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139화 (139/209)

139. 외할아버지요?

“…….”

잠이 덜 깬 몽롱한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몇 달 만에 돌아온 내 방, 방 한구석에 쌓여있는 책들과 필기구.

거기에 북부 지역 특유의 찬공기를 곁들이니, 이제서야 집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 이라.”

이젠 완전히 여기가 집이라고 생각하는구나.

날 죽인 원수의 가문을 말이지.

씁쓸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델라인과 가시들이 ‘그간 성장한 실력을 확인하겠다!’ 라면서 나오라고 난리였으니까.

“쉴 틈이 없네 쉴 틈이….”

그렇게 중얼거린 난 수련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옷장 문을 열었고.

“아, 일어났어요?”

옷장 안에 스텔라가 들어있었다.

……잠깐만.

어디에 누가 들어있다고?

“…스텔라?”

“네. 저 맞는데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고 있는 나와,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수녀.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난 스텔라에게 물었다.

“뭐합니까?”

“밀착 경호요.”

“사생활 침해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아!”

‘아!’는 얼어 죽을!

옷장 안에서 스텔라를 끄집어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던 때였다.

똑똑.

“!”

방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스텔라의 어깨가 흠칫, 하고 떨렸다.

“클라인 도련님.”

방 문을 열고 아버지의 집사장인 버크만이 들어왔다.

예법과 격식이 사람이 된다면 저렇지 않을까 싶은 모습.

그의 시선은 아까부터 바짝 굳어있던 스텔라를 향해있었다.

“아, 스텔라 수녀님. 역시 여기 계셨군요.”

“히끅?!”

스텔라를 보며 그렇게 말하는 버크만과 화들짝 놀라는 스텔라의 모습.

그것을 번갈아 본 난 그제서야 무슨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일 배우기 싫다고 도망나왔구만.’

내 방이면 집사장도 함부로 못 올 거라고 생각했나 보지?

하하! 안타깝구만!

이 집안에서 내 서열은 최하위!

개리슨도 내 방에 들어올 땐 노크 한 번 안 했거든!

…새삼 생각하니 빡치는데, 어쨌든.

“개리슨 신부님이 교국으로 돌아가셔서 사무관들이 힘들어했었는데,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우선….”

“자, 잠깐만요!”

두 손을 들어 버크만의 말을 막은 스텔라가 애절하게 항변해보았다.

“저, 전 이제 교단에서도 반쯤 버림받은 몸이고, 교단에 관련된 일은 불가능한데….”

“이미 도련님께 전해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버크만은 이미 예상한 듯, 거침없이 말했다.

“그러니 기본적인 행정 사무보조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가도록 하죠.”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우리 가문 철칙 중 하나였다.

“저, 전 수녀인데, 왜 서류를…?”

“개리슨 신부께서도 하시던 일이었으니까요.”

무슨 헛소리냐며 스텔라가 날 돌아보았다.

“아버지가 왜 라인란트의 행정업무를 해요? 전속신관은 공자님 보호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요?”

허허, 이 사람 좀 보게.

세상일이 그리 편하게 흘러갈 줄 알았나?

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교단에 정기 보고하는 걸 제외하면 전부 우리 쪽 일이었어요.”

“엑….”

“게다가 그 인간, 겁나 잘했고요.”

이 말은 진심이었다.

얼마나 일을 잘하면 사무관 몇몇이 케르시아스 교단으로 개종까지 했다니까?

신관이 아니라 행정관을 했으면 대성했을 인간이었다.

“자,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하루빨리 현장에 합류하셔서 밥값을 하셔야죠.”

정중하게 그렇게 말한 버크만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저 집사장이 미소를 지었다는 건.

찍혀도 제대로 찍혔다는 뜻이지.

“우, 우으으……!”

스텔라가 앓는 소리를 냈지만, 애석하게도 저 집사는 그런 게 먹힐 사람이 아니다.

“또 도망 오면 진짜 내쫓을 겁니다~”

버크만에게 끌려가는 스텔라를 보며 그렇게 말한 것도 잠시.

난 서둘러 목검을 챙겨 연무장으로 향했다.

***

카카카칵-!

