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지켜냈습니다
“정말로 제가 안 따라가도 돼요?”
“예. 여기서 얌전히 일이나 배우고 있어요.”
항상 누군가와 동행했던 지난번과는 달리, 서부 장벽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
“치이, 나도 가고 싶은데.”
“이번만큼은 안돼.”
입술을 비쭉 내민 아린의 머리를 토닥거리는 사이, 나와 크란츠 변경백을 태울 마차가 저택 정문 앞에 들어섰다.
푸르륵-!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익숙한 모양의 마차.
순례길에서 타고 다녔던 라인란트 가문의 마차였다.
“으엑, 저 마차….”
“같이 갈 생각이 싹 사라지죠?”
순례길에서 하루 종일 시달린 기억 탓인지, 마차를 보는 스텔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나야 뭐, 허구한 날 타고 다녔으니 진작에 적응했지만.
“귀족들은 다 타고 다니길래 얼마나 편한가 했는데, 그렇지만도 않네.”
스텔라가 라인란트의 문양으로 장식된 마차를 보며 툴툴대자, 마차 지붕에서 뛰어내린 에일린이 피식 웃었다.
“다른 귀족 가문들이 쓰는 마차는 훨씬 편할 겁니다. 이렇게까지 덜컹거리지는 않아요.”
“엥? 그런 거야?”
나조차도 금시초문인 한마디에 에일린을 돌아보았다.
모르는 게 당연하지.
평생 타본 마차가 우리 집 마차뿐인데.
“라인란트 가문의 모든 마차는 유사시 군용으로 사용 가능하도록 맞춤 제작됩니다.”
그렇게 말한 에일린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마차 벽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텅-! 텅-!
“와우….”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아닌 묵직한 쇳소리.
그것을 들으며, 난 원초의 화로에 도달하기 전 있었던 습격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그러네.”
이단심문관들은 도망치는 우릴 잡기 위해 온갖 무기들을 휘둘러댔었다.
비수, 철퇴, 신성력이 가득 담긴 망치에 쇠뇌….
그런 공격들을 전부 버틴 것도 모자라, 플리시안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바퀴 한 번 빠진 적이 없다고?
…그럼 그건 마차가 아니라 전차잖아?
‘공작가의 일원이 타는 마차까지 군용으로 제작한다니….’
아무리 기사 가문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쯤 되면 전쟁에 미친 놈들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외출이냐?”
날 배웅하기 위해 나온 델라인이 내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집에 좀 붙어 있어 봐. 요새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내가 일이 좀 많아야지.”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저택 곳곳을 둘러보았다.
돌아온 라인란트 저택은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이었지만, 곳곳을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분주해 보였다.
“행정관들이 꽤 바빠 보이네.”
“아, 그거?”
내 말에 델라인이 씨익 웃었다.
“부켄하임 성이 함락됐잖아? 그 뒷정리 때문에 난리야.”
부켄하임.
그 말을 듣자 가문을 떠나기 전에 해둔 일이 생각났다.
부켄하임 백작.
그가 암투로 살해했던 형의 영혼을 끄집어내어, 빙의시켜줬었지.
“백작은 어떻게 됐지?”
“당연히 처형됐지.”
델라인의 대답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원한 것은 방계의 붕괴.
그가 원한 것은 자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
하인켈의 검에 동생의 목을 내어줌으로써 방계세력은 붕괴하고, 그의 가문은 멸문했으니.
이것으로 망자와의 거래는 성사되었다.
‘어지간히도 한이 깊었나 보네.’
적의 수괴를 포섭했으니 이기는 건 당연한데, 이렇게까지 빨리 끝날은 몰랐다.
내가 크리펠 이단교화소로 떠난 지 3개월이 채 되지 않는데, 벌써 방계세력을 전부 붕괴시킬 줄이야.
“몰수한 자산과 토지 운영 때문에 행정관들이 난리가 났어. 지금부터 3주 정도는 꼼짝없이 야근이라면서.”
“그래, 자알~ 보이네.”
