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우린 서로에게 저주였구나
눈을 뜨자 내 눈에 보인 것은, 차가운 설산의 풍경이 아니었다.
“일어났어. 아들?”
날 깨우는 어머니, 클레어 공후의 목소리.
“이걸로 다섯 번째인가.”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게 다가오는 사념체의 말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린 녀석이 있었으면 또 잔소리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날 둘러싼 공간이 확실하게 보였다.
“여긴….”
고동색 나무로 지어진 작은 산장.
보아하니,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날 이곳으로 옮겨온 듯했다.
하긴,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그 자리에 방치하면 얼어 죽었겠지.
“에취!”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
“부르르르…!”
아니 미친.
뭔 놈의 산장이 이렇게 추워?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돌리자, 난 단번에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잇, 왜 안 되는 거야?”
내 배낭 속에 들어있던 발화장치를 뒤적이는 어머니의 사념체.
- 클라인 녀석은 한 번에 붙이던데.
그 옆에 가부좌를 튼 채, 이것저것 훈수 중인 데스나이트, 레이븐까지.
알만하다.
어머니의 사념체는 언데드.
태어날 때부터 추위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저 사념체가 불을 못 붙이는 건 납득이 간다.
근데 레이븐 얘는 뭐지?
베르켈의 원정대에 참여했던 기사가, 난로에 불을 못 붙여?
심지어 발화 장비가 버젓이 있는데?
“그러는 기사님도 불 못 붙였잖아요?”
어머니의 사념체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눈을 가늘게 뜬 채 툭 내뱉었다.
- 크, 크흠!
할 말이 없으니 헛기침하는 거 봐라.
- 취, 취사에 관련된 일은 전부 로드릭이 해줬기에….
“…….”
“……….”
날 타도한 영웅들의 시시콜콜하기 짝이 없는 뒷얘기.
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로드릭 그 자식은 기사가 아니라 보모였냐?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원정대의 취사담당이었던 붉은수레의 기사.
그렇지만 그의 후배라 할 수 있는 듄켈은 야영은 젬병이다.
한편, 불 하나 제대로 못 지피는 큰까마귀 기사.
대장벽을 지키는 그의 후배들은 자급자족과 야생생활의 달인이다.
장벽 밖에 알몸으로 던져놔도 일주일이면 완전무장한 채로 돌아오는 놈들이거든.
‘200년 사이에 이렇게까지 달라지는구만.’
그렇게 생각하며, 난 난로 앞에서 씨름하는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이리 내 봐요.”
“오!”
어머니가 든 부싯돌을 빼앗아 부싯깃에 불을 붙였다.
치익-!
부싯깃에 옮겨붙은 불씨를 불어 불을 내고, 난로에 집어넣어 땔감을 쌓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륵-!
자, 난롯불 완성.
내가 손댄 지 단 2분 만에 해낸 일이다.
“이 간단한 걸 못해서 내가 뻗어있던 내내 삽질하고 있었어요?”
“치, 내가 이런 걸 해 봤어야지.”
‘치’ 는 무슨, 다 큰 어른이.
입을 비죽 내민 사념체를 바라보며 한껏 얼어있던 몸을 녹였다.
“후우….”
난롯불의 연기를 쬐자 잔뜩 굳어있던 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얼어 죽지 않았다뿐이지, 어지간히도 추웠던 모양이다.
- 미안하네, 클라인.
얼마간 불을 쬐고 있자, 레이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들,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겠지만….
“아, 새끼. 그거 때문에 아직까지 죽상이었냐?”
중얼대는 그의 말을 자르며 그의 투구를 두드렸다.
“사과하지 마. 쓸데없이 열 낸 거 생각하면 내가 더 쪽팔리니까.”
- …….
그가 날 속인 것은 전부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곳에 다다르기까지, 어떤 계획이 있었는지.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베르켈은 200년 전의 싸움에서, 아키몬드의 혼을 노르드빈트에 담았다.”
혼란한 머릿속을 정리할 겸, 난 내 입으로 직접 내뱉었다.
“성검이 아닌, 노르드빈트로 내 목을 벰으로써.”
