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142화 (142/209)

142. 외갓집

저벅- 저벅-

비교적 도로 사정이 나은 중앙 장벽과는 달리, 서부 장벽으로 향하는 길은 굽이친 산길이었다.

“후우!”

드문드문 눈이 쌓인 산길.

이른 새벽의 찬 공기를 안주 삼아, 나와 크란츠 변경백은 묵묵히 산길을 걷고 있었다.

“잘 걷는구나.”

보는 눈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자신의 영지에 도달했기 때문일까.

한참 만에 내게 말을 거는 크란츠 변경백의 목소리는 한층 거리낌이 없었다.

“장벽에 사는 아이들도 힘들다며 칭얼거리는 고갯길인데 말이지.”

“그동안 원체 걸을 일이 많았으니까요.”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중부 장벽에서 큰까마귀 기사단과 동행할 때는 힘에 부쳐 헥헥거렸으니까.

“다 왔구나.”

그렇게 눈 덮인 산길을 걸은 끝에, 내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익숙한 형상을 한 북부 대장벽.

그리고 그 장벽에 붙어있는 모양의 목책성이었다.

삐이이-!

크란츠의 얼굴을 알아본 보초가 휘파람을 불자, 목책으로 만들어진 문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아버지!”

문이 열리자마자 튀어나온 것은, 크란츠와 같이 곰 가죽을 두른 한 무리의 남자들.

‘아버지라고?’

우르르 몰려든 그들 사이에서 들린 한 마디가 내 관심을 끌었다.

“테린, 자이프.”

크란츠 백작이 그들의 이름을 말하자, 입가를 비튼 두 사람이 팔짱을 끼었다.

한 명은 잘 벼려진 칼날 같은 인상이었고, 다른 한 명은 우락부락한 산적과 같은 인상이었다.

‘큰까마귀들이과는 완전히 딴판이군.’

흉터로 가득한 우람한 팔뚝을 뒤덮은 룬 문신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허리춤에 매여진 도끼는 방금 전에도 사용했던 듯, 시퍼런 예기를 품고 있었다.

“많이 늦으셨습니다.”

“본가 놈들한테 해꼬지라도 당한 건 아닌가 싶었소! 크하하하!”

‘…본가한테 악감정도 꽤 있는 것 같고.’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라인란트 본가는 제국과 방계의 침탈을 막아내기에 급급했고, 그러는 와중에 지역 토호들을 향한 차별은 계속해서 이어져 왔으니까.

북부의 맹주를 자처하는 자가 북부의 인간들을 보호하지 못하니, 본가에 대한 인식 또한 점점 악화된 것이다.

‘그리고 난 지금부터 이런 인간들을 설득해야 하는 거고 말이지.’

앞날이 캄캄하지만 뭐, 어쩌겠나.

제국을 뒤집어엎겠다고 일을 벌였으니, 그만한 성과는 보여야지.

“말했지 않느냐. 상황이 좋지 않았을 뿐, 라인란트는 우릴 버리지 않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변경백인 크란츠가 라인란트와 뜻을 같이한다는 것일까.

“하여튼, 아버지는 그게 문제요!”

크란츠의 말에 우락부락한 인상을 한 남자는 흥! 하며 콧김을 내뿜었다.

“남편 노릇도 제대로 못 하고 남의 집 귀한 딸을 죽인 놈들을, 뭐가 이쁘다고 그리 감싸는 것인지…!”

“자이프, 말을 삼가거라.”

“뭐여, 형님도 아버지 편이오?!”

본가에 대한 악담은 뒤이어 가족 간의 말다툼으로 이어졌다.

‘키 크고 멀쑥한 남자가 테린, 산적처럼 우악스러운 남자가 자이프.’

서로 투닥대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그렇게 생각하던 중.

“두 사람 다, 거기까지 하거라.”

크란츠 변경백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조카 앞에서 계속 추태를 부릴 셈이냐?”

“……!”

“무, 뭐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두 사람의 시선이 날 향했고.

“…….”

“……….”

그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내 얼굴을 응시한 채 굳어있었다.

“인사하거라.”

말없이 날 바라보는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나와 같은 은색 머리에, 푸른 눈.

세월인지, 아니면 본래의 타고난 것인지, 그 빛은 내 것보다는 조금 탁한 색이었다.

‘이들이 내 외삼촌이란 말이지.’

