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결심
라인란트 공작가 저택, 하인켈의 서재.
나긋한 점심 햇빛이 창문을 통해 공간을 비추자, 무미건조한 서재는 포근한 찻집과 같은 분위기가 되어있었다.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정확히 햇빛이 들어오는 배려.
군사용 요새와도 같은 라인란트 저택에선 보기 드문 섬세한 설계였다.
전혀 새롭지도 않은 하인켈의 서재를 이렇게까지 공들여 묘사하는 이유가 뭘까?
뭐긴 뭐겠냐.
이거 말고는 도저히 할 일이 없어서지!
딸깍.
후룩-
“….”
“…….”
소파에 앉아 차를 홀짝이는 크란츠 백작과 맞은 편에 앉아 초조한 눈으로 그를 보는 하인켈.
그리고 그 중간에 어중간하게 껴있는 나까지.
보고 있는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미치겠네, 진짜.’
두 시간은 지났나 싶어 시계를 흘끔거리니, 이제 2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건가?
“들어오는 길에 기사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사이, 한참 만에 입을 연 것은 내 외조부, 크란츠 변경백이었다.
“큰일을 마치고 돌아온 탓인지, 다들 기세가 훌륭하더군요.”
크란츠 백작이 오고 있다는 것을 보고한 기사는 없었다.
가문 곳곳에 깔린 기사들을 전부 따돌리면서, 그들의 안색까지 살폈다는 뜻.
이 노인 역시 보통내기가 아닌 듯 보였다.
“…방계와의 질긴 악연이, 드디어 끝났으니까요.”
한참 만에 그렇게 말한 하인켈의 얼굴은 상반된 감정을 품고 있었다.
후련한 듯, 씁쓸한 듯.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그리 밝은 얼굴은 아니시군요.”
그 기색을 알아챈 크란츠 백작이 말하자, 하인켈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하십니까?”
본래 하인켈은 방계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제국에 영합했다 한들, 그들 또한 라인란트의 일부,
그렇게 생각하며, 최대한 대화를 이끌어가고자 했던 것이다.
적어도, 성혈의 존재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아뇨, 후회하지 않습니다.”
방계가 행한 일들을 목도한 하인켈의 목소리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그들은 북부 귀족으로서, 최소한의 도리조차 저버리고 말았으니까요.”
방계의 행동은 선을 넘었다.
영지 곳곳에 네크로맨서의 실험장을 만들고, 그곳에 북부인들을 밀어 넣어 성혈 연구의 재료로 삼았지.
용서를 할 수도, 해서도 안 될 악행.
그렇기에 전쟁 내내, 하인켈은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방계가 라인란트의 땅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했는지를 떠올리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배후에서 사주한 것이…. 제국입니다.”
“…….”
부켄하임 백작의 정보는 광범위했다.
그들이 방계를 후원하는 대가로 무엇을 요구했는지.
무슨 짓을 자행했는지.
하인켈은 이미 그 모든 것들을 파악한 상태였다.
“하찮은 실험을 위한 재료를 얻고, 종국에는 북부 전체를 차지하기 위함이죠.”
침중한 얼굴로 경청하는 크란츠 변경백을 향해, 하인켈은 다짐하듯 힘주어 말했다.
“그렇지만, 이젠 아닙니다.”
꽉 쥐어진 하인켈의 주먹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
“북부는 더 이상, 제국에게 휘둘리지 않을 겁니다. 그들의 뜻대로 놀아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평이하던 목소리가 점차 빨라질수록, 그곳에 담긴 감정 또한 격해졌다.
”제국은 지금까지 행한 악행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
하인켈의 말에 크란츠 변경백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에게 대가를 치르게 한다.
하인켈의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반역.
제국의 공작이, 제국을 향해 칼을 겨누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발언이었다.
“제국을 칠 생각이십니까?”
“예.”
그렇게 묻는 크란츠 변경백을 향해, 하인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에는요?”
그의 발언에 한치 놀라는 기색도 없이, 크란츠는 하인켈을 향해 되물었다.
