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선택지
“……제가, 뭘 어쩐다구요?”
수십 년 전, 라인란트 저택.
뚱딴지같은 클레어의 한 마디에, 이안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아주버님은 제국을 확! 뒤집어버릴 관상이에요!”
하인켈이 들인 두 번째 부인, 클레어.
프리실라처럼 무뚝뚝하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지나칠 정도로 자유분방한 게 문제라고 했었다.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얼굴 보고 동생놈을 부러워하던 생각이 싹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기사단장 자리 먹었다면서 신나서 방방 뛰던 게 일주일 전이다.
그런 사람한테, 뭐? 제국을 뒤엎을 거라고?
초면에 만나자마자 뭐 하자는 거지?
싸우자는 건가?
“……유스티아 사람들은 관상도 볼 줄 압니까?”
“물론이죠!”
그래도 제수씨 될 사람한테 초면부터 욕을 박으면 안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하자, 클레어는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손가락으로 안경 흉내를 냈다.
“원래 숲속에 사는 마귀할멈은, 뭐든지 다~ 알고 있는 법이라구요!”
“마귀할멈이라니…….”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언행에 이안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5분만 걸어가면 교회가 있는데, 뭔 소리를 해대는 거야?.
“…행여나, 결혼식날 신부님 앞에선 그런 소리는 마십시오.”
“아하하하핫-!”
그는 ‘제수씨 될 사람이, 결혼식날 종교재판에 끌려가는 꼴은 보기 싫거든요.’ 그렇게 덧붙였다.
클레어는 거꾸로 매달린 채 박장대소했다.
…동생아.
이 결혼, 진짜 생각 잘 한 거지?
이상한 여자한테 꾀인 거 아니지? 그치?
이안이 내심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혹시라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이안은 자신의 가슴팍에 끼워진 제국 기사의 인장을 바라보았다.
제국 기사단장이 제국을 뒤집을 거라니?
뭐,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는 건가?
“제국 기사된 자로써 폐하께 충성해야 한다는 건가요?”
“전 그렇게 충심 깊은 녀석은 아니고요.”
클레어의 물음에 이안은 피식 웃었다.
충성심이라니.
뽑아준 페트리우스 폐하께는 죄송스럽지만, 자신에겐 그런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 그냥…. 그런 일을 벌일 깜냥이 안되거든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이안의 눈이 흐려졌다.
“전대 공작…. 아버지께서는 한평생을 가문을 위해 분투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왜 이 말을 하고있는 걸까.
자신의 입으로 말하면서도 알 수 없었다.
정말로 마녀의 꾐에 넘어간 듯한, 기묘한 안정감.
그런 기시감과는 별개로, 이안의 입은 계속해서 해묵은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 그분과 함께 숱한 전장을 거쳐왔죠.”
아키몬드의 요새는 200년이 지난 지금도 원혼을 끌어들여, 야생화된 언데드들을 뿜어대고 있다.
제국 최강의 기사가문이라는 명예는 그 자체만으로 족쇄가 되어, 숱한 전장으로 아버지와 기사들을 내몰았고.
그러는 와중에도 제국의 귀족들은 호시탐탐 북부를 노리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한들, 아무리 분투한들 벗어날 수 없는 수렁.”
“…….”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실실 웃어대면서, 그 수렁 속에서 아등바등하는 아버지를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클레어를 바라본 이안의 눈은 흐렸다.
“아, 이 망할 놈의 집구석. 진짜 지긋지긋하다.”
검의 극의를 볼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을 타고났다.
그럴 힘도, 마력도 충분하다.
그 모든 것을 타고난 이 남자는.
이안 라인란트는, 단 한 가지만은 가지지 못했다.
의지.
그는 결론지었다.
자신은 한낮 평범한 사내일 뿐이라고.
하인켈 같은 용기도, 헬리안과 같은 비틀린 야망조차도 가지지 않는, 흐리멍덩한 남자.
누군가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스스로가 자신을 그렇게 규정했다.
“그래서 아주버님께선….”
“하인켈에게 죄다 떠넘기고, 도망쳤습니다.”
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작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후계 싸움에 참가할 생각이 없다는 의지 표명으로써, 라인란트가 아닌 제국 기사단에 들어갔다.
라인란트 공작가 제 1공자가, 제국의 녹을 먹는 기사로 만족한 것이다.
“저한텐 너무 무거웠으니까요.”
가족을, 신하를, 가문을.
자신의 등을 바라보는 이들을 이끌고 책임질 의지가, 그에게는 없었으니까.
“꿔다놓은 자리도 버겁다면서 박차고 도망간 인간이, 제국을 뒤집을 거라뇨.”
피식 코웃음 친 이안이 그렇게 말했다.