델라인의 검을 옆으로 흘리는 동시에 발을 위로 차올렸다.

“크윽?!”

마력을 배제한 채 이뤄지는 순수한 기량 승부.

예상치 못한 경로에서 공격이 들어오자, 델라인의 기세가 주춤했다.

‘기회다!’

검로가 흔들린 그 잠깐의 틈.

그 틈을 파고든 난, 곧바로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정면 경로에 위치한 내 모습.

델라인 역시 기회라 생각한 듯, 내 어깻죽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마력이 없다 한들, 델라인의 완력이라면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

흘려낸다고 해도 검이 날아갈 테니, 내 패배는 자명한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촤륵-!

땅을 차올려 공중에 뛰어오른 뒤, 왼 다리로 델라인의 목을 감아 축을 뒤흔들었다.

“뭣?!”

검을 휘두르던 어깨에 내 체중이 더해지자, 델라인의 자세가 한순간 휘청거리고, 공중에 떠오른 내 검은 델라인의 목을 찔러 들어가고 있었다.

크리펠 이단심문소에서 미친개를 잡을 때 썼던 창술, 오르간의 응용이었다.

“크으!”

그렇지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델라인은 그 멍청한 놈보다는 몇 수나 더 위에 있다는 것 정도일까.

콰콱-!

건틀렛을 낀 델라인의 손이 내 목검을 잡았다.

두어 번의 찌르기를 피해내더니, 그 사이에 다음 수를 예상한 모양이었다.

씨익-

“…?”

날 보며 이를 드러내며 웃는 델라인의 모습.

거기에 의문을 느낀 것도 잠시.

“흐아아압-!”

델라인은 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준 뒤, 그것을 그대로 땅을 향해 휘둘렀다.

“야이, 미친?!”

이 경우는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어떻게 공중에 뜬 사람을 한 손에 들고 휘두르지?

저거 사실 마력 쓰고 있는 거 아니야?!

후웅-!

델라인이 던진 경로로 날아가는 와중에도 난 서둘러 자세를 바로잡았다.

역시, 델라인은 날아가는 날 따라오듯 돌진하며 검을 세우고 있었다.

공중에 체공해있는 동안에는 회피 불가능.

이대로 찔러 들어간다면, 델라인의 승리였다.

“이걸로!”

“아직 안 끝났어!”

그렇지만 그 순간.

키리리릭-!

난 거꾸로 뒤집힌 상태에서 델라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곧은 직선을 그리는 델라인의 찌르기를 아래로 내려치는 구도.

카아아앙-!

서로 부딪힌 목검에서 불꽃이 튀고, 난 공중에서 두 바퀴 정도를 돈 뒤 바닥에 착지했다.

“하아…. 하아…!”

“후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와 델라인.

그것을 보던 기사들의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저게, 클라인 도련님이라고?”

“델라인 도련님과 호각이라니….”

“체력도 어마어마하게 붙었어. 이젠 마냥 놀리지 못하겠는데.”

물론, 성장한 내 검에 감탄한 것은 기사들뿐만이 아니었다.

“대단해, 클라인.”

그렇게 말한 델라인의 웃음이 짙어졌다.

“순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내가 고생을 좀 많이 하긴 했지.”

하나같이 기쁘기 그지없는 칭찬들이었지만, 아직 대련은 끝나지 않았다.

검을 곧추세우자, 델라인 역시 그에 화답하듯 자세를 잡았다.

‘처음 보는 자세인데.’

사선으로 내린 검에,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듯한 돌격 자세.

그것을 본 내 눈이 가늘어졌다.

‘라인란트의 검술이긴 한데, 본 적은 없어. 뭐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투웅-!

정면으로 쏘아져 나간 델라인의 신형이, 곧바로 내 코앞까지 짓쳐 들었다.

“이런?!”

미리 대비하지 않았다면 반응조차 하지 못했을 속도.

아까도 말했지만, 마력을 안 쓰고도 이 정도라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우우웅-!

눈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감각과 함께, 시야가 흑백으로 물들었다.

색이 남아있는 것은 위협이 되는 델라인의 모습,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검까지.

스스스….

