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164화 (164/209)

164. 부탁할 수 있겠냐?

쿠우우우우….

몸을 낮춘 타이탄의 몸에서 스멀스멀 연기가 피어올랐다.

검은 연기가 금속으로 이루어진 타이탄의 몸을 완전히 감싸고, 그 사이에서 푸른 안광이 새어 나왔다.

쿵-!

그렇게 완성된 거인의 모습은, 200년 전 이곳, 제국 황도를 송두리째 박살 낸 섀도우 골렘을 완벽히 재현하고 있었다.

“말도, 말도 안 돼……!”

눈을 크게 뜬 밀레드 황태자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황태자? 아니지.

저것은 밀레드 황태자가 아닌, 제국 초대 황제 멜디르.

제 자식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연명하는 추악한 괴물일 뿐이다.

“넌 분명 사라졌을 터였다! 200년 전에, 내 계획으로! 네놈의 혼은 분명히……!”

“확신이 없었으니 그동안 북부를 잡고 늘어진 거잖아. 안 그래?”

핵심을 찌르는 내 말에 황제가 이를 악물었다.

분노한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안색은 새파란 모습.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는, 겁쟁이 녀석의 상판이었다.

“폐하께서 무슨 일이시지?”

“모른다. 아니, 이토록 당황하시는 것은…….”

그를 보필하는 두 사람은 황제가 당황한 모습을 처음 보는 듯 했다.

‘처음 만났을 대와는 딴판이로군.’

폴와이번 내전이 끝나고, 그곳을 찾아온 황제.

페트리우스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그는 여유롭고, 또한 오만한 자세로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의 오만이 만들어낸 틈새를 파고들어, 난 이전의 힘을 되찾기 시작했고.

결국 난 200년 전처럼, 그의 앞에 다시 설 수 있었다.

이제 네놈을 내려다보는 것은 나.

공포에 떨며 날 올려다보는 것은 너다.

20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네가 말한 대로, 시간은 제때 맞췄다.”

차가운 눈으로 황제를 노려보는 내게 이안이 말했다.

“이 미친짓을 어떻게 수습할지는, 너한테 달렸어.”

“알고 있습니다.”

그의 손 부근에 미미하게 남아있는 마력광을 보앗다.

그가 작동시킨 것은 나 하나만이 아닌, 타이탄의 거체까지 한 번에 이동시키는 마법.

계획을 위해 아일라시스에서 준비한 공간이동 스크롤이었다.

임무를 마친 뒤 이안과 함께 황도를 탈출하고자 준비한 물건.

약혼녀 덕을 봤다는 생각에 소름이 절로 돋았다.

‘원래 같았으면 트레인 황자를 포섭한 직후 이걸 써서 외곽으로 이동해야 했다.’

제국 내부에 아군을 만들고, 이안을 구출한 뒤 탈출한다.

그를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고, 최선의 방법.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그 일련의 사건들을 일으킨 가장 큰 이유는, 이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기 위함이었다.

황제 시해라는 명분으로 시작되어, 제국의 군세는 이미 북부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에 동조하는 제국 귀족들 역시 시시각각 군대를 모으고 있는 상황,

제국의 승리를 의심하는 자는 대륙 어디에도 없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전쟁의 무게추는 이미 제국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버린 것이다.

‘이 국면을 뒤바꾸기 위해서는, 이 기울어진 판을 통째로 흔들어놔야 한다.’

황도에서 탈출한 트레인 황자는 성혈의 존재를 공표하여 제국의 도덕성에 흠집을 낼 것이다.

‘활실의 일원인 트레인 황자가 황실의 악행을 고발하고, 이를 증언한다면.’

제국은 이 전쟁을 황제를 시해한 반역자를 척결하는 성전이라 천명했다.

황제를 시해한 이안과, 그를 숨겨주는 라인란트를 척결하여, 제국의 본을 바로 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성혈의 존재가 증명된다면?

그 제작에 제국이, 황가가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이 전쟁의 성격은 송두리째 뒤바뀐다.’

성혈을 얻기 위해, 제국은 너무나도 많은 피를 봤다.

크리펠의 생존자들은 이미 라인란트에 도착해 증언을 끝마친 상황.

