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패륜
정신을 차리자, 볼을 부풀린 아린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도련님, 이걸로 네 번째.”
“……세 번째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게 말하며 아린의 무릎에서 일어나자, 왼손에 시큰한 감각이 전해져왔다.
“그래도 이번엔, 고생한 보람이 좀 있네.”
보라색으로 빛나는 역십자와 그것을 감싸는 뱀의 문양.
영혼의 인도자, 네크론의 성흔이었다.
- 성흔은 안정적으로 정착했다. 거부반응 하나 없이 딱 들어맞았어.
눈을 감고, 심장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마기를 운용하자, 더욱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마기의 총량은 변함없지만…. 최대 수용량이 어마어마하게 늘었군.”
- 물길을 넓혀줬을 뿐이다. 그 안에 물을 채우는 건 네 몫이야.
네크론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길이라.
딱 맞는 비유였다.
지금까지의 내 힘은, 홍수로 범람하는 강과 같았다.
비바람이 조금만 더 거세지면 당장이라도 넘쳐버리는 불안정한 상태.
솟아오르는 마기를 갈무리할 틈도 없이, 어떻게든 넘쳐 흐르는 마기를 소비해야만 했고.
그것을 위해 난, 하루에 수만 명씩 계약을 해대는 미친 짓을 반복해왔던 것이다.
- 마기를 소모하기 위해 제 몸을 축낸다니, 지금까지 용케 안 죽고 살아있었구만 그래?
원래의 쪼끄만 해골로 돌아온 네크론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내뱉었다.
내가 기억 속을 헤매는 사이, 내 몸 상태를 진단한 모양이었다.
- 덕분에 그 완벽주의자가 이런 오합지졸 군대를 만들어낸 것일 테고.
지금의 내 상황을 정확히 꼬집은 네크론의 한 마디.
그 목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답지 않은 건 맞지.”
“답지 않다니요?”
내 중얼거림에 가만히 듣고 있던 스텔라가 되물었다.
“아키몬드의 언데드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스켈레톤, 병마용. 주로 하급 언데드들을 떠올리죠?”
내 말에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평선을 통째로 뒤덮은 죽음의 군대.
보급도 필요 없고, 쉬지 않고 움직이며,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악몽의 행진.
그 공포스러운 광경에 대륙은 전율했고,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 언데드들을 만든 것은 제가 아닙니다.”
“네?”
그들을 부른 것은 내 힘이 아닌, 얼음성의 힘.
200년 만에 밝혀지는, 아키몬드 군단의 진실이었다.
덕분에 내가 지쳤을 거라 철석같이 믿으며 침투했던 이들은, 얼음성 심부에서 진짜 아키몬드의 군대를 상대해야 했었지.
미스릴로 몸을 감싼 채, 전열을 통째로 뒤흔드는 섀도우 골렘, 타이탄.
얼음성의 끝없는 마력으로 폭격을 퍼붓는 다섯 명의 리치.
산 자의 혼에 빙의해 온갖 교란과 암습을 일삼던 망령, 스펙터까지.
아키몬드가 직접 다뤘던 언데드 군단은 수백만 물량의 군단이 아닌, 수백 구의 고위 언데드로 이뤄진 정예군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정 반대가 되어버렸지.’
지금의 내가 다루는 언데드의 태반은 스켈레톤이나 그레이브 하운드 같은 하급 언데드다.
정예병은 아이신기오르의 무덤에서 계약한 기병대 수백뿐이고, 레이븐같은 고위 언데드는 손에 꼽을 지경.
어떻게든 마기를 소모하려 언데드를 급조한 결과, 이렇게 극단적으로 물량에 치중된 편제가 나타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안돼.’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소모전으로 유도하며 버텨왔지만, 엘프란과의 제국이 만들어낸 언데드들을 보며 깨달았다.
이제부터 필요한 것은 급조한 하급 언데드가 아니라, 제대로 된 설계와 계획을 통해 만들어낸 고위 언데드들이라는 것을.
- 쉽지는 않을 거다.
내 생각을 읽은 듯, 네크론이 당부했다.