푸른 잔상이 일렁이며 마치 사람인 양 움직였다.

마치 델라인의 다음 동작을 알려주는 듯했다.

‘경로는 올려치기, 이후 정면.’

잔상이 알려준 동작을 곱씹었다.

정직한 검이었다.

한 치의 기교도, 속임수도 없이.

검의 예기와 힘만을 오롯이 담아낸, 패도적인 검.

그것을 알아챈 난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루델의 환영검과도, 하인켈의 유성검과도 다른 검.

이것은 델라인이 직접 만들어낸 검술이었다.

‘벌써 자신의 검술을 만드는 경지까지 다다른 건가.’

가주 자리에 오르고도 십수년이 걸리던 것을, 이 젊은 나이에 해내다니.

천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눈은, 이미 그의 검술을 파훼하고 있었다.

카아아앙-!

커다란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하늘을 나는 것은 부러진 내 목검의 반쪽.

정면으로 내려치던 델라인의 검이 코앞에서 전진을 멈췄다.

“훌륭했다, 클라인. 정말로…!”

그렇게 말하려던 델라인이 멈칫했다.

부러진 목검의 나머지 반쪽.

롱소드에서 숏소드로 변한 내 검이 델라인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무승부로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내 것도, 델라인의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

시선을 돌리자, 하인켈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계속 이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훌륭했다. 두 사람 다.”

그렇게 말한 하인켈은, 방금 전 내가 델라인의 검을 파훼한 방법을 말했다.

“올려치는 검에 맞서는 것이 아닌, 같은 방향으로 휘둘러 위력을 더욱 증폭. 통제불능의 영역까지 끌어올렸구나.”

“맞습니다.”

하인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내거나 흘려내는 것으로는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반대로, 더욱 힘을 주게 만들어 통제할 수 없게 만들면 된다.

그렇게 생겨난 작은 틈새를 찌른다면, 방금과 같은 상황으로 몰아넣는 것이 가능하지.

‘바꿔 말하자면, 여기까지가 한계라는 말이고.’

마력을 쓰지 않고 싸웠기에 무승부였을 뿐.

저 검에 마력이 담기는 순간, 방금과 같은 파훼는 커녕 대응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검이 타들어갈텐데, 그걸 뭔수로 막아?

“그 짧은 순간에 처음 본 검술을 분석하고, 그를 파훼할 방법까지 고안해내다니.”

부러진 목검을 주으며 속으로 중얼대던 때.

들어본 적 없는 낮선 목소리가 하인켈의 뒤에서 들려왔다.

“아이들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크는군.”

그렇게 말하면서 걸어온 것은, 커다란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었다.

곰의 가죽으로 만든 망토를 몸에 두른, 은색 머리의 노인.

날 바라보는 푸른 눈은, 어딘가 모를 익숙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

노인의 존재를 예상하지 못한 듯, 하인켈의 눈이 커졌다.

‘침입자인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하인켈도, 다른 기사들에게도 경계하는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하인켈의 경우에는 적의를 표출하기에 앞서 마치 높은 사람이라도 찾아온 듯 긴장하고 있었다.

…잠깐만, 긴장한다고?

황제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던 인간이?

“아버지, 저분은…?”

델라인 또한 나와 비슷한 심정인 듯, 어색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아이들은 모르는 것이 당연한가.”

우리 둘을 번갈아 본 노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하인켈을 향해 말했다.

“제가 직접 밝히는 것이 좋겠습니까? 공작 전하.”

옅은 웃음과 함께 그렇게 말하는 노인을 보며, 하인켈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말투에선 격식을 차리고 있었지만, 공작인 하인켈을 대하는 노인의 태도는 거침없었다.

하인켈 역시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고.

백작과 공작이 같은 눈높이에서 이야기한다니.

아무리 라인란트가 격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건 뭔가가 이상했다.

“인사드리거라.”

그렇지만 이어지는 하인켈의 말에, 난 곧바로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분은 라인란트 서부 장벽을 수호하는 토호, 크란츠 유스티아 변경백.”

유스티아.

내 어머니, 클레어 공후가 쓰는 성이었다.

노인의 이름을 부른 하인켈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다.

“너의… 외조부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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