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멀리 가지 않았다.
“끄, 끄어어…….”
털썩.
기사 한 명의 몸이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피거품을 문 채 쓰러진 형상.
휘하 기사를 베어버린 진의 얼굴은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지, 진 단장님?!”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이 자는 근위기사단의……!”
화들짝 놀란 다른 기사들이 그를 만류하려는 찰나.
스스스스스……!
널브러진 기사의 시체에서 이변이 일어나자, 그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 이건…?”
“사람의 몸이, 녹아내린다고……?”
그들이 말한 대로, 기사의 몸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피나 내장 같은 인체가 아닌, 회백색의 물컹한 액체로.
그 기괴한 광경에 소름이 끼친 듯, 기사들의 표정은 창백했다.
“그대가 말한 대로군. 데이먼.”
눈을 흘긴 진이 그렇게 말하자, 기사들 사이에서 검은 로브 차림의 노인이 걸어 나왔다.
“그러게 내 말 하지 않았나. 네크로맨서 한두 명 정도는 감시로 붙여두라고.”
끌글 혈 차며 다가온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무너진 도플갱어의 몸체에 손을 가져갔다.
“호오……!”
하얗게 센 머리가 흘러내려 얼굴을 정확히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입은 검은 로브와 곳곳에 새겨진 금색 장식과 황제의 인장.
제국군 네크로맨서의 상징이었다.
“폴와이번 내전에서 출현한 것과 같은 언데드로군. 아니, 상태를 보아하니 한층 더 발전된 형태야…!”
노인은 그렇게 주절거리며 바닥에 흘러내리는 회백색의 액체를 시험관에 담았다.
“이전에 채취한 샘플도 아직 다 연구가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까지 진보했을 줄이야. 이러면 마치…!”
흥에 겨워 어쩔 수 없어 하는 모습은 노인이라기보다는 호기심에 찬 어린아이 같았다.
“이러면 마치, 아키몬드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꿈틀.
아키몬드. 그 이름을 듣자 진의 표정이 단박에 찌푸려졌다.
마치 기계처럼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 그에게, 이것은 굉장히 급격한 변화였다.
“연구 나부랭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네크로맨서.”
“어이쿠, 이 늙은이가 또 말실수를 했나 보군?”
은은한 노기가 서린 목소리에 데이먼은 한 발 빼기로 했다.
“이안을 잡은 것도, 그를 죽이자 한 것도 자네가 아닌가? 나한테 일을 떠넘기지 말게나.”
그러면서도 한마디를 지지 않는 모습에 쯧, 하고 혀를 찬 것도 잠시.
진은 감옥탑 꼭대기를 지키던 기사 들을 하나둘 베어가기 시작했다.
“아, 아닙니다. 진 단장님! 저, 전 언데드 따위가…!”
스걱-!
“젠장, 이대로 가만히 죽어줄 줄 알고…!”
스걱-!
힘들이지 않고 휘두른 검에 기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부스러졌다.
마력은커녕 힘조차 제대로 주지 않은 검격.
그렇지만 외견만 같을 뿐, 힘을 지니지 못한 도플갱어들은 무력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알아낸 건?”
“지금으로썬 단편적이네. 자신들이 언데드인 조차 모를 정도로 정밀하게 가공되었고, 재료로는 원본 기사들의 혼이 쓰였다는 것. 그리고….”
잠시 말을 흐리던 데이먼의 입가가 올라갔다.
“이걸 만든 술자는, 아직 이 황도에 있다는 것 정도려나?”
처음 도플갱어를 만났을 때와 같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
그렇지만 그 공허에 가득 찬 눈을 본 기사들은, 하나같이 섬뜩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쿵----
감옥탑 멀리서 충돌음이 들려온 것은 그쯤이었다.
“방금 소리는 뭐지? 습격인가?”
공성병기에 버금가는 충격.
그것을 느낀 진이 묻자, 기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하층 입구입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데…….”
멀리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자세히 보고자 눈을 부릅뜬 것도 잠시.
“저, 저게 대체 뭐야?!”
폭발을 일으킨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자, 기사는 당황한 듯 소리쳤다.
“화, 황도에…. 괴물이……!”
건물 사이에서 솟아오른 거인의 상체를 보며, 기사가 그렇게 중얼대는 순간.
- 크워어어어어------!
거인은 고개를 하늘로 치켜든 채, 황도 상층에 있는 황궁을 향해 포효하기 시작했다.