- 너도 알 것 아니냐? 전보다는 강해졌다 한들, 그 정도로는 한참 멀었다는 거.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것을 듣고 잇던 스텔라가 도끼눈을 떴다.
“그렇게 말할 거면 성흔 말고 다른 힘들도 왕창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스텔라의 지적에, 네크론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힘을 부여하면 그만큼 내 힘이 빠진다. 지금 이놈에게 준 성흔만 해도 엄청난 파격 대우야.”
그렇게 말하자 스텔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이 쪼잔하긴.”
신성교단의 수녀가 네크로맨서의 신에게 볼멘소리라.
처음 겪는 광경에 혼란스러워하던 것도 잠시.
네크론은 되려 코웃음 치며 스텔라를 향해 내뱉었다.
- 대책 없이 힘이고 나발이고 퍼주면, 케르시아스 놈처럼 줘 털리기밖에 더해?!
….
…….
……….
잠깐만.
지금 굉장히 중요한 발언이 나온 것 같은데.
“털… 리다니요? 그게 무슨…?”
나나 스텔라와 티격태격해서 그렇지, 저놈은 저래 봬도 수호성좌 중 하나.
그의 입에서 나온 발언에, 스텔라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 엥? 뭐야. 몰랐었어?
그렇지만 네크론 역시 스텔라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듯, 되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 네 어미한테 다 듣고 온 것 아니었어?
그리고 날 보며 말한 한마디에, 내 머릿속도 순식간에 뒤죽박죽 뒤엉켰다.
이건 또 뭔 소리야?
내 어머니?
왜 여기서 그 얘기가 나오는 건데?
“내 어머니, 클레어 공후가 널 안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사령술에 심취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여기까지 도달했다고?
도대체 어떻게?
- 아키몬드.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한 듯, 네크론이 질문을 바꿨다.
- 넌 왜 이 원초의 화로를 찾았나?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성흔을 받으러 왔지. 받았고.”
문양이 새겨진 오른손을 보이자, 네크론이 다시 물었다.
- 왜 성흔을 받고자 했지? 교단의 명령이라는 같잖은 변명거리 말고, 진짜 이유가 뭐야?
‘어? 변명이었어요?’ 하는 스텔라의 물음이 들렸지만, 난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제국을 박살 내고, 라인란트를 왕가로 만들기 위해서.”
교단에 잡혀들어와, 성흔을 얻기까지의 여정.
중간에 엘프란과 아키몬드 교단이라는 변수가 끼긴 했지만, 여기까지는 당초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 제국을 부수기 위해선,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건가?
스무고개라도 하자는 건가?
순간 그렇게 생각했지만, 난 곧바로 생각해둔 답을 말했다.
…말하려고 했는데.
“…너 뭐하냐?”
내 말이 시작하기도 전에, 네크론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 확인작업.
내 말에 짧게 답한 네크론이 말을 덧붙였다.
- 잠깐 따끔할 거다.
“뭐?”
갑작스러운 한 마디를 되묻는 그 순간.
파츳-!
이질적인 기운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마기를 통해 상대의 기억을 엿보는 사령술, 주마등.
내가 쓸 때는 몰랐는데, 당해보니 새삼 소름끼치는 기분이었다.
- 하아….
내 머릿속을 맴돌던 네크론의 마기가 사라지고.
네크론은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 그렇게 된 거였군. 알려주기도 전에 살해당했을 줄이야.
살해했다.
그 말을 들은 난, 그것이 클레어 공후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주마등은 상대의 기억을 엿보는 사령술.
내 기억을 엿본 네크론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들의 계획을 알아내고, 여기까지 도달하다니, 너도 참 미친놈이다.
뭐, 미칠 노릇이기는 하지.
갑자기 자기 혼자 나팔 불고 깃발 흔들고 별짓 다 하더니, 또 갑자기 자기 혼자 납득하고 앉았으니까.
“뭐라고 하는지 이해했어요?”
“지금 이게 이해한 얼굴로 보입니까?”