날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을 느끼며, 난 계속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200년 후에 제 혼이, 아키몬드의 영혼이 풀려나도록 안배했고.”
그들은 기억과 힘을 보존한 채 내 영혼이 환생할 수 있도록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베르켈의 후손으로 태어나도록.
그렇게 환생시킨 날, 제국과 교국을 찌를 비수로 쓰기 위함이었다.
“베르켈은 다가올 그 날까지 날 보호하고자, 라인란트 공작가를 만들었지.”
“…….”
“북부의 맹주를 자처하며, 그 누구도 북부를 넘보지 못하도록 했어.”
‘어째서 라인란트는 제국의 질서에 반하는가?’
방계를 포함한 수많은 귀족들.
심지어는 가문 내부에서도 몇 번이나 나왔던 질문이었다.
제국의 귀족들 중 황제의 승인 없이 작위와 통치권이 인정되는 것은 오직 북부 뿐.
라인란트는, 작위 임명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유일한 귀족이었다.
“그리고 제국은 그 권리를 빼앗기 위해, 200년의 세월 동안 본가를 압박해왔다.”
바꿔 말하자면, 그것 하나만 포기한다면 된다는 말이었다.
작위 임명권을 황제에게 넘긴다면, 제국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주겠다 약속했다.
헬리안이 장악한 폴와이번의 귀족들이 그랬듯이.
엘프란이 지배하는 아일라시스가 그랬듯이.
“그리고 그 200년의 세월 동안, 그들은 날 지켜왔고.”
방계에 이권과 영지를 침탈당하면서도.
제국의 군홧발에 자존심이 짓밟히고, 몰락한 영웅이라 조롱당하면서도.
그 모든 수모를 이겨내며 가문을 지킨 이유가, 나 같은 악당을 지키기 위해서라니.
“이렇게, 우린 삶을 넘어서 얽매였구나. 베르켈.”
내가 봤던 영상 속, 베르켈의 말을 되뇌었다.
‘라인란트는 언제나, 대륙 최강의 기사여야 한다.’
라인란트를 지탱해 온 그 말은, 단순한 가훈이 아니었다.
“그 말은, 다짐이나 각오가 아니었어.”
200년의 세월 동안, 라인란트를 묶은 그 말.
귀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그 후손의 후손까지 고통받게 한 영웅의 얼개.
그리고 죽은 내 혼을 끄집어내, 자신의 이름을 짊어진 채 싸우게 한 그의 족쇄.
“그 말은 네가 나에게, 그리고 내가 너에게 건…. 저주였던 거야.”
영웅에게 패배한 악당으로써, 편히 죽지 못하는 저주.
멸망을 막아야 한다는 의무에 얽매여, 자식의 자식까지 사명에 옭아매는 저주.
- 그리고 자네는, 그 저주를 끊어낼 유일한 인간이지.
그렇게 말한 것은 데스나이트, 레이븐이었다.
- 제국과 교국이 만들어낼, 신을 죽임으로써.
난 이미 결정했다.
이제 와서 지금껏 해 온 일을 내팽개칠 수는 없다고.
이것은 단순한 결정이 아닌, 망자의 혼에 맹세한 네크로맨서의 계약.
그리고 네크로맨서는, 그 책임을 짊어지는 자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정리하던 순간.
“좋아. 머릿속도 슬슬 정리된 것 같고!”
어머니의 사념체가 내 양어깨를 잡았다.
“몸은 좀 어때?”
“…몸이요?”
그렇게 되묻자, 어머니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눈 말이야. 눈.”
“…아, 그랬었지.”
이곳에 온 최초의 목적.
충격스러운 사실을 너무 많이 알아서인지,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다.
“뭔가 달라진 게 있지 않아?”
“달라진 거라….”
그렇게 중얼거리며, 난 손으로 눈 주위를 더듬었다.
“뭐랄까 좀…. 시원하네요.”
눈가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각.
그리고 모든 걸 결정하며 느낀 후련함까지.
내가 느낀 그대로 말하자, 어머니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능력도 마음도, 제대로 자리 잡았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큰 차이를 느끼기 힘들었다.
‘예전보다 좀 더 시력이 좋아진 느낌은 드는데, 이게 다일 리는 없을 테고….’
