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다른 선택을 해 봐도 좋겠죠
“제 환생이 오래전부터 계획됐었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결정을 내리자 머릿속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렇지만 내 감정과는 별개로, 의문점은 계속해서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절 이곳까지 인도한 이유는 뭡니까? 라인란트를 부흥시키기 위해?”
“아니. 그건 문제가 아니야.”
대답은 금세 나왔다.
“미래를 바꿔서, 멸망의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허.”
멸망이라.
내 전생과 참 밀접했던 그 말을 곱씹었다.
‘이렇게까지 거창하면 할 말이 없는데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난 질문을 이어갔다.
“영웅 노릇 할 인간을 찾는다면 차라리 베르켈을 환생시킬 것이지, 왜 굳이 저 같은 네크로맨서를?”
약간의 비아냥을 담아 그렇게 묻자, 클레어의 사념은 표정을 굳힌 채 내게 말했다.
“너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저밖에 할 수 없는 일?”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제국과 교국이 뭘 꾸미고 있는지. 알고 있지?”
“…….”
물론, 모를 리가 없다.
“인공적으로 신을 만들어내는 것.”
내 죽음 이후 200년.
그동안 제국과 교국은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인간을 이용해 만든 성혈.
언데드의 몸을 가공해 만들어낸 성체.
그리고 케르시아스의 혼.
그들은 이 세 가지를 결합하여,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신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까지 힘에 집착하는 이유 또한, 저 때문이겠죠.”
그렇게 말하자 입을 연 것은 레이븐이었다.
- 아키몬드가 일으킨 군세는 그들의 상식을 완전히 파괴했다.
“…….”
북쪽 끝에 솟아오른 얼음성.
그곳에서 쏟아진 수백만 언데드 군단은, 대륙의 절반을 초토화시켰다.
- 제국 수도는 유린당했고, 멜디르 황제는 황성 지하에 웅크렸지.
제국 수도를 함락시킨 것은 시작에 불과했었다.
베르켈이 내 목을 따지 않았다면 말이지.
- 신성교단이 자랑하는 성직자들은 전부 도망치고, 대성당이 불타올랐다. 대륙을 호령하던 그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그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선, 아키몬드의 군세 이상 가는 힘이 필요할 테니까요.”
아키몬드 사변은 제국과 교국에게 있어선 가장 큰 트라우마.
그렇게 말하면서도 의문점은 계속 남아있었다.
“하지만, 멸망이라는 말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저들이 신을 만들어내는 이유와 대륙이 멸망한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들은 신을 현계시켜, 그 힘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전부 때려 부수는 것이 아니라요.”
제국은 대륙 전체를 통일할 힘을, 교국은 통일된 대륙의 유일한 종교가 되고자 한다.
그를 위한 계획이고, 그것을 위한 동맹이다.
“힘은 있는데 막상 군림할 세상이 멸망한다면, 애써 신을 만들어낸 보람이 없죠.”
제국과 교국은 철저히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자들.
탐욕스럽지만, 파괴에 미친 자들이 아니다.
‘계획이 성공하면 정복전쟁 정도는 벌이겠지. 그 때를 대비해서 반란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반란이 실패한다 한들, 대륙이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북부를 포함한 모든 공작령이 제국의 손에 넘어가고, 제국은 대륙을 통일하겠지.
내 입장에선 복장이 뒤집히는 결말이지만, 멸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을 이용해 대륙을 뒤집어 봐야 제 밥그릇을 뒤엎는 행위일 뿐. 대륙이 멸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클레어 공후의 사념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만들어낸 신이, 통제가 가능하다면 말이지.”
“……?”
그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이 만들어낸 신이, 폭주할 것이다?”
“응. 반드시.”
그렇게 확답하는 클레어 공후가 계속해서 말했다.
“황제가 신의 몸을 차지하던, 반대로 교단이 신을 통제하게 되건, 그 끝은 똑같을거야.”
