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똑같은 바보였네요
“오랜만에 찾아온 순례객이니, 나 또한 예를 갖춰야지.”
그렇게 말한 남자는 나와 스텔라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원초의 화로에 온 것을 환영하네. 난 이 화로를 지키는 불지기, ‘유리’일세.”
불지기.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 붉은 머리의 남자, 유리의 시선이 스텔라를 향했다.
“신성교단 전투수녀, 스텔라 라프탈리아. 맞지?”
“에, 에?”
처음 보는 이가 자신의 이름과 소속을 알아맞히자, 스텔라의 몸이 흠칫 떨렸다.
“어떻게 제 이름을…?”
“화롯불을 지켜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네.”
그렇게 말한 유리의 시선은 스텔라의 목을 향해있었다.
“도무지 알고 싶지 않은 사실까지도 말이야.”
“……!”
시선을 느낀 스텔라가 황급히 손으로 목을 가리는 것도 잠시.
“알고 싶지 않은 사실….”
그렇게 중얼거린 스텔라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쯧.”
이번에도 얼버무릴 수 있을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네.
“아니, 잠깐만요. 그러니까……. 에?”
쉴새 없이 쏟아지는 정보에 스텔라가 혼란스러워했다.
“공자님이 정말로…. 아키몬드라고요?”
눈에 띄게 창백해진 스텔라의 표정.
그것을 확인하자, 붉은 머리의 남자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대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금기였었던가?”
“지랄하네. 다 알고서 내뱉은 주제에.”
비꼬거나 자극하려는 의도가 아닌, 정말로 몰랐다는 표정.
“사람의 마음을 읽고, 비밀을 끄집어내는 게 너희들 취미잖아. 안 그래?”
“취미라니, 그런 섭섭한 소리를.”
그 뻔뻔한 상판을 향해 내뱉었지만, 그것을 받는 쪽도 만만치 않았다.
“자신이 누군지도 밝히지 않는 자에게, 섣불리 화로를 내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툭 던지듯 들어오는 날카로운 화두.
거기에 더해, 그는 다시 한번 강조하듯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게다가 그것이, 윈터폴의 아키몬드라면 더더욱.”
“…….”
그렇게 말하는 남자를 향해, 난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얼굴 보면 알 것 아냐. 내가 누구고, 여기에 뭐하러 왔는지.”
내 대답에 붉은 머리의 남자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말없이 내 눈을 응시한 채, 입 모양만을 움직여 뭔가를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공자님? 저게 무슨…….”
“화로지기의 능력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고, 성지에 들어올 수 있는지를 판단하죠.”
화로를 지키는 자들이 계승받는 이능.
그와 동시에, 성지에 다다른 이들에게 주어지는 시험이기도 하지.
…물론, 내 말을 들은 스텔라의 얼굴은 두 배 정도는 더 창백해졌다.
‘어디서부터 뭘 설명해야 교단으로 도망을 안 갈까….’
그렇게 생각하며 스텔라에게 할 말을 고민하던 사이.
“좋아, 내 믿어보겠네.”
결론을 내린 듯, 그렇게 말한 유리가 허공에 손을 그었다.
파아앗-!
허공에 나타난 공간이동 마법진.
자기 때문에 일이 복잡해졌으니, 배려라도 해준다는 걸까?
병 주고 약 주고.
하여튼 불지기 새끼들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준비가 되면 마법진 중앙에 서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푸우, 한숨을 쉬는 사이. 말을 마친 유리가 모습을 감췄다.
휘오오오….
광활한 들판에 남은 것은 나와 스텔라뿐.
무거운 정적 사이로 들리는 것은 들판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 뿐이었다.
- 아니라고 우기기라도 해보지 그러나?
‘아니.’
상황을 보다 못한 레이븐이 그렇게 말했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순순히 연기에 넘어갈 사람도 아니고, 숨겨봤자 의미 없어.’
생각을 모두 마친 난 스텔라를 향해 다가갔다.
천천히 걸어오는 내 모습에 흠칫 놀란 듯, 스텔라는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거, 거짓말이죠? 공자님이, 정말로…….”
