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나니까
“죽이네 뭐네 난리 치더니, 이런 신호는 또 귀신같이 반응한단 말이지.”
케이런을 제압한 개리슨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팔리만을 상대했을 땐 내가 파고 들어갔으니, 이번엔 저 녀석 차례.
그렇게 생각하며 신호를 보낸 것을, 저 신부놈은 곧바로 알아채 호응한 것이었다.
“오래 알고 지낸 세월이 어디 가진 않는가 보다. 그렇지?”
“닥쳐라, 네크로맨서.”
내 지시에 따른 것이 끝내 못마땅한 듯, 개리슨이 표정을 구긴 채 내 쪽을 흘겨봤다.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네놈부터 쳐죽인다.”
“아, 예. 어련하시겠어.”
농담 한 마디를 못하네.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개리슨의 말을 흘려들었다.
쿠콰아앙-!
그러는 사이, 레오노르를 틀어막던 언데드 진형에서 이변이 일었다.
케이런의 몸이 바닥에 처박히자, 한창 전투 중이던 레오노르가 곧바로 반응한 탓이었다.
“케이런…!”
그의 이름을 되뇌인 레오노르는 더 지체할 새도 없이 개리슨이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아니, 정확히는 날리려 했지.
카아앙-!
세 명의 기사가 창을 교차한 채 그의 앞을 가로막자, 동진하던 레오노르의 거구가 그곳에 부딪혀 쇳소리를 냈다.
“데스나이트……!”
- 아까부터 우릴 자꾸 잡졸 취급하는 거 같은데 말이야.
- 우리도 생전에 한가락 했단 말이지!
카카카칵-!
하늘날개 기사단의 허리를 담당하는 세 명의 창기사.
창 특유의 공격 거리와 일점공격을 이용한 연계에, 레오노르는 이를 악물며 손으로 그것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키리릭!
한 기사의 창이 그의 팔 관절을 얽어 아래로 내리꽂고.
투확-!
균형을 잃은 그의 목을, 두 개의 창날이 노리고 들어왔다.
“크으!”
한 명이 움직임을 교란하는 사이, 다른 두 명이 틈을 파고들어 살수를 날린다.
다대일 교전의 정석과도 같은 방법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대행자는 그런 수칙이 적용되지 않는 상대라는 것이 문제다.
카앙-!
- 이런 미친…!
- 도대체 신성력이 얼마나 되는 거야?!
마력을 담은 창날은 갑옷과 방어마법을 버터처럼 갈라버린다.
그런 압도적인 절삭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의 창날은 레오노르의 목덜미를 꿰뚫지 못했다.
성물로 강화된 신성력이 그들의 창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아무리 성물로 강화했다 한들, 결국은 성직자 한 명.’
그렇게 생각한 난 곧바로 지시했다.
“남은 기사들도 전부 무장 전환해! 여기서 말려 죽인다!”
내 지시를 확인한 앙헬이 곧바로 전격을 날려 움직임을 방해했다.
“비켜라.”
파창-!
그렇지만 양손을 휘둘러 앙헬의 번개를 흩어버린 레오노르는 지체없이 개리슨 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고.
- 불가.
그런 그를 막아서는 것은, 레어메탈 골렘 타이탄이었다.
쿠콰아아아앙-!
“끄으……!”
“네크로맨서의 천적은 신성력을 지닌 성직자라 했지? 맞는 말이야. 실제로 방금 전까지는 우리가 열세였으니.”
태양신, 케르시아스의 힘은 망자의 혼을 소멸시킨다.
혼을 다뤄 힘을 발휘하는 네크로맨서들에게 있어서, 언데드의 중심인 혼이 손상되는 것은 극독과도 같으니까.
“그렇지만 너흰 내가 언데드를 부르는 걸 막지 못했고, 그 시점에서 이 싸움은 진작에 끝난 거다.”
난 차가운 눈으로 필사적으로 언데드 병진을 뚫으려 하는 레오노르를 향해 말했다.
“신성력? 어디 마음껏 뿜어내 봐라. 몬스터 4만 마리 분량의 혼과 마기가 꿈쩍이라도 할지.”
물을 부어 불을 끌 수 있다 한들, 양동이 하나에 담긴 물로 산불을 끌 수 있는가?