그런 내 내심을 알아챈 듯, 어머니는 큭큭 웃었다.
“내려가서 겪어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지만…. 간단하게 체험시켜줄까?”
그렇게 말하는 바로 다음 순간.
“?!”
어머니는 그대로 발을 뻗어, 내 머리를 향해 횡으로 휘둘렀다.
드레스 차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경쾌한, 그리고 위력적인 몸놀림.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제대로 피해야 하는 강격이었다.
촤륵-!
“아니, 갑자기 뭐 하는……!”
제 2 공후는 병약했다면서?
그래서 날 낳던 도중에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면서?
이 발차기는 환자가 쓸 만한 게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의 발을 애써 피한 순간.
후웅-!
한 박자 늦게 파공음이 들리고, 그제서야 어머니의 발차기가 내가 있던 자리를 갈랐다.
…잠깐만.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발차기가 오기 전에, 미리 피한 건가?
“오, 처음 쓰는 것 치고는 제법인데?”
혼란에 빠진 날 향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말했지? 네 눈이 가진 힘은, 라인란트의 검과 유스티아의 예지력이 결합된 것이라고.”
그렇게 말한 어머니는 연달아 두 번, 경로를 교차해서 발을 휘둘렀다.
“……!”
훙! 후웅-!
두 번째가 되니 확실히 보인다.
어머니가 준비 동작을 취하는 순간, 이미 공격 경로가 보인다.
‘지금까지는 준비 자세나 근육의 움직임을 보면서 예측했지만, 이건 그 수준이 아니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보이는 것은, 단순한 예측이나 수읽기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어디로 어떻게, 무슨 공격이 올지.
지금 내 눈은, 상대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예지하고 있었다.
“허……!”
이 힘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한 순간, 짜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이거라면.
이 눈을 활용한다면, 일대일 대결에서 확실히 우위를 가져갈 수 있다.
“최종적으로 완성될 모습은 좀 다르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면 되겠지.”
그런 내 모습이 흡족한 듯, 어머니의 사념체는 천천히 내게 다가와 말했다.
“자, 이걸로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끝!”
“……풉!”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렇게 외치는 모습에,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밑천 다 드러났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뭡니까?”
“어어? 얘는 줘도 난리네?”
장난스레 이죽거리는 아들과 뾰로통하게 투덜대는 어머니.
아마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저택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겠지.
아린 녀석은 보나 마나 옆에서 거들 테고.
하인켈은 그걸 보며 난처하게 웃고. 찻잔을 기울이며….
….
…….
“한 가지.”
“응?”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으니, 이젠 내려가야 할 때.
산을 내려가기 위해 짐을 정리하면서, 난 지나가듯 그녀에게 물었다.
“아키몬드가 아니라 클라인으로써,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그렇게 말하자 어머니의 사념체는 무슨 일이냐며 날 돌아보았다.
“제 환생은 어머니께서 준비한 계획이었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난 지체없이 되물었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난 것도, 그와 결혼한 것도. 전부 계획이었습니까?”
아직도 그녀를 기리는 하인켈과 프리실라.
그들을 떠올리며 그렇게 물었고.
“응. 계획이었어.”
그 대답에, 난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나갈 채비를 마쳤다.
“…계획이었을 텐데.”
“?”
그렇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녀를 돌아보자,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있었다.
“어느 순간, 정말로 사랑하게 될 거야.”
“……!”
초상화에서 본 것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말했다.
“그이가 타 주는 차는 향기로울 테고, 프리실라가 읽어주는 책은 정말 재밌을 테지.”
이 사념체를 만든 것은, 스무 살의 어머니.
그녀가 회상하는 것은, 그녀가 아직 겪지 못한 미래.
“갓 태어난 네 얼굴을 볼 땐, 정말 너무 행복해서…. 꼭 껴안고 엉엉 울 거야.”
그럼에도 미래를 말하는 그녀는, 마치 그것을 직접 겪은 듯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만은 기억해 줘. 클라인.”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날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넌 축복 속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걸.”
“……예.”
듣기만 해도 낯간지러워지는 한 마디.
말없이 등을 돌린 난,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념체를 향해 천천히 말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