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대행자들(1)
라인란트의 전선기지인 부켄하임 영지에 도착한 것이 이틀 전.
하인켈과 델라인이 이끄는 라인란트군은 이미 제국군의 1차 침공을 훌륭하게 막아낸 뒤였다.
제국의 첫 공격이 실패한 데 이어, 황도가 직접 침공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진바.
북부를 치기는커녕 선제공격을 정통으로 받은 탓인지, 제국군은 1차 침공 이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클라인! 너 진짜……!”
제국군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에 이어, 적의 심장부를 타격했다는 사실까지 들고 왔으니.
이안과 함께 황도에 도착한 날 보자, 전선기지는 말 그대로 열광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일은, 뒤이어 벌어진 사건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제국 2황자인 트레인이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내 도착과 거의 동시에 도달한 전령이 가져온 편지.
차분한 표정으로 그것을 읽고 있던 버크만이었지만, 그 내용은 결코 좌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황태자인 밀레드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면서,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선황제 시해 사건이 조작되었을 수도 있다며….”
“조작이 뭐 어쩌고 어째?”
난 진짜 그 새끼 목에 칼 박았다고!
이안이 그렇게 말하며 반발했지만, 하인켈이 신경 쓰는 것은 그쪽이 아니었다.
“제국 내부 분위기는 어떨 것 같은가?”
“아마 별다른 변화는 없을 겁니다.”
황태자와 2황자 간의 황위 경쟁은 밀레드가 황권을 쥐며 종결된 상황.
패배자의 말에 귀 기울일 제국 귀족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어지는 버크만의 말에 하인켈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황족 중 한 사람이 북부의 무죄를 주장한 셈이니, 저희 입장에선 정당성이 확보된 격입니다.”
목숨을 구해주고 황좌를 줄 테니, 우리를 도와 북부를 독립시켜라.
거래에 응한 2황자의 추진력은 놀랄 만큼 빨랐다.
“황제를 시해한 북부를 단죄하겠다…. 이것이 제국이 전쟁을 일으킨 명분이었지.”
그렇게 말한 하인켈이 주먹을 쥐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에게도 명분이 생겼고, 이 전쟁이 갖는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단순히 방어에만 급급하던 이전의 라인란트가 아니다.
혹독한 겨울을 인내하던 그간의 역사를, 뒤바꿀 때가 왔다.
“제국이 승리한다면, 우린 황제 시해범과 뜻을 함께한 반역자가 될 것이요.”
버크만이 꺼낸 그 말을 받으며 내가 입을 열었다.
“북부가 이긴다면, 우린 제국의 야욕에 저항한 선구자가 되는 겁니다.”
승자의 논리가 진실이 되는 것이 전쟁의 생리.
그것을 상기시키자, 회의실에 모인 기사들의 눈에 전의가 샘솟았다.
“힘든 싸움이 될 것이라는 것은 안다. 그렇지만.”
좌중에 모인 사람들을 돌아보며 하인켈이 입을 열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북부는 제국을 넘어 다시금 일어설 것이다.”
북부를 독립시킨다.
그 의지를 확인한 기사들은 하인켈을 향해 예를 취했다.
이 전쟁은 북부를 일으키기 위한 독립전쟁.
그렇게 생각하는 기사들의 의지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어……. 공자님?”
그렇게 결의를 다지는 이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던 사이.
내 옆에 다가온 스텔라가 내 옆구리에 무언가를 찔러넣었다.
“이게 뭡니까? 편지?”
그렇게 말하며 스텔라가 건넨 편지를 본 난, 곧바로 전선기지를 떠나 저택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개리슨 비어크만.]
편지지에 적힌 수신인의 이름.
그리고 그 편지가 발송된 곳은, 라인란트 저택이었기 때문이다.
***
“잠깐만 정지!”
라인란트 동부 검문소.
등짐을 맨 장정 두 명이 검문소에 들어서자, 병사들이 그들의 앞을 막았다.
“라인란트 영지민이오?”
“아뇨, 저흰 교국에서 왔습니다만….”
병사들을 지휘하는 기사 한 명이 나타나자, 앞에 선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교국에서 발행한 패를 보였다.
