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130화 (130/209)

130. 동쪽 끝으로(2)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클라인.”

다음 날 아침.

아일라시스 영지로 향하는 마차 앞에 도달하자, 시엘이 내 손을 잡았다.

“약속, 잊지 마시구요.”

“아, 예…….”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계획에 협조해줄 테니 결혼해달라는 시엘의 제안.

결론부터 말하자면, 받아들였다.

혼인서류에 이름 하나 올리는 것으로 제국 3대 공작의 협력을 얻을 수 있다는 건데.

안 할 이유가 없잖아?

“진짜 무미건조한 결혼이네요.”

나와 시엘이 대화하는 것을 지켜몬 스텔라가 그렇게 평했다.

뭐, 맞는 말이지.

말이 좋아 결혼이지, 실상은 향후 있을 거사를 위한 정치적 계약.

난 그렇다 쳐도, 시엘 입장에서는 썩 좋은 기분은 아닐 터였다.

“…진짜 이런 식으로 해도 괜찮은 겁니까?”

시엘의 손을 놓으며 내가 그렇게 말하자, 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냐니, 뭐가요?”

“어제 설명 드렸잖아요.”

그렇게 말한 난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말했다.

“당신이 제게 느끼는 건 사랑 같은 감정이 아니라, 마력 회로를 이식한 부작용입니다.”

망자의 혼은 본능적으로, 그 혼을 다루는 네크로맨서의 존재에 안정감을 느낀다.

난 그중에서도, 진혼(鎭魂)을 업으로 삼는 네크로맨서.

영혼과 교감하며 인도하는 만큼, 혼들이 내게 모여드는 빈도 또한 훨씬 많은 법이다.

“제대로 된 감정도 아닐뿐더러, 당신 본연의 의지조차도 아니에요.”

자신의 감정은 사랑이 아닌, 죽은 용의 마력 회로를 이식한 부작용이다.

그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그녀에게 말해봤다.

“지금의 당신이라면 부작용을 치료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필요 없어요.”

몇 번을 강조해봤지만, 결과는 실패.

딱 잘라 단언한 시엘이 내게 말했다.

“클라인이 말했었죠? 제가 앞으로 무엇이 되건, 그건 엘프란이 아닌 제 의지라고.”

말했었다.

다 죽어가는 놈이 아등바등하는 게 하도 꼴 보기 싫어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확신했어요.”

그렇게 말한 시엘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식과 연기로 만들어낸 웃음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다.

“지금의 저 자신도, 제가 클라인에게 품은 이 마음도. 전부 제가 직접 선택한 것이라고.”

“……!”

낯부끄러운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 그쪽은 그럴지 몰라도, 전 아닙니다. 알고 있죠?”

“알아요. 하지만 상관없죠.”

애써 모질게 말해봤지만, 내 반응을 눈치챈 것인지, 시엘은 흡족하게 웃으며 눈을 빛냈다.

“당신이 절 좋아하도록 만드는 건, 앞으로 천천히 해나가면 될 테니까.”

어우, 어우 씨.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겠네.

얘는 뭔, 말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냐?

- 천하의 아키몬드도 이쪽으론 어찌할 방도가 없나 보지?

내 반응이 퍽 재미있었는지, 능글맞은 언데드 리치, 앙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구경났지? 응? 내 입장에선 죽을 맛인데.’

앙헬에게 그렇게 말해봤지만, 다음으로 입을 연 건 데스나이트인 레이븐이었다.

- 전전긍긍할 이유가 없네. 레이디가 저렇게까지 하는데, 아무런 화답도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사로서….

‘시끄러.’

내가 그렇게 언데드들과 전전긍긍하고 있을 무렵.

“백주대낮에 아주 못하는 말이 없으시네요. 아예 방이라도 하나 잡아드릴까요?”

“……!”

옆에서 그걸 듣고 있던 스텔라의 말에 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응? 갑자기 방은 왜 잡아요?”

“알려드릴까요?”

스텔라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아린이 천진난만하게 붇자, 스텔라는 수녀 특유의 인자한 표정을 연출하며, 아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원래 사이좋은 남녀가 한 방에 들어가면, 주신 케르시아스 님의 가호 아래 새 생명이 탄생한답니…….”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세요!”