방금 전 대화를 들으며 유추한 사실.

“처음 뵙겠습니다. 숙부님들.”

그것을 상기시키며, 난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클라인이라고 합니다.”

“…!”

“큽……!”

내 한마디에, 두 남자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이를 악문 채 날 보는 것이, 북받쳐 오르는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보였다.

“….”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정적이 이어졌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어머니의, 얼굴도 본 적 없는 외가댁 친척들.

그런 사람들과 만나서,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으니까.

“그렇군요. 이 아이가….”

내가 그들을 본 첫인상이 어색함이라면, 그들이 날 본 첫인상은 어땠을까.

“후우…!”

짧은 턱수염을 한 키 큰 남자, 테린이 말을 흐리며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잔뜩 찌푸려진 저 표정이 어떤 생각을 담고 있을지, 나로서는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네, 네가…….”

그런 반면, 자이프라는 남자는 훨씬 알기 쉬운 반응이었다.

와락!

몸을 낮춘 채, 내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커다란 손.

“으, 으허어어엉-!”

곰의 앞발처럼 두꺼운 손을 내민 자이프는, 이윽고 내 어깨를 끌어안은 채 오열하기 시작했다.

“너무, 너무 닮았어! 클레어 녀석과 판박이잖아! 흐어어어-!”

우는 건지, 포효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괴성이 성 곳곳에 울려 퍼졌다.

“저기,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말을 흐리면서도 이곳을 보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클레어 아가씨의 아드님이라고?!”

“정말이다, 아가씨와 판박이야…….”

누군가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누군가는 옷깃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인망이 꽤 두터웠나 본데.’

클레어 공후는 날 낳은 직후 숨을 거뒀다고 했으니, 15년 전의 일일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런 반응이라니.

이곳 사람들에게 있어 내 존재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 같았다.

***

“크, 클레어 아가씨의 아드님이라구요?!”

크란츠 변경백의 말을 전해 들은 하녀장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어, 어서 안으로 모셔라! 어서!”

“오늘 들어온 게 뭐가 있었지? 이, 일단 아무거나 내와! 전부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것인지, 곳곳에 있던 하녀들이 분주하게 집안 곳곳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뭐 그리 귀한 손님 왔다고 호들갑인지….’

하녀들의 안내에 따라 식당으로 가면서도, 난 저택 곳곳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성채 내부, 크란츠 변경백의 거처.

3층 구조의 커다란 목조저택은 라인란트와도, 다른 귀족 가문의 저택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촛불 대신에 횃불.

카펫 대신 산짐승들의 가죽.

검과 방패 대신 도끼와 건틀릿.

그렇지만, 이 모든 이국적인 광경은, 이후 내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비하면 빛을 잃어버렸다.

“…….”

그래.

도무지 끝이 보이지가 않는, 이 음식들에 비하면.

- 환영 행사 한번 성대하게 하는구만.

- 심지어 식기는 한 사람 것밖에 없네. 이거 다 자네 먹으라고 준 거 같은데?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저기, 이거 설마….”

앙헬의 말을 애써 부정하면서, 난 내 옆에서 고기를 썰고 있는 하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급하게 준비하느라 이것밖에 준비를 못 했네요.”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은 하녀장이 날 향해 고개를 숙이자, 내 한쪽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건가?

밖에?

밖에라고?

“자, 우선 이것부터 좀 드시고.”

“아니, 그냥 두시면 제가 알아서 먹, 으읍?!”

정성스럽게 준비된 샌드위치가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먹고 간식도 있으니까, 모자라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알았죠?!”

“으읍? 으으읍-!”

입안 가득 들어찬 빵을 우물거리면서도 난 애써 고개를 저어 보였다.

환영해주는 건 괜찮은데, 이건 좀 도가 지나치잖아?

“푸하!”

입안에 들어찬 빵을 대충 넘긴 다음,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아니, 진짜 괜찮습니다!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먹…! 으읍?!”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잘 요리된 사슴고기가 뭐라 더 항변하려던 입을 통째로 틀어막았다.

틀렷다.

이 인간들, 도무지 말을 들어 처먹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여기선 그렇게 점잔 안 부리셔도 돼요! 아가씨는 평소에 이거의 두 배는 더 드셨는데!”

평소에 이거의 두 배를 먹었다고?

