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동쪽 끝으로(1)
쏴아아아아아-!
“설마, 이렇게 많은 기사들이 희생될 줄이야.”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비 내리는 어두운 풍경.
절벽 끝에 선 한 남자가, 자신을 쫓아온 수많은 이들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역시, 하늘날개 기사단의 명성대로일세. 이안 라인란트 단장.”
절벽 끝에 선 청년의 이름을 부르며, 화려한 갑옷 차림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방패 문양 한가운데에 새겨진 용의 머리 문양.
황제 직속 근위기사단의 상징이었다.
“진, 클라크……!”
천천히 투구를 벗는 그의 모습에 이안이 이를 악물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글쎄, 무슨 말인지.”
“시치미 뗄 생각 마-!”
무뚝뚝한 진의 대답에 이안이 곧바로 발끈했다.
“황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제국이 뭘 꾸미고 있는지! 폐하의 심복인 네가 모를 리가……!”
“닥쳐라.”
이안의 말을 일축하며, 진은 한쪽 손을 들었다.
“자신을 따르던 기사들을 전부 몰살한 것도 모자라, 황족을 시해하려 한 반역자가, 감히 그 더러운 입을 함부로 놀리다니.”
“……내가 죽였다?”
그의 한 마디에 검을 잡은 이안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 그게 네놈들이 준비해 둔 각본인가? 내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이?”
“우리가 쓴 것이 아닐세. 폐하께서 준비하셨지.”
얼굴색 하나 변치 않은 채 말하는 건가.
지독한 놈.
이안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진은 차가운 눈으로 이안을 향해 말했다.
“하늘날개 기사단은 역심을 품은 단장의 손에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그들은 제국의 영웅으로 기억되겠지.”
“……!”
“싫다면, 그대를 따라 황궁에 침입한 죄로 삼족을 멸해줄 수도 있소만?”
진의 말을 들은 이안은 뭐라 더 입을 열 수 없었다.
이것은, 황제가 자신에게 제안하는 거래.
모든 죄를 자신이 뒤집어쓰는 대신, 함께했던 동료들의 명예와 가족은 건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땡그랑-!
검을 쥔 손에 힘이 풀리고, 화려한 제국식 장검이 땅바닥을 굴렀다.
“협조에 감사드리오. 이안 라인란트 단장.”
그렇게 말한 진은 허리춤에서 단검 한 자루를 뽑아 든 뒤, 검을 놓은 이안을 그 자리에 무릎 꿇렸다.
콱-!
왼손으로 그의 머리를 잡아챈 뒤, 오른손에 쥔 단검을 그의 얼굴에 가까이했다.
목을 겨누고 있던 진의 단검은 천천히 위로 올라가, 서슬 퍼런 칼날을 그의 눈에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콰득-!
이안의 눈을 겨눈 진의 단검이, 그대로 그의 양쪽 눈을 후벼파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
고통에 찬 비명 소리에, 진의 등 뒤에 도열한 기사 몇몇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제국 기사 중 으뜸이라 불리던 남자, 이안 라인란트.
그랬던 그가, 지금은 같은 기사의 손에 붙잡혀 산 채로 눈을 뽑히고 있던 것이다.
털썩-!
“끄으, 끄으으으으……!”
진창이 된 흙바닥을 구르는 이안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나지만, 진은 그 광경에 죄책감도, 조금의 희열도 느끼지 않았다.
“황제 폐하의 마지막 전언이니, 새겨들으시오.”
그렇게 말한 진은 부들부들 떨리는 이안의 몸을 붙잡아, 절벽 끝으로 내몰았다.
“‘봐선 안 되는 것을 보았으니, 그 눈을 폐하노라. 네 동료들의 죄를 모두 짊어진 채, 평생을 그림자 속에서 살라.’라고.”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진은 붙잡은 이안의 몸을 절벽 아래로 던져버렸다.
휘오오오오-!
비바람 속으로 사라진 이안을 한동안 지켜본 진은, 그대로 등을 돌려 황성을 향했다.
다른 그곳만은 세계에 존재하는 듯, 우중충한 하늘 속에서도 제국의 황성은 그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
“저기,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나와 시엘이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하던 사이.
“지금 공자님 말이 꼭…. 반란을 꾀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아린을 무릎에 앉힌 스텔라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내게 말했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게, 어지간히도 긴장한 모양이었다.
“잘못 들은 거 아닙니다, 이거 진짜로 역적모의에요.”