태연자약하게 개소리를 씨불이는 수녀를 보며, 난 새삼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여자, 진짜 그 망할 신부놈이란 판박이라고.

“일행분들이 즐거워 보여서 다행이네요, 가문 일만 아니었으면 함께하고 싶을 정도예요.”

시엘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으며 그렇게 말한 뒤, 스텔라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어, 에?”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온 시엘의 모습에 스텔라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마탑을 통째로 뒤집어놓던 마법사가 다가오자,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그러니, 제가 가문 일을 정리하는 동안….”

그렇게 말을 흐린 시엘이 스텔라와 눈을 마주했다.

“클라인을 위해서 열심히 해 주세요. 스텔라 수녀님.”

내게 보이던 나긋한 인상과는 정 반대.

살기등등한 시엘의 웃음에, 스텔라의 표정이 한층 더 아득해졌다.

잘못 찍혀도 잔잔히 잘못 찍혔다는 얼굴이었다.

“그럼, 나중에 뵙도록 해요. 클라인.”

바짝 얼어붙은 스텔라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시엘을 태운 마차는 아일라시스 영지를 향해 출발했다.

투투투투……!

점점 멀어지는 시엘의 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것도 잠시.

“어… 공자님?”

“말씀하시죠.”

바짝 굳은 스텔라의 부름에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혼녀분이 너무 무서운데, 어떻게 하죠? 저 잘못 찍힌 건가요?”

“저한테 말해봤자 아무것도 안 됩니다.”

인과응보다, 인과응보.

저렇게 겁먹을 거면 처음부터 놀려대지를 말던가.

***

“그럼 이제, 우리도 슬슬 출발하죠.”

스텔라를 향해 그렇게 말한 내 앞으로, 마차 한 대가 다가와 멈춰 섰다.

“이건 뭐에요? 웬 마차?”

“뭐긴 뭡니까. 항구도시까지 걸어가게요?”

마차 문에 새겨진 라인란트의 문양을 확인하며 말했다.

플리시안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알리자마자 가문에서 준비해 둔 것이었다.

벌컥-!

“클라인 도련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마차 안에서 두 사람이 내게로 다가왔다.

경장 차림의 여자 한 명, 남자 한 명.

용병인 척 위장한 듯했지만, 행동거지에서는 라인란트 기사들이라는 티가 팍팍 나고 있었다.

“나 맞으니까 호들갑 좀 떨지 마.”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 넣어둔 라인란트의 인장을 보이자, 그것을 확인한 남자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붉은수레 기사단 소속의 론입니다.”

“같은 기사단 소속, 엘레인입니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네요.”

3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인상 좋은 청년에, 20대 중반 정도 되는 여기사가 내 손을 맞잡았다.

“나 때문에 개고생한 기사들인데, 기억 못 할 리 있어?”

그렇게 화답하자, 두 기사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공작가의 일원들을 경호하는 호위기사단, 붉은수레.

날 잡으러 온 심판관들에 맞서 검을 들고 대치했던 기특한 녀석들이었다.

“분명 편지에 마차만 준비해달라고 써 놨잖아? 왜 너희들까지 왔어?”

“아, 그게…….”

영문을 몰라 묻는 내 말에 론이라는 기사가 뒤통수를 긁었다.

그러는 사이,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내쉰 여기사, 엘레인이 내게 말했다.

“듄켈 단장님 명령입니다. 공자님 소식 듣자마자 직접 가겠다고 난리여서요.”

“듄켈이 직접?”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다.

공작가 인원들을 지켜야 할 기사단장이, 함부로 가긴 어딜 가?

심지어 지금 델라인과 하인켈은 방계 잔당들이랑 치고받고 있을 것 아냐?

내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기사들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희가 대신 온 겁니다. 공자님 상태도 확인할 겸 해서요.”

“집 나간 자식새끼 걱정하는 아줌마도 아니고….”

가문에 보고한 내용은 내가 플리시안에 도착했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아키몬드 교단과의 싸움, 엘프란의 죽음까지.

제국 3대 공작 중 하나가 쓰러진 상황이니, 가문 내에선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그렇게 생각하던 사이.

팔짱을 낀 기사, 론이 새삼 놀랍다는 듯 내 몸 상태를 둘러보았다.

“정말… 엄청나게 빨리 성장하셨네요.”

“그런가?”