***
제국 투기장에선 때때로 격투술 경기가 펼쳐진다.
어떤 비겁한 수도 처벌하지 않는 그 무법천지의 싸움터.
그런 곳에도, 한 가지 규칙이 존재한다.
가벼운 이들은 가벼운 이들끼리.
무거운 이들은 무거운 이들끼리.
“어, 어어어……!”
“마, 막아라! 저 괴물을 당장…!”
투기장에서 그런 규칙을 두는 이유는 선수의 안전이나 공평성 따위가 아니다.
격투경기의 목적은 원초적인 쾌락을 자극하는 것.
군중을 폭력에 중독시켜, 열광하도록 하는 것.
그것을 위해 투기장의 선수들은 최대한 처절하게 싸워야 한다.
최대한 오래.
최대한 참혹하게.
서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여야 했다.
- 크워어어어어-!
그 치열함을 연출하기 위해 그들은 한 가지, 선수들의 체급 하나만큼은 엄격하게 따져서 분류한다.
기본적인 체급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면, 치열한 싸움이 불가능하니까.
말인즉, 보는 재미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갑자기 생뚱맞게 무슨 격투기 얘기냐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면 절로 그런 소리가 나오게 되어있다.
쿠콰아아아앙-!
“크아아악?!”
“젠장, 마력검이 안 먹혀! 마법사는 언제 오는 거야!”
쿠콰아아아앙-!
주먹 한 방에 기사 세 명이 하늘을 날았다.
제국 기사라는 화려한 이명을 무색게 할 정도로 나약한 모습이었다.
“마력을 둘러 몸을 보호한다 한들, 100kg을 채 넘지 못하는 인간의 신체.”
후두두둑-!
타이탄의 주먹에 정통으로 맞은 기사는 말 그대로 짜부라진 채 바닥에 떨어졌다.
신체보호와 재생, 활력 증진 마법이 부여된 갑옷은 종잇장처럼 찌그러져, 짓이겨진 그의 피부와 일체화되어있었다.
“마력을 담아 가공할 절삭력을 얻었다 한들, 1미터 안쪽의 짧디짧은 쇳덩이일 뿐.”
콰득-!
타이탄의 거대한 팔을 내려친 기사의 검이 속절없이 부러졌다.
제국 특유의 특수합금을 골자로, 대륙 각지에서 엄선한 재료로 만들어진 장검.
그렇지만 순도 100%의 레어메탈로 이뤄진 쇳덩이 앞에선, 계란으로 바위를 두드리는 꼴이었다.
- 크워어어어어---!
“진형 붕괴! 1진은 후퇴 후 재정비한다! 방어선 구축해! 어서어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수비대장이 뒤늦게 중장병과 방벽을 설치하기 시작했지만, 그걸 보는 내 입장에선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저따위 장난감으로 타이탄을 막겠다고?”
연합군이 구축한 3중 마력 요새를 힘으로 깨부순 것이 타이탄이다.
얼기설기 짜 맞춘 엉성한 방패벽 따위.
일부러 망치를 휘두를 필요조차 없다.
쿠콰아아앙-!
달리는 것만으로 방패벽이 으스러지고, 수십 명의 병사들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막으려야 막을 수가 없는 압도적인 물리력.
- 흐하하하! 저들이 말하는 게 빈말이 아니로군? 괴물이 따로 없어!
타이탄이 뚫어놓은 길을 달리며 한껏 신이 난 앙헬이 손을 뻗었다.
파지지지직-!
“이건 또 뭐야?!”
“언데드가 마법을……?!”
우르르 몰려드는 병사들에게 앙헬의 마법이 작렬했다.
20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온 언데드 리치의 마법.
순식간에 퍼져나간 번개 다발이 병사들을 삽시간에 구워버렸다.
“놈이 황성으로 돌진한다! 막아라!”
“클라인 라인란트!”
동시에 달려든 것은 발이 빠른 기사들.
네크로맨서를 운용하는 제국군답게, 그 약점 또한 제대로 숙지하고 있었다.
언데드가 강대하다면, 배후를 쳐 술자를 죽이면 되니까.
카앙-!
물론, 적어도 난 그런 양동작전으로 죽일 수 있는 네크로맨서가 아니지.
“데스나이트…!”
회심의 일격이 막히자 기사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 슬슬 내가 기사였는지 보모였는지 헷갈릴 지경이군. 하다못해 놀라는 시늉이라도 하면 어떤가?