그곳에 갇혀 있던 무고한 자들의 신원 역시 대부분 파악해 둔 상태였다.

‘선황제의 복수를 위한 성전에서, 황가의 악행을 입막음하기 위해 일으킨 추악한 전쟁으로.’

트레인 황자의 행동에 맞춰, 그동안 모아둔 증거들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

황제가 이를 틀어막으려 한다면 그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는 꼴이요, 내버려 둔다면 의혹은 일파만파 커질 것이니.

전쟁이 지속될수록, 제국의 명분은 계속해서 흔들릴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그들의 확신을 깨부수는 것.’

낭패한 황제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제국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

북부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한들, 제국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암울한 전망.

그것을 깨부수고 가능성을 보인다면, 제국이 쥐고 있던 전쟁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다고.

‘그걸 위해선, 이런 미친 짓을 해 줄 필요가 있지.’

난 그것을 위해, 탈출하는 대신 정면돌파를 택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지? 멜디르 알펜.”

황제의 본명을 입에 담은 내 목소리에 맞춰, 타이탄이 돌진 자세를 취했다.

“전쟁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제 목이 달아날 걱정을 해야 한다는 거 말이야.”

“크으……!”

그걸 들은 황제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멍청하다? 글쎄, 그건 너희들이 생각을 잘못한 거지.”

빙글빙글 웃는 이안이 검 손잡이를 쥔 채 부연 설명했다.

“수십 겹의 방어선은 유명무실하고, 황도는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적의 공격을 허용했다.”

“……!”

마찬가지로 당장이라도 달려들 태세였던 진의 눈에 당혹이 일었다.

“제국의 심장부인 이 황성에 우리가 발을 들이고, 대륙의 지배자를 천명하는 제국의 지배자에게 검이 겨눠졌다.”

그렇게 말하는 이안의 웃음이 한층 더 짙어졌다.

“승패를 따지기 이전에, 이것만으로도 제국군의 무능을 입증하는 꼴이요, 제국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셈이니.”

이안의 말을 받은 내가 쐐기를 박듯 입을 열었다.

“우리가 여기 들어온 시점에서, 너희들은 이미 진 거야.”

***

“……아니, 아직 아니다.”

두 집단 사이의 정적이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내 말을 곱씹고 있던 황제는, 끓어오르는 속을 눌러 담은 채 한 손을 들었다.

촤르르륵-!

그러자 그들의 곁에 포진해있던 언데드들이 즉각 반응했다.

반원형으로 나와 타이탄을 포위한 채, 검을 세우는 수십 구의 데스나이트.

“무능하다? 실패했다? 패배했다? 웃기는 소리.”

금빛으로 빛나는 호화로운 옷가지가 탁한 바람에 흩날렸다.

황금과 권위를 두른 황제의 모습.

마치 그 위광을 잡고 늘어지듯, 황제의 손이 옷자락을 와락 움켜쥐었다.

“얕은꾀로 허를 찔렀다 해서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의 호통에 화답하듯, 앞을 막아선 기사가 검을 빼 들었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웅혼한 마력.

적어도 이안, 아니, 그 이상 가는 강자의 기운이었다.

“네놈들을 죽여 그 목을 내걸면, 너희들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갈 터!”

자신의 말에 확신을 얻은 듯, 황제는 앞에 선 두 사람에게 명령했다.

“놈들을 죽여라! 200년 전의 망령을, 오늘 끝장낼 것이다!”

투화악-!

그의 명령과 함께, 검은 기사의 마력이 정원을 장악해나갔다.

“크……!”

이안조차도 이를 악물 정도의 패기.

그렇지만 이안 역시 이에 지지 않고, 검을 뽑은 채 유유히 그에게 맞섰다.

“하, 하하!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 날이로군!

뒤이어 반응한 것은 검은 로브 차림의 노인.

“그토록 찾아 헤매던 새로운 사령술의 지평이, 스스로 내 앞에 걸어올 줄이야!”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떠는 것도 잠시.

그의 심장 부근에서 짙은, 그리고 음험한 마기가 한가득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인사부터 하겠소, 클라인 공자. 아니, 아키몬드!”