차라리 거짓말이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개리슨의 딸임과 동시에, 내 뒤틀린 삶의 피해자 중 한 명.
이미 진실이 밝혀진 이상 더 속일 생각도, 그럴 자격도 없었다.
“처음부터 이상하단 생각 안 해봤습니까?”
내가 그렇게 되묻자, 스텔라가 흠칫했다.
“열다섯 살 먹은 애송이가 성지의 존재를 알고 있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건….”
“천재라서? 이 일을 모두 예측할 수 있을 만큼 지략과 정치력이 뛰어나서?”
뭐, 천재인 것도 맞고.
지략과 정치력도 한 끗발 날리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장소를 알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말을 잇지 못하는 스텔라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지만, 제게 걸려있는 혐의가 사실이라면 어떨까요?”
“…….”
“교단이 씌운 혐의가 전부 사실이었고, 제가 정말로 아키몬드의 환생이라면?”
아키몬드는 대륙의 절반을 집어삼키고, 교국의 전 국토를 유린한 자.
교단이 가진 비밀이 뭔지, 숨겨둔 장소가 어디인지쯤은 200년 전에 전부 파헤쳤을 것이다.
그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으니, 처음부터 화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겠지.
모든 아귀가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공자님은 정말로….”
“예.”
정체가 밝혀진 것은 예상외였지만, 머릿속은 맑았다.
그녀와 연관된 다른 이들을 생각한다면, 속이는 것보단 오히려 진실을 밝히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이전에 듄켈에게 그랬던 것처럼, 정면으로 내 존재를 납득시켜야겠지.
‘그리고, 이제 와서 알아챈다 한들 멈출 수도 없을 테니까.’
원초의 화로에 도착한 지금이라면.
계획이 여기까지 진행된 상황이라면, 더 이상 내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다.
아니, 이후 벌일 일들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최대한 빨리 내 정체를 밝혀야 할 테지.
가문에게도.
나와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제 이름은 아키몬드.”
속으로 심호흡한 뒤, 천천히 내 본래 이름을 내뱉었다.
“200년 전, 대륙의 절반을 집어삼킨 네크로맨서입니다.”
***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스텔라였다.
“후우~!”
무거운 진실을 털어내려는 듯, 크게 한숨 쉰 스텔라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정말로 공자님이 아키몬드라면, 궁금한 게 있어요.”
“……?”
교단이 내게 건 혐의를 인정하는데도 불구하고, 스텔라는 날 더 적대하지 않았다.
아니.
적대하기는커녕, 그냥 좀 별난 사람 쳐다보는 눈치였다.
“대전쟁은 왜 일으킨 거예요?”
…물론, 특유의 앞뒤 안 가리는 화법 역시 그대로였고.
“……제 정체를 알아내고 맨 처음 묻는 게 그겁니까?”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다.
비명을 지르거나, 칼을 뽑거나.
하다못해 등을 돌려 도망가거나.
그런 수많은 선택지 대신, 그녀는 나와 터놓고 대화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대륙의 공적인, 나 아키몬드와.
“전에 말했잖아요. 공자님은 억울한 사람 같다고.”
“…….”
“그 말, 지금도 딱히 철회할 생각 없어요.”
이제 와서 억울함을 털어놓고, 고해성사라도 하라는 건가.
헛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스텔라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나도 좀 들어볼까?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데스나이트인 레이븐까지 나타나 스텔라의 말을 거들었다.
스텔라는 저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겠지만, 아무튼.
‘들어서 좋을 게 없을 텐데.’
그렇게 말해 봤지만, 레이븐은 고개를 저었다.
머리만 달랑 내밀어서 저러고 있는데.
무슨 귀신의 날 호박 머리도 아니고.
“후우.”
얕게 한숨 쉬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별로 특이한 이유는 아니에요.”
특별한 사명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되먹지 못한 악당의 실패담.
구구절절 말을 늘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간략히 줄여서 얘기했다.
“눈앞에서 동료와 지인들이 다 죽었고, 원수들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
“그것들 다 족쳐보겠답시고 수단 방법 안 가린 거죠.”
그마저도 베르켈 때문에 말짱 도루묵이었지만 말이야.
“동료가 있었어요?”