많은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
같은 계획을 가지고도, 두 집단의 목표가 다르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폭주하는 신을 막아낼 수단은, 이 대륙에 단 하나밖에 없지.”
이어지는 그녀의 한 마디에, 내 표정이 가라앉았다.
“얼음성.”
“…….”
“그걸 다룰 수 있는 건, 너뿐이었으니까.”
잠시 동안의 침묵.
한참만에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쎼요,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게 말한 난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음성을 만든 원래 목적은 북부 왕국, 윈터폴을 지키는 요새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날 보며, 클레어 공후의 웃음이 짙어졌다.
“도시 전체에 보호막을 펼칠 수는 있지만, 인공 신 같은 무지막지한 걸 막을 수는….”
- 정말 그랬다면, 윈터폴 사람들은 왜 죽어가면서까지 그걸 만들었지?
옆에서 들려온 레이븐의 목소리에, 난 대답하지 않았다.
- 아키몬드. 자네의 동료들과 스승은, 왜 그 성에 자신들의 존재를……!
“입 닥쳐.”
결국 참지 못하고 목소리에 감정이 담겼다.
“함부로 그들을 입에 담지 마.”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한들, 그는 나와 검을 맞댔던 적.
그런 자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았다.
얼음성이 최종적으로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했는지.
…하지만.
“그래도 뭐, 무슨 이유로 절 살렸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네크로맨서, 아키몬드의 요새.
수백만 언데드를 뿜어내는 언데드 공장.
그것은, 그 성의 성질을 비틀어서 일으킨 편법에 지나지 않았다.
“전 결국 당신의 계획을 위한, 장기말에 불과했다는 것도요.”
***
“하…….”
한참만에 내 입에서 나온 것은 한숨이었다.
“하하…! 하하하하……!”
깊이 탄식하는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허탈감? 배신감?
모르겠다.
아니, 지금 내가 이런 감정을 갖는 것이 합당한지조차 의문이었다.
허탈해? 뭐가 허탈하지?
배신감? 누가 배신했는데?
“마녀라.”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라인란트를 지키겠다는 둥, 왕가로 만들겠다는 둥.
내 의지로 행한 일이라 믿었던 모든 순간들이, 내가 아닌 누군가가 짜 놓은 청사진의 일부였다니.
납득할 수도,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헬리안이 별명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지었군요.”
그렇게 말하며 클레어, 아니, 그녀의 사념체를 보았다.
악의가 가득 담긴 비아냥에 그녀는 쓰게 웃었다.
- 클라인. 저 사념체는….
“나도 알아. 그러니 입 다물어.”
어느새 실체화된 레이븐의 말을 끊었다.
그래, 머리로는 알고 있다.
눈앞에 있는 그녀를 붙잡고 욕을 한들,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나와 대화하고 있는 것은 죽은 이의 잔재.
그런 존재에게 화풀이 해봤자, 허수아비한테 성질내는 것과 진배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넘어갈 수는 없어.”
내 죽음을 비틀어, 라인란트의 몸으로 환생시킨 장본인이 눈앞에 있다.
적어도 한 마디 해명은 들어야 했다.
“레이븐, 너도 마찬가지고.”
쓸데없는 화제로 시시덕거리던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내 목소리는 차가웠다.
“날 이곳으로 인도하는 게 너희들의 목적이었다?”
내 추궁에 레이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넌 다 알고있었다는 거잖아.”
변명하지 않는 태도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내가 라인란트에 태어나서, 7년 동안 그 개고생을 하고, 여기까지 일을 벌이는 것까지.”
실소가 절로 새어 나왔다.
“재밌네. 그래, 진짜 재밌어.”
망해가는 가문을 살리겠다며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나날이, 전부 부질없이 느껴졌다.
“내 인생은 전부 너희들이 짠 계획이었고, 난 그 안에서 너희 각본대로 놀아나는 장기말이었다라….”