“제국을 친 다음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거침없이 이어지는 크란츠 변경백의 질문에 하인켈의 눈썹이 움찔했다.
“제국의 영토를 빼앗으십니까? 새 황제를 세우려 하십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렇게 잠시 말을 고른 크란츠 변경백이, 하인켈에게 말했다.
“전하께서, 직접 황위에 오르실 생각이십니까?”
“……!”
직설적인 한 마디.
하인켈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언제 말을 꺼낼까 생각했는데, 타이밍 참 기가 막히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기회였지만.
“폴와이번과 아일라시스에서 확답이 왔습니다.”
그렇게 말한 난 하인켈을 향해 말했다.
“제국의 3개 공작가는 동맹을 구축하여 제국을 향해 진군할 것이고, 그 동맹의 중심은 라인란트가 될 것입니다.”
내 최종계획은 라인란트를 왕가로 만드는 것.
그것을 위한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라인란트 공작의 결정뿐이죠.”
방계를 척결했다.
그들을 후원하던 제국의 세력도 몰아냈고, 그들이 뱉어낸 재산으로 공작가의 곳간도 채웠다.
함께 제국을 칠 아군도, 전쟁을 위한 명분도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제국의 공작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 족쇄를 풀고 홀로 설 것인가.”
그렇지만 이 모든 걸 준비했음에도, 라인란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다.
그들의 운명을, 내가 결정해서는 안 된다.
“선택하셔야 합니다. 아버지.”
선택을 하는 것도, 그 책임을 지는 것도 자기 자신.
의지 없는 왕을 억지로 왕좌에 앉힌다면, 지금의 황제보다도 더한 암군이 탄생할 뿐이었으니까.
“…….”
내 말을 들은 하인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겠지.’
라인란트로 모이는 재원, 양측 공작가에서 들려오는 소식.
그 정보의 중심에 있는 하인켈이, 내 계획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제국 황제 페트리우스는, 제국의 군주로서 해선 안 되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렇게 말한 하인켈의 시선이 크란츠를 향했다.
“이에 라인란트는 현 황제의 죄목을 온 세상에 알리고, 그 죄를 물어 황좌에서 폐할 것입니다.”
제국과 싸우겠다는 선언.
거기에 그치지 않은 채, 하인켈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이에 더불어, 제국은 이미 대륙을 보호한다는 멜디르 대제의 대의를 져버린바.”
멜디르에게 대의라니.
순간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 시간부로 라인란트는, 멜디르 제국을 대륙의 보호자로 인정하지 않으며.”
이윽고 잠기 말을 멈춘 하인켈은, 크란츠와 나, 그리고 등 뒤에 선 버크만에게 들리도록 또박또박 말했다.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것입니다.”
***
“그래, 네가 클라인이로구나.”
“……?”
하인켈의 서재에서 나오는 길.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모습에, 내 표정은 더욱 괴상해졌다.
“조만간 나와 함께, 서부 장벽으로 가줬으면 한다.”
“……서부 장벽이요?”
뜬금없는 한 마디에, 내 눈이 가늘어졌다.
서부 장벽.
라인란트 이전부터 그 땅을 관리하던 지방 토호들에게 변경백의 작위를 주어 관리토록 한 영역.
외부인의 출입을 극도로 꺼리는 그곳은, 라인란트의 영지이되 라인란트의 땅이 아니었다.
“갑자기 제게 왜….”
“네 눈이 아직 다 뜨이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다.”
내 물음을 끊고 들어온 크란츠 백작의 짧은 한마디.
그 말에 난 잠시 말없이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처음 환생한 이후 지금까지, 미지의 영역으로만 남아있던 힘.
그런데, 그가 이 힘을 알고 있다고?
아니, 그보다 방금…?
“…잠깐만요.”
클란츠가 뭔가 더 말하려던 순간.
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가로챈 뒤 물었다.
“처음 만나고부터 지금까지, 전 제 이름을 알려드린 적이 없습니다.”
“…….”
그렇게 말하는 내 말에, 날 보는 크란츠의 시선이 달라졌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제 이름을 알고 계시는거죠?”
