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선물이 좀 많네
제국이 움직이기 시작한 마당에, 더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북서부 토호들의 서신을 가지고 마차에 오른 지 이틀.
“클라인 도련님 오셨습니다!”
문지기의 외침과 함께 익숙한 저택의 대문이 열리고, 저택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오, 진짜 이놈의 마차….”
아직도 얼얼한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마차에서 내렸다.
오랜만에 도착한 라인란트 저택.
이미 전쟁 준비에 들어간 듯, 마당엔 온갖 전쟁물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도련님!”
“오, 진짜 왔네요.”
맑은 목소리와 함께 달려온 것은 아린.
그 뒤를 따라 스텔라가 다가왔다.
“히히! 어서 오세요!”
그렇게 말하며 안겨드는 아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허리를 붙잡은 손에서 미미한 떨림이 느껴져 왔다.
‘아직은 힘든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스텔라는 내 얼굴을 살펴보며 미심쩍은 표정을 했다.
“공자님 뭔가…. 달라졌는데요?”
“그래 보입니까?”
그 말에 아린 또한 생각나는 것이 있는 듯, 내 얼굴에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련님 눈! 훨씬 이뻐졌어요!”
“아.”
두 사람이 말한 대로, 내 눈 색깔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푸른빛을 머금은 것은 여전했지만, 이전까지의 내 눈동자는 검정에 가까웠지.
그렇지만 이제 내 눈은 어두운 빛이 사라진, 선명한 하늘색을 띠고 있었다.
초상화에 그려져 있던, 클레어 공후의 눈처럼.
“왔느냐, 클라인.”
뒤이어 들려온 것은 하인켈의 목소리였다.
가벼운 경장 차림을 하던 평소와는 달리, 망토와 흉갑을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소식은 익히 들었겠지?”
“예. 답변도 여기 받아 왔습니다.”
하인켈은 내가 건넨 서신을 읽어 내려갔고,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한시름 놓았군.”
“준비가 다 끝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겁니다. 한 번은 우리끼리 막아야 해요.”
“그렇겠지.”
그렇게 말하는 하인켈은 적재작업이 한창인 마당을 둘러보았다.
“돌아왔군요, 클라인.”
그렇게 말한 것은, 뒤따라 들어온 프리실라 공후였다.
“그 눈은, 클레어의….”
달라진 내 눈을 본 프리실라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보급 상황은 순조로워요.”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라는 듯, 프리실라는 덤덤히 말을 이어갔다.
“폴와이번 내전에서 얻은 재원에, 방계가 쥐고 있던 거점, 보급로까지. 장비도 보급 상황도,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죠.”
라인란트의 보급과 병참은 그녀의 영역.
이전부터 이런 일을 대비해 온 듯, 적재작업 역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제국. 대륙의 태반을 지배하는 대국이죠.”
그렇게 말하는 프리실라의 표정은 어두웠다.
“…세 공작이 연합한다 한들, 명분 없는 전쟁이 된다면 승리할 수 없으니 말이지.”
하인켈의 말에 프리실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은 황제를 시해한 인물로 이안 아주버님을 지명했고, 신병까지 확보해 둔 상태에요.”
“…….”
“그리고 그의 행적을 지속적으로 은폐한 라인란트를 공범으로 지목했죠.”
그렇게 말하자 하인켈이 설명을 덧붙였다.
“형님이 황궁에 난입한 것은 엄연한 사실. 제국 귀족들 역시 이 전쟁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황제 시해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
확고한 명분이 뒷받침된 상황이라면 칼자루는 그들의 손에 있는 셈이었다.
“당장은 무리 없이 막을 수 있겠지만, 전쟁이 길어진다면….”
“북부의 자원은 고갈될 테고, 그대로 말라죽을 겁니다.”
한 치의 낙관도 없는 예측.
나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제국이 노리는 것 역시 그것이겠죠.”
난 황제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고 있다.
형상과 목소리를 바꿔가며 역대 황제를 연기하고 있지만, 그의 정체는 초대 황제 멜디르.
‘200년 동안 제국이 네크로맨서를 육성한 이유가 이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사령술로 연명하는 줄만 알았는데, 설마 인공 신이라니.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일 줄이야.
‘황제 노릇을 하려면 이 정도 깡은 있어야 한다는 건가?’
새삼 그렇게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멜디르 황제는 사실상 영원한 삶을 사는 자.
그런 그가 지닌 최고의 무기는, 다름 아닌 시간이었다.
‘한 번에 몰아칠 필요 없다고 생각하겠지.’
그저 천천히 북부를 소모시켜, 자멸하게 만들면 될 뿐.
놀랍도록 확실하고, 또한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안전한 길만 고르니까 지는 거다. 겁쟁이 새끼.’
20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난 하인켈을 향해 말했다.
“제국으로 가겠습니다.”
“……뭐라?”
북부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는 곳으로 가겠다.
그 말에, 하인켈은 잠시 할 말을 잊은 듯했다.
“이미 제국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알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 제국으로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요.”
공작가의 자제라는 신분은 써먹을 수 없다.
얼굴을 들키는 순간 포박되고, 처형되겠지.
하지만 여기 있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토호들의 지원을 약속받았으니, 이곳에서 제가 할 일은 끝났습니다.”
라인란트의 기사들을 지휘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가주인 하인켈, 그리고 그 후계자인 델라인이 해야 할 일이지.
게다가 서부 장벽에서 언데드 물량을 소모한 상황.
지금 같은 전면전 상황에서 내가 합류한다 한들, 큰 변수는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전에 해 왔던 것처럼, 적의 배후를 쳐야지.
‘태생이 악당이라, 내 성미에 더 잘 맞기도 하고 말이야.’