공작위도, 북부의 맹주라는 칭호도.
그에게는 그저 무겁고 피곤한 짐덩이일 뿐.
자신은 그런 일을 할 만큼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사람을 단단히…….”
그렇게 마저 말하려던 순간.
“처음부터 굳건한 의지나 야망을 타고나는 사람은 없어요.”
그의 푸념을 끊고, 단호한 클레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지는 빚어내는 건 그 사람이 거쳐온 삶과, 그로 인한 선택.”
단언하는 클레어의 한 마디에, 이안의 얼굴에 걸려있던 웃음이 멈췄다.
“그리고 선택은, 언제나 그에 걸맞는 대가를 가져오기 마련이죠.”
“…대가?”
그렇게 말한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슴 속에 묻어둔 인생사를 말해줬더니, 돌아오는 게 같잖은 훈수라니.
“그 대가가 무엇이길래요?”
“그러게요. 아주버님의 경우는….”
미묘한 반감을 담은 채 이안이 되묻자, 클레어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
“진실.”
“……?”
엉뚱한 대답에 이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밑도 끝도 없이 진실이라니, 뭔 뜬구름 잡는 소리야?
그렇게 생각하던 때, 클레어는 이안의 얼굴을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진실이, 아주버님에게 또 다른 선택지를 줄 거에요.”
거꾸로 매달린 채 말하는 클레어 공후.
방금 전까지의 그녀는 마치 광대처럼 가벼운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그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선택, 지……?”
“전부 포기할지, 아니면 제국을 뿌리부터 부숴버릴지.”
지금까지 보이던 장난스러운 모습과는 다른, 딱딱하게 굳은 얼굴.
인형과도 같은 무기질적인 목소리에, 이안은 순간 섬찟한 공포를 느꼈다.
‘종잡을 수 없는 성질머리에 경박한 몸짓, 그리고 이따금씩 보이는 알 수 없는 언행까지.’
변경백의 지위를 가진 북부의 토호, 유스티아 가문.
그 가문의 역사는, 200년 전에 세워진 라인란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야기 속 검은 마녀와 아주 판박이야.’
예로부터 북부의 민담이나 동화에는 ‘검은 마녀’라는 존재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
잠드는 아이들에게 해주는 동화에서는, 밤중에 아이들을 잡아가는 악당으로.
변두리 마을의 민담에서는, 길 잃은 나그네에게 길을 일러주는 현인으로.
주점의 음유시인이 흥얼거리는 설화에서는, 오래된 옛 북쪽 왕의 반려로.
북부인이라면 나이를 막론하고, 신분을 망라하고 전해지는 친숙한 존재.
그것이 ‘검은 마녀’이다.
‘역사학자들 하는 소리가 아주 없는 말은 아니로군.’
그리고 북부의 역사서 속, 그 검은 마녀 전설의 원전이라 여겨지는 예언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 바랴기 유스티아.
클레어의 본가, 유스티아 가문의 시조였다,
“…….”
“…….”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던 것도 잠시.
“호잇!”
“?!”
근원 모를 이상한 기합과 함께, 클레어의 몸이 공중제비를 돌았다.
탁-!
귀족가의 드레스 차림이라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경쾌한 움직임.
이윽고 클레어는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자! 제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에, 예?”
어처구니가 없어 무심코 되물었다.
아니, 분위기는 있는 대로 잡아놓고선, 여기서 끊는다고?
“아니 잠깐만요, 이렇게 갑자기 끊는 게 어디있……!”
“이안 님.”
“어우, 씨?!”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튀어 올랐다.
돌아보자 그곳에는 이제 갓 자란 콧수염을 어루만지는 집사장, 버크만이 있었다.
“왜, 왜? 뭔데?”
“본가 기사들과의 대련 시간입니다. 연무장으로 모시지요.”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렇게 말한 이안이 하늘을 보았다.
이미 시간은 정오를 넘어선 상황.
마치 시간여행이라도 한 듯 기묘한 느낌이었다.
“대화 즐거웠어요. 아주버님!”
그러는 사이,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드는 클레어.
“아, 클레어 영애. 혹시 전하께서 어디 가셨는지 짚이는 곳이 있으십니까?”
“으음~ 잠깐만요.”
버크만의 말에 클레어는 양쪽 검지를 이마에 댄 채 뭔가를 고민하는 듯 끙끙댔다.
그러던 중.
“찾았다!”
그렇게 외친 클레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인켈은 지금 뒤쪽 텃밭에 짱박혀있어요!”
“크, 크흠!”
“거기서 또 찻잎 딴다고 풀숲에 처박혀 있을 거예요!”
“크, 클레어 영애. 감사합니다만 그, 표현에 자제를 좀…….”
