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지원병
“증명하겠다?”
내 말을 들은 크란츠 변경백이 몸을 기울였다.
“무엇으로 그것을 증명할 생각이지?”
그 물음에, 난 피식 웃으며 답했다.
“라인란트를 대표하여, 이 자리에서 무릎이라도 꿇어드릴까요?”
“무……!”
“농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격하네.
재빨리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편하게 고쳐앉았다.
이곳에 온 나는, 금지옥엽 외손자가 아닌 라인란트의 사자.
내 눈빛이 바뀌는 것을 감지한 듯, 살갑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이제 와서 구태의연하게 사과한들, 여러분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겠죠.”
미안하다, 앞으로 잘하겠다.
그런 말만으로 이들을 회유하겠다는 생각 따위, 조금만큼도 가진 적이 없다.
애초에, 그렇게 엎드려 협력을 얻어내 봤자 쓸 데도 없고.
‘이들의 마음을 돌리는 동시에, 상하관계를 각인시켜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하인켈이 자신이나 델라인 대신에 날 보낸 것이겠지.
이전까지 보이던 우유부단한 모습에 비교한다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보기에 답답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라인란트가 보여야 할 것은 사죄가 아니라 여러분들을 납득시킬만한 성과, 그리고 이권입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계속해서 말했다.
“예를 들면…. 장벽 너머에 진을 치고 있는 몬스터떼를 박멸한다던가요.”
“……!”
“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에 포진해있던 전사들이 움찔했다.
곰가죽을 두른 우락부락한 남정네 수십 명이 날 쳐다보는 기분은 참….
“본가에 말하지 않은 사실일 텐데, 어찌 알았지?”
“절 데리고 오르셨던 산길을 보며 알았습니다.”
크란츠의 물음에 난 곧바로 대답했다.
“새로 낸 지 얼마 안 된 길이더군요.”
군데군데 보인 나무 밑동.
정리되지 않은 흙길에 난 발자국들까지.
“그리고 또 한 가지.”
거기에 덧붙여, 난 눈짓으로 그들이 허리에 찬 도끼를 가리켰다.
“푸른색 피는 그렇게 흔한 게 아니죠.”
“아….”
내 눈짓을 받은 전사가 슬쩍 도끼를 숨겼다.
아니, 숨겼다고 할 수 있으려나?
다 보이는데.
“잘도 유추해냈구나. 그냥 흘려넘겨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을….”
내 설명을 들은 크란츠는 조금 감탄한 것 같았다.
물론, 이것만으로 유추해낸 것은 아니다.
‘중부 대장벽에서 그 난리가 났는데, 그 여파가 없을 리 없지.’
큰까마귀 기사단이 지키는 중부 대장벽.
그곳을 습격한 아키몬드 교단의 언데드 떼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장벽을 침공할 언데드를 만들기 위해, 놈들은 중부 설원지대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씨를 말려버렸지.
그 참화를 피해 도망친 몬스터들이 어디로 갔을지 생각한다면, 서부 장벽의 골칫거리가 뭔지는 뻔했다.
- 말인즉, 이것도 그놈들이 싸놓은 똥이라는거군?
‘정답이다 깡통.’
레이븐의 첨언에 답하면서도 난 계속해서 말했다.
“본가가 지방 토호들에게 보내는 최소한의 성의로써, 장벽 외부에 진을 친 몬스터들을 전부 박멸하겠습니다.”
그렇게 내뱉은 내 한마디에, 날 주목하던 이들의 표정이 굳었고.
“일주일 안에.”
이어지는 한 마디에, 좌중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
“……….”
“…뭐, 본가에서 지원병이라도 파견한다는 거냐?”
한참 만에 자이프가 입을 열자, 테린이 그 말을 받았다.
“헛수고다. 어쭙잖은 토벌대라면 오기도 전에 몬스터의 밥이 될 테니….”
“아뇨.”
잠시 뜸을 들인 뒤, 일부러 강조하듯 말했다.
“몬스터떼는 저 혼자 토벌할 겁니다.”
“웃기는 소리!”
곧바로 자이프의 일갈이 들려왔다.