옆에서 묻는 스텔라의 말에 답한 뒤, 난 네크론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 내가 말하려는 것은, 제국과 교단이 꾸미고 있는 계획의 전말이다.
그렇게 말한 네크론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 본래 난, 너희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고 강대한 신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스텔라가 내 쪽에 대고 속삭였다.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하네요. 안 쪽팔리나?”
“원래 저런 놈입니다. 내버려 두십쇼.”
우리 신님 괴팍한게 하루이틀이어야지.
그렇게 말하는 날 흘겨보면서도, 네크론은 설명을 계속했다.
- 그렇지만 그런 나조차도, 너희 세계에 현계하면 이렇게 나약해진다. 왜일까?
그 물음에 난 곧바로 답했다.
“신의 존재를 담기엔, 현세의 그릇이 너무 작으니까.”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깃든다.
그 말처럼 모든 생명의 육신은 그 혼에 걸맞은 형태로 다듬어지기 마련이다.
‘스켈레톤의 몸체에 기사의 혼을 담으면 붕괴하는 것처럼 말이지.’
지극히 네크로맨서다운 생각을 하는 사이, 고개를 끄덕인 네크론이 손가락을 들었다.
- 그런데 만약, 내 존재를 담을 만큼 거대한 그릇이 현세에 나타난다면?
“그야 당연히, 원래 힘만큼 쎄지겠죠?”
“……이런 씨발.”
스텔라의 그 대답에, 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성혈, 그리고 엘프란이 만들어낸 언데드.”
생명력을 증폭시키는 액체와 죽지 않는 육제.
그것을 언급하자, 네크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피와 육신을 구했으니, 남은 것은 영혼이겠지.
그렇게 말한 네크론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그들의 목적은, 태양신 케르시아스의 강림이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 태양의 수호성좌를 온전히 강림시켜, 분열된 대륙을 하나로 만들 계획이지.
***
“참…. 놀랍네요.”
황망한 표정을 한 스텔라가 힘없이 말하자, 네크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충격이 클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멀쩡하네?
“멀쩡하죠. 암요.”
그렇게 말한 스텔라였지만, 그녀의 눈은 흐릿했다.
“200년 전 네크로맨서인 아키몬드가 눈앞에 있고, 대륙 역사서는 다 틀린 거라고 하는데, 이제 와서 놀랄 게 뭐 있겠어요?”
생각해보니 그랬다.
나나 네크론한테야 별일 아닐지 몰라도, 스텔라 입장에선 천지가 두어 번 뒤집히는 나날이었을 테니까.
일일이 놀라고 경악하는 것도 지쳤다는 뜻이겠지.
부정, 분노, 협상, 공포를 넘어, 수용에 단계에 다다른 것이다.
“근데, 그럼 오히려 좋은 거 아니에요?”
어느 정도 머릿속이 정리된 듯, 툭 던진 스텔라의 질문에 네크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양의 수호성좌인 케르시아스는 정의와 질서를 뜻하는 신격이잖아요? 평민이나 그 밑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선, 악덕영주한테 시달리느니 그냥….”
- 네 말이 맞다.
그렇게 말한 네크론이 침중한 눈으로 말했다.
- 강림하는 게 케르시아스 본인이라면 말이지.
그 말에, 난 네크론이 방금 했던 말을 떠올렸다.
‘대책 없이 힘이고 나발이고 퍼주면, 케르시아스 놈처럼 줘 털리기밖에 더해?!’
힘을 준 끝에 패퇴했다.
그 말은 내게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신성교단, 그리고 제국.
이 미친놈들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신 따위가 아니다.”
내 중얼거림에, 스텔라와 네크론이 시선을 돌렸다.
“필요한 것은 숭배하고 경배할 신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신과 같은 힘을 선사할… 도구.”
그렇게 말한 난, 네크론을 향해 확인하듯 되물었다.
“케르시아스는, 죽은 건가?”
스텔라의 눈이 커지고,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는 사이.
내 말을 들은 네크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래. 죽었다.
잠시 말을 고른 뒤.
- 제 자식이라며 아껴 마지않던, 신성교단의 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