내 어머니는 사람이 아니라 무슨 오우거였냐?

“얼굴이 반쪽이 되셨어요. 아주!”

“그러게. 본가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으면…!”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지?

당신들 나 처음 보는 거 아니었어?

그렇게 끝날 줄 모르던 음식 세례가 얼마나 더 이어졌을까.

“그만들 하시게. 더 하다간 애 잡겠군.”

끝날 줄 모르던 이 광란의 식고문은, 날 찾아온 두 외삼촌들의 제지 덕에 간신히 막을 내릴 수 있었다.

“흐하하하! 보기보다 입이 짧은 녀석이었구만!”

호탕하게 웃는 자이프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테린이 내게로 다가왔다.

“이해해라. 오랜만의 손님이라서 다들 당황하고 있는 것이니까.”

무뚝뚝한 목소리와 함께 그가 건넨 컵에는 얼음을 갈아 넣은 산딸기즙이 담겨있었다.

“지금 전 이거 들어갈 자리도 없는데요.”

“그러니까 준 것이다. 마셔보거라.”

그래, 마셔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나.

속는 셈 치고 과즙을 한 모금 들이키자.

“오오.”

더부룩한 속이 한껏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여태까지 이곳에서 받은 음식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물건이었다.

“어머니께서 이거에 두 배를 드셨다고요…?”

“자이프 녀석이나 클레어가 좀…. 특출났지. 여기 사람들이 다 저렇진 않아.”

그 사이 식탁으로 덤벼든 자이프를 보며 테린이 말했다.

‘그러니까, 다 먹긴 먹었다는 거네.’

초상화로 본 클레어 공후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수려한 외모의 프리실라 공후와는 반대로, 단아하고 선한 인상을 지녔던 여인.

근데 그 고향 사람들은 문신에 도끼에, 어머니 본인도 이들과 부대끼며 놀았다니.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본가의 소식은 익히 들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내 옆에 앉은 테린이 넌지시 말했다.

“방계와의 내전에서 네 역할이 굉장히 컸더구나.”

“예.”

딱히 부정하진 않았다.

내 덕에 이긴 건 사실이니까.

그러자 테린은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여기 온 것이고.”

그렇게 말하자 식사에 열중하던 자이프가 끼어들었다.

“하! 이제 와서 애를 내세우는 꼴이라니!”

그렇게 내뱉은 자이프의 목소리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장벽에서 몬스터떼가 밀고 들어올 때, 그치들은 어디서 뭘 했단 말이우?! 엉?!”

“자이프….”

상석에 앉은 크란츠 백작이 만류했지만, 그는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놈의 내전, 그놈의 집안싸움!”

“…….”

“그래놓고 이제 와서 한다는 말이, 북부를 독립시킬 테니 협력해라?! 지나가던 개가 웃지!”

그의 일갈에 새삼 한숨이 나왔다.

‘다른 부족들을 만나기 전에, 우선 이 사람들부터 설득해야 한단 말이지….’

유스티아 영지는 중립을 표한 지방 토호들 중, 본가에게 가장 호의적인 세력이었다.

그런 곳에서도 이런 말이 나올 정도면, 다른 토호들의 생각이 어떨지는 불 보듯 뻔했으니까.

“자이프 녀석이 거칠게 말하긴 했다만, 본가에 대한 생각은 나도 다르지 않다.”

테린은 자이프의 말을 제지하는 대신, 날 바라보며 말했다.

“라인란트의 혼란이 끝난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인정한 것은 아니야.”

양껏 발산하는 울화가 아닌, 깊이 정제된 분노.

내겐 자이프 보다도, 이자를 설득하는 것이 훨씬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내가 한 대답에,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의 시선이 날 향했다.

“그렇기에 라인란트는, 방계를 척결함으로써 여러분들에게 증명한 것이죠.”

“…증명한다니?”

그렇게 묻는 테린의 말에 난 덤덤하게 답했다.

“라인란트는 제국에 굴복하지도, 그들에게 무릎 꿇지도 않았다는 것을.”

자신들을 외면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난 한 가지를 더 덧붙혔다.

“그리고 이젠, 여러분들에게 직접 증명할 겁니다.”

그들은 날 지켰다.

그러니 이젠, 내가 그들을 지킬 차례다.

단순히 그뿐이다.

“라인란트가, 북부의 맹주가 될 것이라는 것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