‘순례자의 명패라.’
교단이 인증한 통행증.
그렇지만 병사들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창을 얽었다.
“미안하지만, 지나갈 수 없소.”
“예, 예에?”
순례객의 통행을 막는 영지는 흔치 않다.
특히 라인란트 같은 공작령이라면 더더욱.
그 사실을 떠올린 듯, 남자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채 되물었다.
“지나갈 수 없다니요? 그게 무슨….”
“분명 말했소. 들어갈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하는 기사의 목소리에 기가 질린 듯, 남자가 뒤로 물러났다.
제국과의 전쟁 준비 때문에 대부분의 병력이 남부로 이동한 상황.
그 덕분에 이곳 동부 지역에 잔존해 있는 병력들은 한껏 긴장한 모습이었다.
“…….”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두 사람의 얼굴을 살핀 기사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순례를 한 번 떠나면 1년은 기본이니, 소식이 늦을 수도 있겠군.’
그렇게 생각한 기사는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라인란트는 현재 전쟁 중이오.”
“저, 전쟁?”
“그렇소. 제국군이 남부 국경에 모여들고 있고, 각 지역에서도 정보원들이 숨어들고 있지.”
역시.
이 자는 지금 대륙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듯하다.
“그런 상황이니, 전투가 벌어진다면 휘말릴 가능성이 있소. 외부인은 중부 평원 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할 거요.”
“아, 그런가요? 하하하, 이것 참….”
잔뜩 굳은 기사의 말에 넉살 좋게 웃은 남자가 말했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아무래도 변두리 출신인지라, 소식이 느려서….”
“……오래 여행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 우리 병사들도 예민했소. 내 대신 사과하지.”
순박한 목소리에 무심코 마음이 풀어진 것일까.
병사는 방금 전 고압적인 태도를 사과하듯 한층 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교단은 이 시기에도 순례객을 보내는 거요? 이미 전쟁에 관한 소문은 다 퍼졌을 텐데….”
“아하하….”
악의 없는 여행객이라면, 바깥소식을 들어서 나쁠 것은 없다.
보답으로 식량과 거처를 제공해준다면 원만하게 끝날 터.
“순례는 아니고, 성하께서 맡긴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말에, 기사는 잠시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성하께서, 직접…?”
“예.”
순식간에 뒤바뀐 공기.
사근사근 웃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기사는 천천히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명령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겠소?”
“예. 어려울 것 없지요.”
그렇게 말한 남자는 방금 전과 같은 넉살 좋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클라인 라인란트 공자를 척살하란 명령입니다.”
촤륵-!
생각할 시간도, 그럴 겨를도 없었다.
이 자는 적.
병사들이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취하고, 기사는 곧바로 검을 뽑아 남자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그 순간.
카아앙-!
마력을 한껏 담은 기사의 검은 뒤에 서 있던 또 다른 남자의 팔에 가로막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크으……?!”
팔로 검을 막다니.
그것도 마력이 담긴 기사의 검을?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넉살 좋은 웃음을 보이던 청년이 놀랍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역시 라인란트의 기사입니다. 훌륭한 속도였어요. 안 그렇습니까, 레오노르?”
“…….”
온 힘을 다한 기사의 검을 맨손으로 잡아낸 남자.
빠직-!
레오노르라 불린 그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자, 마력이 한가득 담긴 기사의 검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력이 담긴 검을, 맨손으로…!”
거기게 경악할 틈도 없이, 기사는 부서져 가는 검을 놓은 채 등 뒤에서 두 번째 검을 뽑았다.
“오!”
물 흐르듯 이뤄지는 무장 전환.
그렇지만 그것을 본 남자의 감탄사를 다 듣기도 전에, 기사는 자신의 목을 짓누르는 힘에 검을 쥔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컥…! 크억……!”
한 손으로 자신의 목을 잡은 채 들어 올린 거한.
순례자의 로브 사이로 빠져나온 두꺼운 팔뚝이 그 힘을 겨우 짐작게 할 뿐이었다.
“약하군.”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거대한 남자는 손에 힘을 더해 기사의 목을 완전히 부러트려 버렸다.
우드득-!