마치 날 만난 것이 영광이라는 듯, 환하게 웃은 노인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국군 수석 네크로맨서, 데이먼이올시다.”

“…….”

“사령술의 시조를 만나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오.”

예의를 갖췄으나, 예의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

네크로맨서들이 하나같이 정상인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이 녀석은 도를 넘은 듯했다.

게다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쌓은 마기가 아니로군.’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마기를 보며 생각했다.

노인이 다루는 마기.

저것은 망자와의 교감이나 영적 에너지를 통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필시 성혈, 혹은 그에 준하는 편법을 써서 얻어낸 힘이겠지.

‘대가로써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불 보듯 뻔할 테고 말이야.’

그에게 들러붙어 있는 원혼들의 면면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저 진득한 원한에도 태연자약할 수 있다니.

강함을 논하기에 앞서, 인간으로서의 무언가가 비틀린 자였다.

“액토플라즘으로 빚은 언데드도 그렇고, 그대는 항상 날 놀라게 하는구려!”

자신을 바라보는 내 생각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어느새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채 내게 말하고 있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육체, 거기에 이토록 웅혼한 힘! 사령술은 이 정도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단 말인가……!”

희열에 가득 찬 목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이 날 향했다.

“내 필히 그대의 뇌를 도려내, 그 고귀한 지식을 후세에 전할 것이오! 아키몬드-!”

광오한 외침과 함께, 그들을 호위하는 데스나이트들이 전투태세를 취했다.

“미친 새끼.”

구륵, 구르륵.

한 마디로 그를 평하는 동시에, 곳곳에서 기괴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이안과 스텔라가 그러했듯, 정원 곳곳은 지하수로와 연결된 구조.

형형색색의 꽃들 사이에서 시체를 기워 만든 언데드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꽃밭에서 언데드라니, 별의별 꼴을 다 보네요.”

이질적인 환경에 질색하던 스텔라가 단검을 빼 들었다.

수적 우위는 저들에게 있는 상황.

압도적인 수였지만, 내 시선은 그 언데들을 향해있지 않았다.

“잠깐만….”

내 시선이 닿은 곳은, 타이탄을 포위한 수십 구의 데스나이트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한 파장에, 순간 내 눈이 가늘어졌다.

“저 데스나이트들, 혹시…?”

시체를 이용하여 만든 데스나이트는 생전의 모습을 일부 간직하고 있다.

착용하던 갑옷, 생전의 마력로, 마력의 파장까지.

그렇기에 난 그들을 보며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옛 제국 기사 특유의 마력로와 파장.

그리고 녹슨 갑옷에 새겨진 날개 문양까지.

저들의 모습은 내가 구해낸 데스나이트, 키예스를 처음 만났을 때와 거의 동일한 형상이었다.

“클라인.”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대답이 들려왔다.

망할 조카놈이니, 버르장머리 없는 꼬맹이라느니.

그런 정겨운 호칭 대신, 이안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부탁……. 할 수 있겠냐.”

검 손잡이를 쥔 그의 주먹에 한층 힘이 들어갔다.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중한 한 마디.

그제서야 난, 키예스의 이름을 알려준 것이 이안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난리를 친 이유가 이거였던 건가.’

엘프란을 죽이고,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무렵.

서고를 뒤지던 그는, 어느 순간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고 했다.

그리고 그다음에 들려온 소식은, 그가 홀로 황궁에 쳐들어갔다는 것.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황궁에 쳐들어간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유감이오, 이안 라인란트. 폐하께서 하사하신 재료에 그런 사연이 있었는지는 내 몰랐네만.”

그런 내 생각을 알아챈 듯, 검은 로브가 내게 말을 걸었다.

조소가 가득한 어조로 말을 거는 것이, 지금 이 상황이 퍽 즐거운 듯했다.

“옛 부하들의 손에 조카가 죽는 광경도, 꽤 볼만하지 않겠……!”

“이 새끼가 가만히 들어주니까.”

그렇게 외치던 노인의 말을 끊고, 마기를 끌어 올렸다.

“데이먼이라고 했던가?”

황제의 얼굴에 먹칠하는 데에 앞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생긴 기분이었다.

“네놈만큼은, 이 자리에서 확실히 죽여주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