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133화 (133/209)

133. 원초의 화로

쿠우우우우….

북부의 참혹을 뒤덮은 얼음.

그 위에 세워진 아키몬드의 요새, 얼음성.

거대한 성의 중심부에,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북부 왕국 윈터폴의 마지막 기사, 베르켈.

북부 왕국 윈터폴의 마지막 네크로맨서, 아키몬드.

"이미 제국과 교단의 병력은 절멸했다. 지금 네가 하려는 짓은 단순한 학살이야!"

"비켜."

힘겹게 내뱉은 한 마디였지만, 아키몬드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차분했고, 차가웠다.

원한에 미쳐 괴물이 된 남자.

그는 스스로 멸망을 뿌리는 괴물이 되고자 했고, 지상의 모든 인간을 절멸시키고자 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린 왕도.

그와 함께했던 수많은 동료들도.

“네 스승도 이런 결말을 원하지는……!”

“닥쳐라.”

그의 스승을 입에 담자, 아키몬드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정이 섞였다.

“고향을 멸망시킨 악마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무구로 몸을 두른 주제에….”

극한으로 끌어올린 마력을 통째로 짓누르는 마기.

"감히 무슨 자격으로 내 스승을 들먹이느냐."

그것을 느끼는 동시에, 아키몬드의 등 뒤에서 시커먼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쿵-! 쿵-!

온 몸에서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금속질의 거인.

“이런 미친…….”

“골자는 드래곤 본에, 외장은 통째로 미스릴이라고?”

아키몬드의 제1 권속, 미스릴 골렘 타이탄.

그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언데드들이 베르켈과 동료들을 둘러쌌다.

촤르르륵-!

한 명 한 명이 당대의 호걸이라 불렀던 군웅들.

한 명 한 명이 누군가를 사랑했고 사랑받았던 평범한 인간.

억울하게 죽어간 원한의 총의가 한데 모여, 그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네 스승은 세상을 구하고자 얼음성을 세운 거다. 그 유지를 이은 네가 이런 짓을……!"

“이 밑에 잠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지껄여봐.”

그렇게 말한 아키몬드의 발아래에는, 도시가 있었다.

윈터폴의 수도, 하이델베르그.

역병과 저주로 녹아내리던 도시는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고통받던 시민들의 시신도.

울부짖는 사람들의 비명도.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차가운 얼음 아래에 박제되어 있었다.

“이게 인간이야, 베르켈.”

스산한 음성이 베르켈의 귀를 파고들었다.

“한 조각 빵을 위해 밀밭을 불태우고, 한 티끌의 황금을 위해 마을을 유린하고!”

고통과 원망에 찬 절규가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한 줌 힘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이를 짓밟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침중한 얼굴로 그것들 듣던 베르켈이 말했다.

"그래서 대륙에 살고 있는 인간을 전부 죽일 셈이냐?"

연합군은 궤멸했고, 교국은 불타고 있다.

제국 황제 멜디르는 황성 지하에 웅크려 떨고, 대마법사 아칸은 하늘 위로 숨어 자취를 감췄다.

잘나신 영웅들이 도망쳐버린 세계.

그와 동료들은 이 무너져가는 세상 최후의 보루였다.

“새로 태어날 아이들은 무슨 죄로…!”

“그들도 똑같은 인간이잖아.”

그렇게 말한 아키몬드가 얼굴을 찌그러트렸다.

엉망진창으로 뒤틀린 광소.

두 눈에선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윈터폴에 역병을 뿌리고, 수천만을 학살한 것들이 낳은 자식이잖아-!”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어!”

“이젠 안 믿어!!!”

틀렸다.

이미 이성을 잃었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아키몬드의 웃음은 점점 더 농도를 더해갔다.

“이미 모든 군대가 진군하기 시작했어. 너희들이 숨긴 세 괴수의 유해를 찾기 위해.”

“……!”

“이번엔 스승님도, 잘나신 성자와 영웅들도 없지. 끝이야. 아무도 못 막아.”