“요새에 있는 전사들을 전부 동원해도 막아내는 것이 고작이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무슨 수로 혼자서…!”
“자이프!”
테린의 목소리가 높아지려는 동생을 만류했다.
“…하지도 못할 일을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역시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목소리에 노기가 서렸다.
“본가는 그런 것도 가르치지 않은 것이냐?”
곧바로 이어지는 꾸짖음.
내가 아닌 본가를 향한 말이었다.
이해는 간다.
열다섯 애송이가 이렇게 말하고 있으면 못 믿는 게 당연할 테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지.
그동안 거쳐온 개 같은 곳들에 비하면, 고작 몬스터쯤이야.
“중부 대장벽에서 벌어진 침공을 막아낸 것이 접니다.”
“…!”
내 한마디에, 뭔가 더 말하려던 테린의 목소리가 멎었다.
“같은 장벽을 지키는 분들이니, 그 전투가 어땠는지는 상상이 되시겠죠.”
그 말에 크란츠 변경백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양옆에 앉은 두 거한이 동시에 그를 만류했다.
“아버지,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오!”
“동감입니다. 저 아이의 성취가 얼마나 되는진 몰라도, 그 많은 몬스터들을 당해낼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하며, 난 크란츠의 두 눈을 마주했다.
“믿어주세요.”
“…!”
“…….”
당부하듯 그렇게 말하자, 자이프와 테린의 얼굴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
…아 잠깐만, 이거 혹시….
“…클레어가 뭔가 일을 저지를 때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역시나.
침중한 크란츠의 한 마디에 무심코 이마를 짚을 뻔했다.
뭐만 하면 어머니 이름이 튀어나오고 지들 멋대로 침울해지니.
맘 편히 얘기도 못 하겠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만약 내 예상이 맞다면, 수락하지 않을 리 없어.’
크란츠 변경백은 날 북서부 장벽으로 초대한 장본인이다.
내 눈에 깃든 힘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과 함께.
그리고 이곳까지 오는 내내 느꼈던, 그 특유의 위화감.
마치 앞으로 벌어질 일을 다 안다는 듯한, 초연한 태도.
그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이자는, 뭔가를 알고 있어.’
모종의 이유로 자식에게도 알리지 않은, 무언가를.
그것이 내 출생에 관한 것이건.
내 힘에 관한 것이건 간에.
‘순순히 머릿속에 있는 걸 털어내게 하려면….’
그렇게 해서, 내 눈에 담긴 힘을 끌어내기 위해선.
‘증명해야 한다. 내 힘이 진짜인지 아닌지.’
그것을 알기에 내뱉은 말.
남은 것은, 그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곧이어서.
“…좋다.”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예상대로, 그는 내 출정을 허락했다.
“아니, 아버지! 그게 뭔…!”
“재고해주십시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곧바로 두 외삼촌의 극렬한 반대가 이어졌지만, 크란츠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클레어 녀석이 저렇게 호언장담한 일 중에, 뜻대로 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느냐?”
“그…!”
“그것은…….”
내 어머니의 이름이 나오자, 반대하던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아니, 뭐야.
저거 한 마디로 그냥 납득해? 진짜?
우리 엄마는 생전에 뭔 미친 짓을 하고 다녔길래?
“출발은 언제쯤이 좋겠느냐?”
두 외삼촌을 조용히 시킨 크란츠 백작이 내게 물었다.
“내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하거라. 채비시킬 터이니.”
그 말에 난 막힘없이 필요한 물품을 줄줄 읊었다.
“야영 장비와 비상식량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도와 방향계도 필요할 테고….”
그렇게 말을 흐린 난, 날 쳐다보고 있는 두 외삼촌을 돌아보며 옅게 웃었다.
‘계속 딴지 걸게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이 두 사람한테는 제대로 각인을 시켜 놔야겠지.’
그렇게 생각한 난, 웃는 낯으로 그들을 향해 말했다.
“호위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동행해주시겠습니까?”
***
다음날.
외가에서 마련해 준 침실에서 일어난 난, 아침 햇살을 만끽하며 기지개를 켰다.
“끄으으으~!”