“예. 교단 놈들한테 잡혀가실 때와는 완전히 딴판입니다.”

이안도 그렇고, 만나는 사람마다 많이 컸다고 한마디씩은 하는 느낌이다.

“내가 느끼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데.”

오히려 성장이 느려 답답하다고 할 지경이었지만, 내 말을 들은 론은 무슨 소리냐며 반박했다.

“골격도 그렇고, 무게중심도 그렇고. 이젠 누가 봐도 어엿한 기사이십니다.”

“혹시 다치지는 않았을까 걱정했었는데, 오히려 성장하셨다니, 전하께서도 안심하시겠어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성장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할 정도지.

“내 걱정 말고 방계놈들 청소하는 거나 신경 써. 난 보다시피 멀쩡하니까….”

“피, 거짓말.”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곧바로 아린이 입을 비죽 내밀었다.

“도련님 맨날 죽어라 싸우고는, 반동 때문에 몇 번이나 쓰러졌잖아요.”

“뭐, 뭐?!”

“아린 양,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아린의 폭로에 두 기사들의 눈이 단번에 커졌다.

“아린, 이 녀석들 앞에서 그걸 말하면 어떡해…!”

내가 곧바로 아린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도끼눈을 뜬 아린은 멈출 기미가 없어 보였다.

“맨날 무리해서 쓰러지고! 위험한 데로 달려가서 싸우고! 아픈 거 말도 안 하구!”

“……!”

“도, 도련님……!”

아린의 말이 계속될수록 기사들의 면면은 시시각각으로 창백해져 갔다.

“아린, 난 진짜 괜찮으니까….”

그들의 얼굴을 본 내가 더 말하지 말라며 눈치를 줬지만, 소용없었다.

“저번에는 피눈물까지 났어요! 엄청 걱정했어요!”

아린 역시 단단히 작정한 듯, 그동안 내가 겪었던 일들을 방방 뛰며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뭐 그래 고생했다고 그러는 거야?

교화소에 갇혀서 교화소장한테 죽을 뻔하고.

재판에 끌려가서 교단한테 죽을 뻔하고.

사막을 헤매다가 테레인 백작한테 죽을 뻔하고.

또 이번엔 엘프란이….

….

…….

……….

생각해보니 그러네?

나, 진짜 그동안 개고생하고 다녔잖아?

쿵-!

이번 생도 나름 기구하구나, 생각하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돌아보던 사이.

분을 이기지 못한 론이 애꿎은 벽을 후려쳤다.

“이 미친 교단놈들이, 감히 도련님을…!”

“호위병력을 추가하겠습니다! 이참에 본가에 정식으로 요청해서, 전 기사단을 플리시안으로…!”

“군사도발이야, 미친놈들아!

당장이라도 교국으로 쳐들어가려는 듯, 호들갑 떠는 기사들을 겨우 틀어막았다.

듄켈이 폭주할 것 같아서 대신 왔다며?

지들이 폭주해대면 뭐 어쩌자는 건데?

“집안 사람들이 뭐랄까…. 되게 잘 챙겨주네요?”

기사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스텔라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제가 본 귀족 가문들은 대체로….”

“화목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죠?”

제국 귀족들은 더욱 그랬다.

재산상속권, 가문 내에서의 입지, 파벌에 따른 힘겨루기까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족끼리, 또 형제끼리 죽고 죽이는 것이 일상화된 집안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하인켈 공작 전하의 방침입니다. 가문의 일원으로 일하는 동안에는 한 식구처럼 대하라는 명령이었죠.”

내 말을 들은 론이 마부석에서 그렇게 말했다.

“덕분에 본가에선 하녀가 기사한테 잔소리를 하는 장면도 나온다구요?”

“반대로, 저희 같은 평기사가 도련님한테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하기도 하구요.”

“아아…….”

계승권도, 모계 혈통도, 마력도 없는 애물단지 둘째 공자.

라인란트가 만일 다른 귀족 가문이었다면, 난 존재 자체가 지워졌을 것이다.

이름 모를 빈민가 구석에 버려져, 그렇게 죽어갔겠지.

그렇지만 그들은 이렇듯, 날 지키고자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왔다.

미련할 정도로 착해빠진, 북부의 기사 가문.

그러나 그 미련할 정도의 선함은, 내가 이 가문을 다시 부흥시키기로 결심한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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