언데드처럼 비척거리는 행정관들의 면면을 보니 동질감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옛날 생각 나는구만.’
윈터폴 왕성에서 일할 때의 내가 딱 저 모양이었지.
일정은 촉박하고, 마감은 코앞이고, 일은 안 풀리고.
기사들은 누가 언데드고 누가 네크로맨서인지 구분도 안 간다면서 놀려대고.
“어우, 이 송장들은 뭐야? 둘째 도련님이 소환하신 건 줄 알았네.”
맞아. 딱 저런 식이었다.
“이 망할 근육뇌들이 어디다 대고 악담이야?!”
“니들이 싸운 거 뒤처리하느라 이렇게 된 거 아니야!”
거기에 대응하는 나랑 선배들도 딱 저런 식이었고.
“너무 일찍 떠나시는 것 같습니다.”
나와 델라인이 그러는 사이, 마차로 걸어가는 크란츠를 향해 말한 것은 하인켈이었다.
“괘념치 마십시오, 전하.”
그렇지만 크란츠는 하인켈에게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했다.
“제가 이렇게 찾아올 수 있는 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입니다.”
“….”
맞는 말이기는 하지.
예전 같았으면 이 자가 본가에 오는 건 상상조차 못 할 일이니까.
크란츠 변경백.
제국에게 있어 그와 같은 토호들은, 그들이 멸시해 마지않는 이민족과 다를 바 없었다.
백작의 지위를 가졌다 한들, 제국이 그들을 귀족으로 인정할 리 없지.
‘제국인과 비제국인을 구별하면서, 북부와 제국을 차별해왔다.’
그 차별정책을 수용하고, 그 수혜를 입어왔던 것이 라인란트의 방계.
제국의 황금과 자원을 등에 업은 그들은, 기꺼이 제국의 사냥개를 자처하며 본가를 시시각각 옥죄어왔었다.
제국은 그것을 뒷짐 지고 구경만 하고 있으면 됐으니.
얼마나 편한 장사였을까.
‘그렇지만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본가가 라인란트 내부를 완전히 장악한 지금, 가문에 내 출생과 클레어 공후를 음해할 이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시점에, 본가의 일원인 내가, 서부 장벽을 방문한다.’
생각을 마친 난 결론지었다.
내가 장벽으로 가는 이유는, 눈에 담긴 힘의 비밀을 푸는 것뿐만이 아니다.
라인란트 북서부에서 장벽을 지키는 토호들.
그들을 만나, 본가와 함께하도록 설득해야 했다.
“설득이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대표인 크란츠 백작의 말에 하인켈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방계의 농간이었다고는 하나, 라인란트 본가가 북서부 장벽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 또한 사실.
이제 와서 협조를 요청한다 한들, 달가워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북서부의 토호들을 만나는 자리에 하인켈이 아닌 내가 가는 것 또한 그런 이유.
내 몸에 흐르고 있는 클레어 공후의 피가 일종의 면죄부가 된 셈이었다.
‘책임이 무겁구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하인켈은 나와 크란츠 백작의 얼굴을 보며 탄식했다.
“전에도 말했듯, 방계를 척결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말한 하인켈이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만, 다른 후회는 있지요.”
분노로 쥐어진 주먹이 점점 힘을 더해갔다.
“만일, 제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어땠을까, 조금 더 빨리 그들의 목적을 알아채고, 더 빨리 그들을 대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후회.”
크란츠의 눈이 깊어질수록, 하인켈의 목소리에도 감정이 섞였다.
아무래도 내가 옆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 수많은 영지민들이 희생될 일은 없었을 겁니다.”
말을 흐린 하인켈이 다음 한 마디를 입에 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만약 그랬다면, 클레어도……!”
내 어머니, 클레어 공후의 이름이 나오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의 얼굴이 숙연해졌다.
고해하듯 입을 여는 하인켈.
“…….”
그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보며, 크란츠는 차분히 눈을 내리깔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났을까.
“목이 타는군요.”