“그럴 시간 없어.”
내가 대답하는 동시에, 그림자로 이뤄진 레이븐의 검이 곧바로 기사의 검에 얽혀들어갔다.
키리릭-!
“?!”
순식간에 뒤틀린 관절부.
실전에서 이런 수에 걸린 것은 처음인 것일까, 기사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속절없이 떨어져나갔다.
스걱-!
빈틈을 보인 순간 끝.
레이븐은 검을 올려 기사의 손목을 베어버렸다.
한 치의 낭비도 없는 정교한 검로였다.
“세 명이 더 오는데.”
- 걱정 말게. 저 친구, 요즘 제대로 물이 올랐거든.
그 말과 동시에 튀어나간 것은 키예스였다.
조각난 인격이 어느 정도 복구된 듯, 그의 무기는 일반적인 장검이 아닌, 커다란 클레이모어로 변경되어 있었다.
쿠콰앙-!
북부 기사 출신인 레이븐과는 달리, 키예스는 제국 기사.
자기가 사용하던 검술이 적에게서 펼쳐지는 상황에 기사들은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그렇지만.
- 한참 멀었다.
짧은 한마디와 함께 키예스의 클레이모어가 사선으로 내리쳐졌다.
북부의 정교한 검이 아닌, 중앙대륙 특유의 패도적인 검.
웅혼한 마력을 기사들의 방어를 분쇄하고, 세 명의 몸을 한번에 양단했다.
쿠콰아아앙-!
그렇게 후방을 정리하는 사이, 마지막 남은 한 겹의 방어선이 박살났다.
쿵. 쿵. 쿵.
지축을 뒤흔드는 발걸음소리와 함께 금속질의 거인이 댈변을 걷고, 갑작스러운 습격에 놀란 시민들은 황급히 피신하기 시작했다.
- 200년 전에 저 놈을 뚫겠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아군이 되니 이렇게 든든할 수도 없군.
항상 적으로만 만나던 거인과 함께 싸우자 감회가 새로운 듯, 레이븐이 말을 얹었다.
움직일 때마다 폭발이 일어나고, 활과 석궁 같은 자잘한 병기는 흠집조차 내지 못한다.
이미 하층을 지키는 병력은 초토화된 상태.
그것을 둘러본 난, 타이탄이 뚫어놓은 길을 달려, 상층 거주구에 몸을 들이밀었다.
촤르르르륵-!
그러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하층의 병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의 병력.
제국 근위기사단과 마법병단, 그리고 제국식으로 무장된 중형 언데드, ‘기간트’들이었다.
“그래,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반구형으로 날 둘러싼 군대를 보며, 난 허공에 손을 뻗었다.
쿠우우우우-!
내 등 뒤에 수십 개의 소환문이 생성되며, 한 무리의 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 없는 기수, 듀라한.
촤르르륵-!
마상창과 폴암을 세운 그들은 내가 선 대로를 가득 메워, 일사불란한 열을 맞춘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
“전 병력 방어태세! 놈들이 밀고 들어온다! 증원병력은?!”
“현재 3 주둔지에서 오고 있습니다! 출전 대기 중이던 병사들도 곧 이곳으로……!”
도시 한복판에 중무장한 기병대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놀랄 겨를도 없었다.
신속히 병진을 점검하고, 방어마법을 강화하는 한편, 후방에서 날 공격하기 위한 준비도 철저하다.
‘버틴다면 두 시간 정도인데…. 어떻게 되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난 내가 선 바닥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층의 경비병력을 뒤흔든 것은 전초전.
황도를 지키는 병사들의 시선을 내 쪽으로 모으리 위한 포석이다.
말인 즉, 진짜는 이 쪽이 아니란 뜻이지.
“여기까지 해줬는데 시간 못맞추면, 진짜 화낼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난 언데드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군, 돌격.”
히-히히힝-!
그림자로 이루어진 말이 앞발을 드는 것과 동시에, 타이탄을 선봉으로 한 기병대가 튕겨나가듯 돌진했다.
“온다!”
“전군 전투준비!”
황금으로 뒤덮힌 황제의 군대와, 그림자로 뒤덮힌 망자의 군대.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두 집단에서 상반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존재를 걸고, 황궁을 부숴버린다! 황제에게 죽음을!
“목숨을 걸고, 황궁을 지켜라! 황제 폐하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