개운한 아침이었다.
아래층의 화로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열기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
거기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눈내음까지.
“소풍가기 딱 좋은 날씨구만!”
기운 좋게 그렇게 말한 난, 침대 한편에 쌓아둔 배낭을 멘 채 집합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게 다 뭐냐?”
집합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들려온 것은, 자이프의 볼멘소리였다.
“불판에, 숯에, 호밀빵에…. 이건 또 뭐야, 생고기?”
내 가방 안에 들어찬 물건들을 보며 내뱉은 말이었다.
“몬스터랑 싸우러 간다는 거 아니었냐? 심지어 시간도 일주일밖에 없는데.”
“싸우긴 싸워도, 눈 붙일 곳은 있어야 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자이프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난 야영 장비들을 설치하는 데에 전념했다.
“읏, 차아~!”
지지대를 세우고, 줄을 이어 고정시킨 뒤, 잘 무두질 된 가죽을 펼쳐 지붕을 만들었다.
팍-! 팍-!
거기에 물이 잘 빠지도록 물길을 내주고, 보온을 위해 수풀을 깐 뒤, 그 위에 푹신한 모포를 덮는다.
치익-!
마지막으로 가운데에 모닥불을 붙이면, 훌륭한 야영지가 완성.
“허, 솜씨가 제법이군.”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던 테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암, 그럼. 당연하지.
연합군들에게 도망 다니며 치고 접었던 야영지만 몇 개인데.
“솜씨고 나발이고, 이게 뭐여?”
그렇게 자아도취에 빠져있던 사이.
내가 만든 야영지를 본 자이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외쳤다.
“몬스터 토벌은 개뿔, 순 놀고먹을 생각이구만?!”
역시 장벽을 지키는 전사.
내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듯했다.
“경계용 장치도, 냄새를 지울 분비물도, 들짐승을 막을 함정도 없군.”
완성된 야영지를 본 테린은 황망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야영지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야영지 기분을 내기 위해 만들어진, 휴양용 숙소?
아무리 봐도 장기간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이상한 데에서 지 엄마를 꼭 빼닮았네….”
그렇게 말한 자이프는 통나무로 만든 의자에 걸터앉아 내게 말했다.
“이 녀석아, 아버지한테 그렇게 호언장담을 해 놓고, 갑자기 이게 뭐하자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표정에는 묘한 안도감이 있었다.
하나뿐인 조카가 혈혈단신으로 싸우러 가는 것보단, 이게 더 낫다는 판단이겠지.
‘얼마 만에 맞는 휴식시간인데, 이걸 낭비할 순 없지.’
가문의 보호도, 보는 눈도, 심지어 감시하는 스텔라도 아린조차 없는 상황.
정말 오랜만에 해방감을 느끼며, 난 아키몬드 시절의 경험으로 야영을 빙자한 휴양을 준비했다.
“객기를 부리지 않는 것은 다행이다만, 이래선 네가 말한 것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테린이 그렇게 말했지만, 난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한 순간.
철컥. 철컥.
일사불란한 발소리가 온 숲을 울리기 시작했다.
“뭐여, 적이여?!”
“한두 명이 아니다. 왜 눈치채지 못한 거지…!”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
그것을 들은 난 팔짱을 끼며 그들에게 말했다.
“적이 아닙니다.”
내 말이 끝나는 것 함께.
쿵.
내 눈앞에는, 완전무장한 4만 구의 스켈레톤 군대가 도열해 있었다.
“어, 언데드……?”
“이게 다 무슨….”
넓은 공터를 빼곡하게 메꾼 스켈레톤의 군대.
곧이어 그들을 이끌던, 듀란달 기병대가 선두에 서고, 데스나이트인 레이븐과 키예스.
그리고 리치가 나타났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장관이네.’
완전한 상태로, 한자리에 모인 내 언데드 군단.
고위 언데드를 제외한 모든 병력이, 일제히 내 앞에 고개를 숙였다.
어으, 닭살.
앙헬 녀석이 해보자 해서 했는데, 두 번은 못 하겠다.
“장벽 외부의 몬스터들을 토벌할…. 지원병력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