뒤에 한 생각은 빼 놓은 채 설명하자, 프리실라는 뭔가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제국에 가서, 이번엔 무엇을 할 생각이냐?”
하인켈은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이어진 내 말에, 그는 더욱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숙부님을 구해야죠.”
“……?”
이안 라인란트.
페트리우스 황제를 시해한 그는 제국이 북부를 치는 가장 좋은 명분이었다.
“형님을 구출하겠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제국은 숙부님을 확보했다고 했지, 처형했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안이 살아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자, 하인켈의 얼굴이 조금은 펴진 것 같았다.
“형님을 구출한다 해도, 그것이 전황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냐?”
옳은 소리였다.
황제를 시해한 대역죄인을 구출한다면, 제국 입장에선 오히려 명분을 더 얹어주는 꼴이었으니까.
“……잠깐만요.”
그렇게 말하며 의아해하는 하인켈 대신, 프리실라가 말했다.
“아주버님이, 이 전쟁의 판도를 바꾼 열쇠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 말에 난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숙부님은 제국 기사 출신에, 각국의 외교 사정에도 밝습니다.”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검을, 그리고 사람들을 보아 온 노인이다.
그런 인간이, 아무런 계산 없이 황궁으로 쳐들어갔을 리 없지.
“황제를 죽이면 어떻게 될지, 제국이 어떻게 움직일지. 대부분은 짐작하고 계셨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자 하인켈의 눈이 커졌다.
“그것을 전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님께선 일을 저질렀다?”
“예.”
돌발행동이 아닌, 무언가 생각이 있기에 저지른 일이다.
“그렇다면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대답이 들려오기 전에 덧붙였다.
“이 상황을 뒤집을 만큼, 중요한 이유가.”
“……!”
내 설명에 하인켈은 생각이 많아진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확실히, 아주버님이 아무 생각 없이 일을 벌이실 분은 아니죠.”
그렇게 말한 것은 프리실라였다.
“그렇다고 해도, 추측만으로 당신을 적진에 보낼 수는 없어요, 클라인.”
어머니와 같은 빛을 띠는 내 눈.
그것을 가만히 응시하던 프리실라는,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국 내부의 정보라면 제가 알아볼 수 있어요. 엘크라이어 백작가의 태반은 친 제국파이니, 그쪽 인맥을 활용한다면….”
“가능성 없는 이야기인 거 압니다.”
내 말에 프리실라는 고개를 숙였다.
이미 라인란트는 황제 시해라는 멍에를 뒤집어쓴 상황.
반역자에게 협력한다면, 제국의 칼날은 그녀의 처가까지 위험하게 만들 터였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가 한 것은 단순한 억측일 뿐이고, 그 노친네가 갑자기 미쳐서 일을 저질렀을 지도 모르죠.”
평소에 내가 이안을 어떻게 부르는 지 알고 있기에, 난 거침없이 말했다.
“그렇지만 가능성이 있다면, 전 거기에 걸어보고 싶습니다.”
‘그때 갑자기 사라진 것도 미심쩍고 말이지.’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한 마디 작별의 말도 없이, 급하게 다음 행선지로 가버렸었지.
‘거꾸로 선 마탑. 그 가장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엘프란의 서고.’
그곳에서 엘프란을 쓰러트렸을 때, 이안은 분명 그곳에서 뭔가를 봤을 터였다.
그 능글맞은 노친네가 농담 한 마디 없이 서두를 정도로 중요한 무언가를.
“…뭐, 명목상으론 이런 이유고.”
그렇게 말한 난 하인켈을 향해 말했다.
“제 하나뿐인 스승님인데,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
겉치레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이번 생에서 맞이한 첫 스승.
심지어 200년 전에 모셨던 그 망할 노친네와 놀랍도록 닮은 꼴이었다.
“명색이 제자란 놈이, 스승을 외면할 수는 없죠.”
멋쩍게 웃는 표정과는 달리, 내 눈은 진지했다.
‘전생과 같은 결말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으니까.’
꽈악-
얼음성에 녹아든 그 노친네를 떠올리자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후우….”
하인켈 역시 그 기색을 눈치챈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허락하마.”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그렇게 말한 하인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켈……!”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지금 막아봤자 야밤에 몰래 도망 나갈 거요.”
하인켈을 나무라는 프리실라였지만, 하인켈의 말에 그녀 역시 어깨를 늘어트릴 뿐이었다.
“출발은 언제쯤이 좋겠느냐?”
“내일 동이 트는대로 가겠습니다. 준비할 것도 이것저것 있고, 거기에….”
그렇게 말을 흐린 난,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흡족하게 웃어 보였다.
“와갓집에서 준 선물이 좀 많아서요.”
그렇게 말하는 사이, 라인란트 저택 한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게 다 뭐야…?”
“뭔 놈의 짐이…….”
저택 입구가 열리고, 커다란 무언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북서부에서만 서식하는 거대한 물소.
그리고 그 물소가 끌고 있는, 무지막지한 크기의 짐마차였다.
“이게 무슨…. 우, 우와악?!”
보급관 중 한 명이 짐을 확인한 순간, 그는 화들짝 놀라 뒤로 넘어갈 뻔했다.
“레, 레어메탈이라니! 이게 전부 다……?”
그 말에 짐마차를 덮은 천이 걷히고, 안에 든 내용물이 나타났다.
짐마차 가득 쌓인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철괴.
그것도 일반적인 철괴가 아닌, 오색찬란한 반사광이 비치는 레어메탈이었다.
- 오랜만에 그 괴물을 다시 보겠구만.
그렇게 말하는 레이븐의 말을 뒤로하며, 난 짐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저 레어메탈은 200년 전, 아키몬드 군단의 최선봉을 맡았던 최강의 언데드.
섀도우 골렘, ‘타이탄’을 만들기 위한 재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