“그럼 처음부터 혼자 살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자, 스텔라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역시, 교단이 알려준 것과는 영 딴판이네요.”
당연하지.
북부를 얻기 위해 역병으로 사람을 학살한 놈들.
사실 그대로 기록하면 아마 쪽팔려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닐걸.
속으로 그렇게 악담을 퍼붓자, 스텔라가 내게 다시 물었다.
“그럼, 정말로 대륙을 전부 멸망시키려고 한 거예요?”
“했습니다.”
망설임 없이 말했다.
내가 한 일을 부정할 생각도, 미화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난 미쳤었고, 타락했었다.
“어째서?”
“다 똑같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모든 일이 끝난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북부에 역병을 퍼트린 제국과 그것을 묵인하고 비호한 교단.
그렇지만 내가 무엇보다 분노한 것은, 한 줌 이익 때문에 북부의 멸망을 묵인한 수많은 자들이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부쉈습니다.”
멸망한 북부에 군대를 들인 나라는 전 국토를 불태웠다.
북부 왕국의 보물에 손대는 자들은 전부 잡아 입속에 금을 녹여 부었다.
복수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고, 실제로 무슨 짓이든 했다.
그 누구도 잊지 못하도록.
그 누구도. 내 고향을 더럽힐 수 없도록.
“그랬던 아키몬드가, 왜 지금은 자기 원수를 위해 일하는 거예요?”
같은 질문을 들은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입에선 조금 다른 대답이 나왔다.
“그 원수놈이…. X나 멋있어 보여서요.”
“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그 말을 곱씹은 끝에.
“에이씨!”
짧은 외침과 함께 침중해지는 분위기를 억지로 날려버렸다.
“얘기는 여기까지. 더 없으니까 알아서 판단하십쇼.”
죽이든가 살리든가.
닭살 돋아서 더 이상은 얘기 못 하겠다.
- 할 말 다 해놓고 이제 와서?
‘시끄러워!’
머릿속에서 들리는 레이븐의 말을 무시하며 유리가 준비해둔 공간이동 마법진으로 들어갔다.
“먼저 갑니다! 따라올 거면 따라오십쇼!”
스텔라를 향해 그렇게 말한 순간.
파아아앗-!
눈 부신 빛이 날 감싸고, 내 몸은 바다 건너에 위치한 달의 섬으로 전송되었다.
***
“뭐야,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렸네.”
먼저 마법진에 올라선 클라인을 보며 스텔라가 황망히 중얼거렸다.
“어땠어요?”
“으아악?!”
그러는 와중, 등 뒤에서 아린이 불쑥 나타나자 스텔라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언제 여기까지?
왜 못 알아챘지?
“히히!”
그런 생각도 잠시.
환하게 웃는 아린의 모습에 스텔라 역시 옅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우리 도련님 되게 이상하죠?”
“…그러게요. 엄청 이상해요.”
스텔라가 그렇게 답하는 사이, 아린은 쪼르르 다가와 스텔라의 옆자리에 착 달라붙었다.
“정말…….”
클라인이 떠난 자리를 향해 고정된 스텔라의 눈.
스르르….
그러는 사이, 들판에 깔린 아린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스멀스멀 자신을 감싸는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한 듯, 스텔라는 클라인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나랑 똑같네요.”
‘멋있어서’.
클라인의 그 한마디를 되뇐 스텔라의 입이 미소를 그렸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신을 잡아끌던, 이름 모를 소년의 손.
아무것도 없던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했던 개리슨의 등.
자신과 아이들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하는 미리암의 목소리.
그것들이 모여,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
그것들을 보며, 지금껏 살아왔었지.
“나랑 똑같은… 바보였어.”
그녀의 새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한낮의 햇빛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그녀로서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우리 도련님 따라갈 거에요?”
아린의 물음에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고요.”
따라간다.
그 말의 의미가,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들리는 것 같았다.
파아아앗-!
확신에 찬 스텔라가 마법진을 향해 달려가자, 눈부신 빛이 그녀를 휘감았다.
“다행이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아린이 혼잣말했다.
스텔라의 그림자를 감싸려 하던 아린의 촉수들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모습을 감춘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