- 그건 아닐세.
내 자조 섞인 한 마디에 레이븐이 곧바로 반박했다.
- 이곳까지 온 것은 온전히 자네의 선택일세. 나와 베르켈은 단지…!
“베르켈이 이 일을 주도한거군?”
그의 말을 끊고 그렇게 말하자, 레이븐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 지경까지 와서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어디까지 예측한걸까.
내가 이 진실을 듣고, 이렇게 반응하는 것 까지?
모르겠다.
이젠 정말 모르겠다.
“저 기사가 한 말은 진짜야.”
허탈해하고 있는 내게 다가온 것은 클레어, 아니, 그녀의 사념체였다.
“내가 너에게 모든 걸 말해준 이유 역시, 네게 선택권을 주기 위해서고.”
“……선택권?”
내 되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이 모든 일에 환멸을 느끼고 전부 포기하겠다면, 난 널 말리지 않을 거야.”
“…….”
“내겐 널 막을 힘도, 그런 권리도 없으니까.”
그 말에 난 피식 웃었다.
“제가 무슨 대답을 할 지도 예측하신 거 아닙니까?”
“삐딱하긴.”
입을 비죽 내밀며 그렇게 말한 그녀는 설명을 덧붙혔다.
“내가 본 미래는 하나가 아니고, 확실히 정해진 것도 아니야.”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내가 제시하는 건, 미래를 결정하는 분기점.”
사륵-!
바닥에 쌓인 눈이 흩날려, 하나의 문양을 이루었다.
거기에서 뻗어나간 선들은 이윽고 여러 갈래로 퍼져, 종국에는 몇 가닥인지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이곳에서 네가 내리는 선택에 따라, 미래는 수없이 바뀔 수 있어.”
“…….”
“평화를 되찾을 수도, 아니면 지금 벌어지는 것보다도 더한 재앙이 밀어닥칠 수도 있지.”
그렇게 말한 그녀는 다시 한 번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걸 결정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야.”
“…….”
“나나 저 기사같은 과거의 망령이 아닌, 지금을 살고 있는 너.”
결연한 눈으로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날 향해 물었다.
“클라인. 넌 어떻게 하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는 부탁하는 말투도, 다그치는 말투도 아니었다.
마치 짧은 나들이의 목적지를 묻듯, 가볍고 평온한 목소리.
“후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200년 전, 분노에 미쳐 대륙을 뒤집었던 나날.
그리고 클라인 라인란트로써, 대륙 곳곳을 누비던 나날까지.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기사님!’
폴와이번 영지에서, 내게 꽃을 건네며 그렇게 말한 아이의 얼굴.
‘클라인 라인란트. 당신은 우리의 영웅입니다.’
재판이 끝나고,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던 사람들의 목소리.
‘자기 목숨을 가치 없다고 생각하지 마. 적어도 난, 널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올곧기 짝이 없는, 내 형.
‘라인란트의 공후로서, 자랑스럽습니다. 클라인.’
그렇게 말하며 날 받아들였던, 가족들까지.
그때 만났던 사람들.
그때 느꼈던 감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알게된, 수많은 이들을 떠올리며, 난 나지막히 내뱉었다.
“그래….”
어머니, 클레어 공후의 얼굴.
레이븐의 모습.
그 너머로 펼쳐진, 새하얀 설원을 보았다.
“이게 네 진짜 계획이었구나. 베르켈.”
아무것도 없었던 내게, 처음으로 가족이 생겼다.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이 나타났고, 내 등을 바라보는 이들을 만들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사는 세계를 사랑할 수 있도록.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본질이 아닌 선택과 행동일지니.”
귀가 닳도록 들어온 격언을 중얼거리며, 난 마음을 굳혔다.
“이번 생엔…. 다른 선택을 해 봐도 좋겠죠.”
멸망을 막고 라인란트를 부흥시킨다.
그 목표를, 이제 와서 포기할 생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