그 말에 다른 기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일주일.

그 안에 아키몬드를 죽이지 못한다면, 대륙은 끝이다.

그렇지만.

“아니, 막아낼 거다.”

촤앙-!

베르켈은 절망하는 대신, 허리춤에서 노르드빈트를 뽑아 들었다.

일주일 안에 이 언데드를 전부 뚫는다면, 희망이 있으니까.

대륙도, 맞은 편에 선 아키몬드도.

구원받을 수 있으니까.

"타락한 세상이라 한들, 새로 태어날 생명에게는 죄가 없으니."

검을 치켜든 채로 베르켈이 말했다.

언젠가, 그가 알아주기를.

다가올 그 날에, 자신의 말을 떠올리기를 바라며.

아키몬드에게 달려든 베르켈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대를 베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겠다."

***

“역시, ”

파아앗-!

등 뒤에서 터져 나온 눈 부신 빛에, 난 얼떨떨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진짜 왔습니까?”

“당연하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내 앞에 선 스텔라가 말했다.

“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봤거든요?”

“뭘요?”

“지금의 제 팔자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꼬였는지요.”

“???”

무슨 말인지 몰라 얼굴을 찌푸리던 사이.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스텔라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들어 날 가리켰다.

“공자님 때문에 교단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 책임져주세요!”

….

…….

……….

잠시.

아니, 좀 오랫동안 뭔 소린지 몰라서 머리를 싸맸다.

어, 그러니까. 지금 쟤가 나한테 한 말이…….

-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발언인데?

- 오해가 아닐 수도 있지. 자네 우리가 안 보는 사이에 뭔 짓을 하고 다닌 건가?

끊이지 않는 구경거리에 잔뜩 신난 두 언데드가 개소리를 지껄였다.

“정체 비밀로 해줄 테니까, 전속신관 자리 내놔요!”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스텔라의 부연설명에 난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 아, 그쪽 얘기였구만?

- 텃군. 먼저 돌아가겠네.

잘 논다 진짜.

내 복장 뒤집어지는게 니들 인생의 낙이지 아주?

‘돌아가면 진짜 두고 보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눈은 스텔라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긴, 이쪽도 뒤가 없기는 매한가지로군.’

아키몬드의 환생이라는 공자의 감시역으로 나선 끝에, 교단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

미리암과 개리슨이 있다 한들, 안심하기 어려울 것이다.

생각을 마친 난 한숨과 함께 스텔라에게 당부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 아키몬드입니다. 대륙의 공적이에요.”

“알아요.”

“들키면 죽어요.”

“어차피 교단으로 돌아가도 죽은 목숨인데, 어딜 가나 똑같죠.”

심드렁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스텔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그렇게 말하자, 스텔라는 곧바로 내 손을 맞잡았다.

“배신하면 언데드로 만들 겁니다. 알죠?”

“으엑, 겁나 살벌하네요.”

볼멘소리와 함께 스텔라가 멋쩍게 웃었다.

손에 남아있던 떨림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

쿠르르르르르……!

육중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돌문이 스스로 열렸다.

이질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거대한 신전.

기다란 문 앞에서, 불지기인 유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벅. 저벅.

그를 따라 신전 안쪽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장식물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교국의 성당과는 전혀 다른 양식으로 된 구조물들.

양옆으로 늘어선 수많은 석상과 상징들은 각기 다른 빛을 내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그중 몇몇 상징을 알아본 스텔라가 말을 흐렸다.

“저건, 지크 교단의 상징이잖아요. 오른쪽에 있는 건 루세트의 문양이고, 저 석상은 시린 교의….”

이제는 사라진 수많은 종교들의 상징.

스텔라의 말에 불지기인 유리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신성교단이 이단이라 명명한 종교들의 상징이군요.”

“…….”

신성교단의 탄압으로 사라진 수많은 종교와 토착신앙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교단의 최대 성지인 이곳에는 그것들이 멀쩡하게 보존되어있었다.

그렇게 거대한 신전의 복도를 얼마나 더 걸었을까.

