 듣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는데 말이야.”
스스스스……!
새하얀 검신의 검이 아닌, 투명한 검신을 지닌 검.
검이라기보단, 검의 모습을 한 공예품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릇된 자의 꾐에 빠진 와중에, 매를 들어줄 어른조차 없었으니…. 이리 엇나간 것이겠지.”
다시, 소년의 얼굴을 보았다.
열다섯 어린 소년의 앳된 얼굴.
“허나 안타깝구나.”
그렇지만 지금 소년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원숙한 현자처럼 보였다.
스걱-!
“…생각없는 도구를 자처하며 자각 없이 피를 묻혔으나, 한 인간인 이상 그 업을 피할 수는 없을 터.”
투명한 검이 그의 몸을 베는 동시에, 그의 몸이 허물어졌다.
털썩!
몸을 가득 채우던 신성력.
터질 듯 넘치는 활력.
눈앞에 선 네크로맨서를 향한 살의.
그 모든 것이 마치 한밤중의 꿈이었던 듯, 흔적도 없이 흩어져버렸다.
“…….”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흩어져, 남은 것은 오직 한 사람의 혼과 그 혼을 안내하는 네크로맨서.
“적이기 이전에 망자를 인도하는 안내자로써, 내 기원하마.”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소년의 얼굴을 보았다.
분노도, 적의도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표정.
그것을 본 레오노르는 마치 처음으로 빛을 보았을 처럼,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음 생에서는 누군가의 도구가 아닌, 사람으로써의 삶을 살기를.”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의 자아로써 존재할 수 있는 이가 되기를.
그렇게 기원하는 사이, 하얗게 굳어버린 그의 몸이 완전히 무너졌다.
퍼석-!
교단에 남은 마지막 대행자, 레오노르.
그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