천하의 버크만을 쩔쩔매게 하는 광경을 보며, 이안은 뭔가 더 물어보는 것을 포기했다.
“선택지라.”
그때는 알 수 없었다.
클레어가 한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녀가 말한 ‘진실’이, ‘선택지’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그러나 지금.
모든 조각을 찾아낸 지금에 와서야, 이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의 계획이 진행되는 것처럼, 우리의 계획 또한 진행되어 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마지막 한 조각이, 곧 맞춰진다는 것을.
***
의식을 잃은 지 얼마나 지난 걸까.
흐릿한 시야를 바로잡은 이안은 고개를 돌려 자신이 갇힌 공간을 둘러보았다.
“…….”
사방이 철판으로 보강된 감옥.
창문에서 스며드는 공기를 느껴보니, 지하가 아닌 지상이었다.
“큭큭, 큭….”
온몸이 쑤시는 것을 느끼며, 이안은 입가를 비틀어 웃음소리를 냈다.
통증이 느껴진다는 것은, 아직 몸의 감각이 살아있다는 것.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상황이 좋았다.
“팔다리는 잘라낼 거라고 생각했더니, 그러기엔 보는 눈이 많다 이건가?”
물론 상황이 ‘생각보다’좋을 뿐, 암울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마력 운용을 막는 특수강 재질의 구속구.
거기에 철통같이 감옥을 감시하는 다섯 명의 기사.
감옥 하층에 깔려있는 병사들까지.
“탑 위에 갇힌 공주님도 아니고…. 지극정성이구만.”
쾅-!
그렇게 이죽대는 사이, 감옥 문을 후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함부로 입을 열지 마라, 기사 학살자!”
“황제 폐하를 시해한 버러지 같으니!”
“네놈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분노에 찬 기사들의 규탄이 이어졌지만, 이안은 거기에 주눅 드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여튼, 고지식한 놈들…. 음?”
조용히 중얼거리는 것도 잠시.
파츳-!
익숙한 시동음에 시선을 돌린 이안은, 자신이 꿇어앉은 바닥에 뭔가가 새겨지는 것을 보았다.
망할 제자놈이 늘 사용하던, 창백한 푸른 빛.
“크, 크하하하하하-!”
이윽고 그는 이 상황이 재미있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소리높혀 웃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고?! 거짓 왕을 죽였지! 구더기마냥 기어나오는 거지 같은 목숨을 한 번 끊어줬을 뿐이라고!”
이윽고 이어지는 망언.
죽은 선황제를 향한 모욕에, 분개한 기사들이 문 앞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력은 구속구로 제한한 상황에, 몸은 만신창이.
의식을 차린 김에, 제대로 응징을 가할 생각인 듯 했다.
철컹-!
문이 열리고, 기사 다섯 명이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흉흉한 마력을 두른 곤봉과 거기에 박힌 징들.
보기만 해도 흉흉한 광경을 응시하며, 이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렇게 물불 안가리고 달려들다니, 황제 놈이 정신교육을 잘 하긴 했나보군.”
“이 자식이 지금 뭐라는……!”
분기탱천한 기사가 거기까지 말했을 무렵.
푸욱-!
이안을 보고 있던 기사의 가슴팍에서, 그림자로 이루어진 검이 솟아났다.
“어, 어어?!”
“잠깐만.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 기사들은 인지부조화가 온 듯했다.
이곳은 황실 경비대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감옥탑.
심지어 그 꼭대기에 위치한 특별 수감시설이란 말이다.
그런데, 침입자라니?
아래층에선 아무런 소식도……!
“아래층에선 모르는 게 당연하지.”
이윽고 어둠 속에서 한 쌍의 시퍼런 안광이 빛났다.
자신들을 꿰뚫어 보는 듯한 서슬 퍼런 눈.
그것을 본 기사들은 눈을 크게 뜬 채로 말했다.
“저, 저 얼굴은……?”
“클라인 공자…?”
그림자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북부에 있어야 할 라인란트 제 2공자, 클라인 라인란트.
“난 위에서 내려왔거든.”
그렇게 말하는 클라인 공자의 어깨에는, 시커먼 부엉이가 날개를 가다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날갯짓을 한 듯 이리저리 깃털을 고르고 있는 모습.
그렇지만 이 작은 새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하여튼, 망할 영감탱이. 사고 좀 치지 말라니까요?”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얼굴을 내민, 이안의 제자.
그 모습을 보며, 이안은 반가운 목소리로 낄낄댔다.
“다음엔 좀 일찍 와라. 망할 제자놈아.”
이 아이가, 클레어가 말했던 자신의 선택지.
제국을 뿌리부터 부숴버릴 마지막 한 조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