내 질문에 그의 얼굴에 띈 감정이 점점 변해갔다.
“하하하.”
의외, 흥미, 그리고 환희.
“아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그렇게 말한 크란츠 백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클레어는 네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네 이름을 속삭이고 있었으니까.”
그 말에, 난 아무 말 없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푸른 빛을 내는 크란츠 백작의 눈.
그곳에서 발하는 광채는 내 것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
휘오오오오…….
주인 잃은 얼음성 중심부.
싸움을 마친 기사들은 모포를 덮은 채 다 떨어져 가는 체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
유일하게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는 기사는 단 한 명.
북부 왕국, 윈터폴 최후의 기사.
베르켈 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될 것 같아?”
붉은 머리의 기사가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붉은 수레바퀴의 인장을 지닌 기사, 로드릭이었다.
“교단의 지시는 깡그리 무시하고, 감시역으로 동행한 놈들도 없애버렸는데.”
입에 담은 말의 내용과는 달리, 그의 말투는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다는 듯, 통쾌한 표정.
그런 그의 시선 끝에는, 산산조각난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신관이 입는 검은 신부복 차림의 남자 한 명.
그리고 마탑의 마법사들이 입는 로브 차림의 남자가 두 명.
그리고 미스릴과 고위 마법이 부여된 갑옷 차림의 기사가 세 명.
그들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은 그들을 이곳까지 이끈 기사, 베르켈이었다.
“아칸 그 새끼야 뭐, 죽을 때까지 마탑에 처박힐 테니 상관없지 않아?”
“나머지 둘이 문제지. 특히 멜디르.”
“풉, 그 겁쟁이 새끼?”
대륙을 지배하는 절대자 셋.
제국 황제, 멜디르.
대마법사, 아칸.
교황, 프라한.
그 고고한 이름들을 입에 담았음에도, 기사들의 말투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슬슬 땅굴에서 기어 나왔겠지. 어떻게 우리 공적을 가져갈지 골머리 싸고 있을걸?”
“큭큭큭, 개 같은 위정자 새끼들.”
쓰게 웃으며 농을 주고받는 기사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성공할 거다.”
그들의 말에 답하는 베르켈의 표정은 착잡했다.
“북부를 얻어내고, 아키몬드를 멈추는 것.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일 테니.”
그렇게 말한 베르켈의 허리춤에는, 두 자루의 검이 꽃혀있었다.
교단이 그에게 양도한 세 개의 성법기 중 하나.
성검, 바리사다.
그리고, 이 전투를 위해 준비한 윈터폴의 검.
노르드빈트.
“그리고 그것도, 언제 뺏길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고 말이죠?”
그렇게 말한 로드릭이 피식하고 바람 소리를 냈다.
“젠장, 손해 보는 장사구만.”
“적어도 놈들에게 대항할 방법은 생겼지. 헛된 일은 아니야.”
그렇게 말한 것은 2미터는 족히 넘는 검은 방패를 든 거한, 데릭이었다.
“내 말 맞죠, 대장?”
그렇게 말하자, 베르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이걸로 아키몬드의 폭주, 그리고 제국의 계획을 전부 막아낼 수 있는 길이 생겼지.”
“반대로, 두 가지를 전부 성공시켜서 대륙을 끝장낼 수도 있고 말이지.”
그렇게 말한 붉은수레의 기사, 로드릭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대장은 정말로 그 자식을 믿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시선은 베르켈의 허리춤에 채워진 노르드빈트를 향해있었다.
“아무리 대안이 없다고는 해도, 이 난장판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런 녀석이….”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야.”
그렇게 말한 베르켈이었지만, 로드릭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치, 두고 보십쇼! 제 후대의 후대까지 시켜서, 아주 철통같이 감시할 테니까!”
“그것참 든든하군.”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농담을 잊지 않는 기사들을 보며, 베르켈이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말한 베르켈의 시선은, 자신들을 철통같이 감싼 얼음성을 향해있었다.
“이 성은 본래…. 이런 참극을 일으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