천천히 입을 연 크란츠 백작은 정중한 태도로 하인에게 물 한잔을 부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투명한 유리잔에 물이 담겨 나왔고, 크란츠 변경백을 그것을 잡아 하인켈의 앞에 가져갔다.
“이것을 보십시오, 전하.”
유리잔에 가득 차오른 물이 찰랑이며 자그마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 잔에 든 물이, 현재입니다.”
그렇게 말한 크란츠는 유리잔을 들어, 안에 든 물을 서재 바닥으로 흘려보냈다.
주르르르….
얇은 물줄기를 그리며 떨어진 물은 바닥에 스며들어 작은 자국을 만들어냈다.
“과거란, 잔에서 흘러넘친 물과 같지요”
그렇게 말한 크란츠 변경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쏟아버린 이상 마실 수도,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이, 바닥에 스며든 물은 점점 그 흔적을 지워가기 시작했다.
“흘려버린 물의 흔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고, 종국엔 그 흔적만이 겨우 남게 됩니다.”
흘려버린 물.
돌이킬 수 없는 과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하지만 이 잔에 든 물은 그렇지 않지요.”
“…….”
그렇게 말한 크란츠 변경백은 잔에 든 물을 마신 뒤 하인에게 빈 잔을 건넸다.
“이미 흘러간 것에 연연하기보다는, 수중에 남아있는 것을 살피십시오.”
“…….”
“그 아이도, 그것을 바랄 것입니다.”
희미한 물자국.
그리고 찻잔에 남아있는 물.
그것을 번갈아 본 하인켈의 어깨가 떨렸다.
“…지키지 못했습니다.”
“…….”
그렇게 내뱉는 하인켈은, 필사적으로 뭔가를 참는 듯했다.
“어떤 곤경이 찾아와도, 지키겠다 맹세했는데…!”
그동안 보인 적 없는 하인켈의 동요.
젊은 기사들은 당황했고, 나이가 지긋한 이들은 고개를 돌린 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 어머니인 클레어 공후가 이 가문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 수 있는 광경.
그렇지만 그들의 후회를 바라보는 난….
‘또 궁상떨기 시작했네.’
솔직히, 별 감흥 없었다.
근데,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
“후우….”
이어지는 침울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난 참다못해 한 마디 내뱉었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세요, 아버지.”
루델과의 마지막 만남.
내가 그때를 언급하자 하인켈의 시선이 날 향했다.
“실패를 후회하며 그 뒤에 남겨진 것들을 외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실패한 것입니다.”
“……!”
내 말을 들은 하인켈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클라인 도련님….”
주변에 있던 기사들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뭐야, 주제넘은 발언이다 이건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난 말 없이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주제넘으면 뭐 어쩔 거야?
적어도 하루 종일 이런 식으로 궁상떠는 것보단 낫겠지!
“이 아이의 말이 맞습니다.”
내 어깨에 손을 얹은 크란츠 변경백이 덧붙였다.
“그리고, 전하께선 훌륭히 지켜내시지 않으셨습니까?”
“……?”
단호하다고 느껴질 만큼 분명한 목소리.
크란츠의 그 말에, 하인켈의 눈이 커졌다.
“클레어가 남긴 씨앗을, 지금까지 지켜주셨으니까요.”
그 말에 하인켈은 푹 고개를 숙였다.
슬퍼하는 하인켈과 그를 위로하는 크란츠.
내 눈에 보이는 그 모습은 뭐랄까….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좀…. 지나치게 침착한데.’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은 것은 딸 잃은 아버지와 아내를 잃은 남편.
그렇지만 딸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크란츠 변경백은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보아하니 이 인간이 라인란트 저택에 찾아온 것도 처음인 것 같은데.
원래는 내 딸 살려내라며 난리라도 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씨앗은 또 뭔 소리야?
“시간이 되었군요.”
그렇게 의문이 이어지던 사이, 나와 크란츠 변경백을 태운 마차는 라인란트 저택을 나섰다.
포장된 길은 앞으로 이틀 정도.
그 뒤에는 굽이굽이 산길을 걸어야 하니, 딱 봐도 고생길이 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