“육체의 강함? 온몸이 레어메탈로 이뤄진 저 녀석한테, 그깟 인간의 주먹이 통할 것 같나?”
둑을 쌓아 물길을 막을 수 있다 해서, 손에 담긴 한 줌 흙으로 강의 범람을 막을 수 있는가?
“살려서 돌아가? 뇌를 꺼내서 지식을 취해? 이 나를 이용하겠다고?”
우습기 짝이 없는 그들의 오만을 비웃으며, 난 엄지손가락을 들어 내 목을 가리켰다.
200년 전, 숙적인 베르켈에게 그리했듯이.
“날 만난 시점에서, 여기를 날려버렸어야지. 이 오만한 새끼들아.”
“……!”
타이탄의 힘에 견디면서도, 레오노르는 내 말에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열다섯 소년의 형상에서 피어나오는 짙은 마기.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누군가의 형상.
성직자이니만큼, 그것이 무엇인지는 일목요연하게 보이겠지.
“아키몬드…! 크리펠에 갇혔을 때 네놈을 죽여버렸어야……!”
“레오노르.”
그렇게 대치가 계속되던 순간.
“한 눈 팔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개리슨!”
이전에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개리슨의 주먹이 그의 안면을 올려쳤다.
쿠콰앙-!
사람을 치는데 저 정도 소리가 났다면, 맞은 인간의 몸은 이미 가루가 되었어야 정상.
“크으으!”
그렇지만 신성력과 성물로 강화된 레오노르의 거구는 침음성을 흘릴 뿐, 치명상은 입지 않은 것 같았다.
“저러고도 힘이 남아돌다니, 도대체 뭔 짓을 해야 저런 게 나오는 거야?”
찢어진 입가에서 터진 피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세를 바로잡는 레오노르.
웬만한 거대 몬스터도 떡이 될 만큼 두들겼는데도 일어나는 걸 보니 기가 질린다.
‘하지만 뭐…. 그리 오래 가진 못하겠군.’
푸우 한숨을 내쉬며, 난 가는 눈으로 그를 흘겨봤다.
마치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물인 듯 맥박치며, 레오노르에게 힘을 보내주고 있는 금색 말뚝.
“어이, 덩치.”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그 모습을 보며, 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심장에 박힌 그 성물. 저게 뭐로 만들어졌는지는 알고서 쓰고 있는 거지?”
“……?”
내가 내뱉은 그 말에, 상처투성이인 레오노르의 시선이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인간의 혼을 정제하여 만들어내는 성혈.”
“…….”
“그리고 지금 네 심장에 꽂혀있는 저 물건이, 그 성혈을 결정화한 물건이라는 것 말이야.”
말하면서도 표정이 구겨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 끔찍한 물건을 성물이니 교황의 은총이니 지껄여대고 있다니.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구역질이 치미는 것을 참기가 참 힘들었다.
“세 치 혀로 날 우롱할 생각 마라, 네크로맨서. 이 성물은 너희 이단을 쳐 죽이기 위해 성하께서……!”
“그럼 묻겠는데, 너흰 왜 날 산 채로 잡아가려고 한 거냐?”
그의 말을 끊은 난 노르드빈크를 땅에 짚은 채 입을 열었다.
“너희들 입장에서 난 당장에 쳐 죽여도 시원찮을 이교도잖아. 그런데 교황은 왜 굳이 날 산채로 데려오라 지시했냐고.”
네 친구는 그것 때문에 목숨을 잃었는데 말이지.
조롱하는 뜻으로 그렇게 덧붙이자 레오노르의 기세가 한층 사나워졌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는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숨이 끊어졌는데도 계속해서 경련하는 케이런의 시신.
그리고 점점 자신의 몸을 잠식하듯 뻗어 나가는 실핏줄.
그는 단지 이것들을 번갈아 보며, 혼란스러운 듯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알 턱이 없겠지. 저놈 말마따나, 칼은 생각하지 않는 법이니까 말이야.”
주관도, 사상도, 정의도 남에게 맡겨버린 불운한 자들.
아니, 어쩌면 그것밖에는 선택지가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잡생각들과 함께, 난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녀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교단이 원하는 건 내 머릿속에 있는 지식이다.”
“지식? 웃기는 소리.”