고오오오오….

복도 끝에 다다르자,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공동이 우리를 맞이했다.

“우, 우와아….”

복도에서 봤던 수많은 이교도의 상징.

중앙 공동에 다다르자, 그 상징의 수는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늘어나 있었다.

신전의 모습을 둘러본 스텔라는 경탄하는 동시에 혼란스러워했다.

“여기는 대체…?”

“만신전(萬神殿)이다.”

대답이 들려온 것은 복도 안쪽.

시선을 돌리자, 불지기인 유리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만신전…?”

“한마디로, 만 명의 신을 모신 제단이란 뜻입니다.”

내 부연설명에 스텔라가 공동의 벽면을 이리저리 살폈다.

원형으로 이뤄진 공동을 감싸고 있는 수백, 수천 개의 제단.

그 제단 하나하나에는 수십 가지의 상징과 우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신전을 찾은 나와 일행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괴수전쟁 시기. 대륙의 모든 국가들은 세상을 불태우는 세 짐승에 맞서고자 힘을 합치기로 결의했지.”

그렇게 말문을 연 유리가 사방을 둘러싼 상징들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 신전은, 함께 싸우는 수많은 이들을 기리고자 세운 신앙의 보루. 인간 통합의 상징으로써 만들어진 건축물일세.”

덤덤하게 설명을 이어가는 유리였지만, 스텔라는 더욱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 지금에 와선 아무도 기억 못 하는 일이 되었지만.”

불지기인 유리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이.

스텔라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듯, 만신전의 상징들을 살피며 말을 흐렸다.

“신성교단의 상징은… 안보이네요?”

수백, 수천 개가 넘는 신앙의 증표들.

그러나 그것들 중, 케르시아스 교단의 상징인 태양 십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글쎄요, 왜일까요?”

그런 스텔라의 의문을 뒤로 한 채, 난 거대한 공동 한가운데를 향해 걸어갔다.

원형으로 이뤄진 바닥 한가운데.

그곳에 놓인 거대한 불꽃.

저것이 바로, ‘원초의 화로’였다.

화륵-!

내 존재를 느낀 듯, 화로에 지펴진 불이 한층 더 밝게 타올랐다.

“원초의 화로란 본래, 세상을 이루는 여러 신격을 불러내는 장치. 이 만신전에 모셔진 수많은 신들을 부르는 도구일세.”

그 말에 스텔라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불씨를 넣게.”

그러는 사이, 난 불지기의 지시에 따라 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츠츠츠츠…!

심장에서 뿜어져 나와, 손을 타고 흘러나가는 마기.

그것을 감지한 불이 점점,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화륵-!

내 마기를 받아 검게 타오르는 불꽃.

이쯤 되면 누가 봐도, 태양신 케르시아스를 부르는 의식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잠깐만요. 이거…?”

뭔가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듯, 스텔라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재판에서 그랬죠? 신탁과 성흔을 받아, 내 무고를 증명하겠다고.”

“…….”

“그거, 순 구라였습니다.”

원초의 화로에서 성흔을 받는다 했지, 케르시아스랑 접견한다고는 안 했잖아.

그리고, 내가 미쳤냐?

당장 쳐 죽여도 시원찮은 케르시아스를 부르게?

그 말을 들은 스텔라아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흐렸다.

그러는 사이, 불꽃의 색을 확인한 유리가 내게 말했다.

“부르고자 하는 신의 이름을 말하게.”

“후우….”

불꽃을 향한 목소리에 마기를 담았다.

망자와 산 자를 매개하는 음성, ‘망자의 목소리’

- 그대의 손, 그대의 목소리가 청하니, 안내자의 청에 답하라.

망자의 목소리에 반응한 듯, 화롯불이 불규칙적으로 흔들렸다.

게을러터져 가지곤.

그렇게 생각하며, 난 케르시아스가 아닌,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망자의 혼을 환원시키는 근원과도 같은 자.

네크로맨서의 수호성좌.

- 네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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