“기사님?!”
“가, 가문에 연락해라! 교국이 공자님의 목숨을 노린…. 커헉?!”
뒤늦게 반응한 병사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이건 뭐야……!”
어느새 자신들의 목에 박혀있는 금침.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자, 검문소에 배치된 모든 병사들의 목에 그것이 박혀있었다.
“아, 안돼……!”
전멸.
그 절망스러운 단어를 떠올리는 동시에, 병사들은 일제히 숨을 거뒀다.
털썩-!
“이야~ 도망치는 병사가 한 명도 없다니, 진짜 대단하지 않아요? 레오노르?”
그렇게 말한 남자가 로브를 벗자, 수려한 금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가 죽었으면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을 텐데, 병사들도 망설임 없이 뛰어들잖아요? 충성심이 대단한데….”
“흥.”
그렇게 말하자, 레오노르 역시 로브 자락을 걷어 얼굴을 내보였다.
검은 피부와 검은 머리를 한 근육질의 거한.
그는 자신의 팔에 남은 미세한 상흔을 보며 한 마디를 덧붙일 뿐이었다.
“이교도의 충심 따위, 내 알 바 아니지.”
“아이, 참. 명색이 대행자라는 사람이 그리 이해심이 없으면 어떡해요?”
그렇게 말한 남자가 손을 펼치자, 병사들에게 박혀있던 금침들이 그의 손으로 회수되기 시작했다.
촤르륵-!
한데 모인 금침들은 휘어지며 서로 얽혀, 마치 나무로 된 지팡이 같은 모양으로 변해있었다.
“그나저나 어쩐다. 이 넓은 북쪽 땅에서 어떻게 클라인 공자를 찾아야 할지….”
정보를 말해 줄 병사들도 전부 죽었으니 말이야.
그렇게 말한 남자가 난색을 표하자, 레오노르가 곧바로 말했다.
“저택.”
“저택? 라인란트 저택이요?”
남자가 되묻자, 레오노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인켈 공작과 델라인 공자는 전선에 있지. 저택에 남아있는 것은 한 사람뿐이다.”
“오오! 그러고 보니!”
프리실라.
북부의 보급망을 총괄하는 여인의 이름이 떠올랐고, 남자의 눈이 빛났다.
“공후를 인질로 잡는다라….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한데, 괜찮겠어요?”
“뭐가.”
그리 되묻자, 금발의 남자는 히죽거리며 레오노르에게 말했다.
“팔리만 그 새끼한테 들었잖아요? 저택에는 개리슨이 있을 거라고.”
자신들과 같은 또 한 명의 대행자를 입에 담자, 내내 변화가 없던 레오노르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고아원은 비어있었고, 미리암 수녀께서도 행방불명이었으니까. 아마 거기에 다 모여있을 것 같은데….”
“흥!”
그 말에 레오노르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콧김을 내뿜었다.
“교단을 등진 배신자다.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
“에이, 거 참. 제가 의지를 어본 게 아니잖아요, 이 친구야.”
교단의 적인데, 당연히 죽여야지!
그렇게 말한 남자는 은근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다시 맞붙는다면, 이길 수 있겠냐고 물어본겁니다.”
“…….”
“그렇잖아요? 레오노르 당신이 그때 크리펠에서 깨진 덕에, 팔리만 그 잡것에게 성법기를….”
쾅-!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레오노르의 주먹이 남자를 향했지만, 뜻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키릭, 키리릭…….
“당신은 항상 그 성질머리가 문제에요. 알죠? 레오노르.”
남자의 지팡이에서 뿜어진 금침이 서로 얽혀, 레오노르의 주먹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래.”
남자의 말에 짧게 답한 레오노르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주먹을 회수했다.
“그리고 네놈은 항상 그 주둥아리가 문제였고 말이지, 케이런.”
“아하하하! 그랬던가?”
그렇게 말하자 금발의 남자, 케이런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등을 돌렸다.
“좋습니다. 가 보죠! 클라인 공자를 잡아 족치러!”
“……쯧.”
그 말을 들은 레오노르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쓴 채 그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불신자와 이교도들의 땅.
이곳을 비추는 정오의 태양빛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