이마를 툭툭 두드리며 말하자, 레오노르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체력을 보충할 기회가 생기니, 재정비한 후 틈을 노릴 심산인 듯했다.
“신성교단의 성직자가 네크로맨서인 네 지식이 필요할 리가…….”
“그래, 나도 이걸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그렇게 말한 난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내 보였다.
아직까지도 그 안에 들어있는 붉은 액체.
연구를 위해 보관 중인 성혈이었다.
“네놈들이 수백 년에 걸쳐 연구하고, 생산해낸 이 성혈.”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난 고개를 들어 저택의 천장을 보았다.
날 죽인 영웅의 문양.
내 광기를 멈춘 남자의 상징.
그것을 대면한 채, 난 고해하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원본이 되는 물건을 최초로 만들어낸 인간이 바로 나니까.”
“?!”
내 말을 들은 개리슨이 눈을 크게 뜬 채 내 쪽을 바라보았다.
“헛소리.”
레오노르 역시 처음 듣는 사실이라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내 말을 부정했다.
“만일 그런 사실이 있다면, 교국의 대서고에 기록이 남아있을 터다. 하지만 네놈이 일으킨 전쟁에선 성혈과 같은 물건은!”
“이 형태는 혼을 정제하기 위한 기초단계일 뿐. 최종 완성품이 어떤 형태로 빚어질지는 술자 나름이야.”
그렇게 말한 난 지금껏 봐 온 성혈의 온갖 형태를 떠올렸다.
“누군가에겐 힘과 젊음을 부여하는 영약이 될 수도, 누군가에게는 신의 권능을 구현하는 성물이 될 수도 있지.”
헬리안과 레오노르 자신을 가리킨 말.
그 말을 들은 레오노르가 이를 악물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요동치는 근원 모를 힘.
이교도의 말이라며 애써 부정하려 했지만, 그 역시 한 줌 의심을 억제할 수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무너진 옛 고향땅 위에 세운 거대한 성이 될 수도 있을 테고 말이야.”
성.
덤덤히 흘려낸 내 말에, 그것을 듣고 있던 프리실라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잠깐만요.”
아마 라인란트에 몸담은 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성이라면, 설마……?”
대륙의 최북단.
햇빛조차 닿지 않는 혹한 한가운데에 고고히 선, 옛 네크로맨서의 요새.
20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정복은커녕 탐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채, 지금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언데드를 토해내는 마굴.
아키몬드 전쟁의 상징.
“얼음성이…. 성혈로 만들어졌다는 건가요?”
맥이 풀린 듯 내뱉은 프리실라의 한 마디에, 개리슨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구태여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침묵은 그 자체로도 긍정의 의미를 지니는 법이니까.
“전쟁 이후, 제국과 교단은 얼음성이 뿜어내던 힘에 매료되었다.”
대륙을 뒤덮은 수백만 언데드 군세.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수백만 북부인들의 혼을 정제하여 형성한 얼음성의 힘이 있었기 때문.
그것을 알아낸 멜디르는 공포에 떠는 동시에, 욕망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200년 전 내가 만들었던 얼음성을 재현해서…. 그 힘을 취하고 싶었겠지.”
그렇기에 그들은 베르켈로 하여금 성검에 내 혼을 보관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성검을 회수한 뒤, 그곳에서 내 지식을 뽑아내려 했겠지.
아마 베르켈이 고분고분 교단의 명에 따르기만 했다면, 모든 것이 놈들의 계획대로였을 거다.
“하지만 베르켈 라인란트가 그 계획을 망쳐버렸고, 놈들은 처음부터 연구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200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그들은 집요하게 날 연구했을 것이다.
제국은 혼을 제어하는 사령술을.
교국은 혼을 정제하는 성혈을.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 그 모든 것이 결실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헬리안이 주입하던 성혈도.
엘프란과 케이런, 그리고 레오노르의 가슴에 박혀있는 저 성물도.
“네놈들이 성물이라 떠받들던 그 물건은, 내 연구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
“그리고 너와 네 동료는, 그 연구의 실험체로써 이용당한 것뿐이고.”
그 말에, 레오노르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자신의 심장에 막혀 있는 금빛 말뚝.
그곳에 조각된 천사의 날개와 케르시아스의 상징을, 그는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