심드렁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스텔라의 얼굴이 잠시 아득해졌다.
“그리고 전, 그 역적모의를 코앞에서 엿들은 거고 말이죠?”
“뭐, 그렇게 됩니다만.”
내 대답을 들은 스텔라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아아아……. 내 인생…….”
황망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그녀의 무릎에 앉아있던 아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뭐, 생각해보면 스텔라 입장에선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네.
아일라시스 가문의 가주와 라인란트의 공자가 외국에서 역모를 꾀하는 상황에, 그 대화를 통째로 엿들었다?
이야.
꼬여도 단단히 꼬였네.
“그러고 보니 계시다는 걸 깜빡했네요.”
“히끅?!”
맑게 울리는 시엘의 목소리에, 스텔라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교국부터 함께하며 볼 장 다 본 나와는 달리, 시엘은 낯선 고위 귀족.
그리고 동시에, 사람을 죽이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는 마법사다.
“교단에 몸담으신 분이니, 제 입장에선 그다지 신뢰할 이유도 없고…. 어떻게 할까요?”
잠시 말을 흐린 시엘이 내게 물었다.
이야, 웃는 거 봐라.
예전에 마법사들 처리할 때도 이런 얼굴이었지 아마?
“어떻게고 자시고, 제 일행입니다. 손대지 마세요.”
“흐응~”
내가 그렇게 말하며 시엘을 만류하자, 날 보던 시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클라인, 지금 약혼녀 앞에서 다른 여자 편드는 거예요?”
“예?”
토라진 듯 입을 비죽 내민 시엘이 계속해서 내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됐어요. 계속 그러면 저도 생각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시엘이 재밌다는 듯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큭큭댔다.
“클라인이 했던 제안에 대해서 생각해봤어요.”
“……생각이요?”
“네.”
시엘의 얼굴에 가득 들어찬 흑심을 느끼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이 날 엄습해왔다.
“아직 함께 하겠다고 확답한 게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
아, 진짜 제발 좀.
여기서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진짜 몰랐는데.
“재미있는 계획이긴 한데, 제 입장에선 별로 얻을 게 없어 보여서요.”
시엘의 말에 난 곧바로 반박했다.
“시민들의 지지, 가문 내에서의 입지. 시엘이 손해 볼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실패하면 어쩔 거냐는 말 따위, 생각하지도 않는다.
엘프란의 죽음과 사건의 내막이 알려진다면, 제국은 전면으로 나서 이빨을 드러낼 터.
그런 상황에 라인란트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손해는 없겠지만…. 사실, 별 관심 없거든요.”
그렇게 말한 시엘이 날 보며 입을 열었다.
“엘프란을 죽인 시점에서, 전 하고 싶은 일을 모두 마쳤으니까요.”
“……아.”
시엘의 그 말을 듣고서야, 난 이 대화의 가장 큰 맹점을 깨달았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상식적인 이해득실로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서, 이번엔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은 시엘이 내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제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클라인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할게요.”
“……?”
“정의의 편에 서서 민중을 보살피고, 제게 찬동하는 마법사들을 한데 모아, 라인란트와 함께 제국과 싸우죠.”
시엘이 말하는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바라마지 않는 것들.
그걸 전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날 한층 더 불안하게 했다.
“그래서, 그 제안이라는 건?”
“간단해요.”
그렇게 말하며 잠시 뜸을 들인 시엘이 날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결혼해줘요.”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한 마디를.
***
“자, 잠깐만요. 잠깐만!”
갑작스러운 폭탄발언에 손을 내저었다.
“우와! 프로포즈!”
양 손바닥을 모은 아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방 뛰었다.
“하녀장님이 말하는거 들었어요! 이거 프로포즈! 사랑고백한 거 맞죠?!”
“글쎄요…….”
아린의 질문에 턱을 짚은 스텔라가 고민 끝에 말했다.
“고백이라기보단 협박에 가깝지 않나요? ‘집안을 구하기 위해선 내 첩이 되어라!’ 이런 거.”
“아 그거!”
그렇게 말하자 아린은 아는 이야기인 듯 손을 번쩍 들었다.
“봄바람 아가씨!”
“맞아요. 악덕영주 얀이 아이린한테 그렇게 말했잖아요?”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한 한 마디에 안그래도 아픈 머리가 한층 더 아파왔다.
“근데, 여기선 아이린이 얀한테 협박을 하네요?”
“아니죠. 공자님 생긴걸 보면 오히려…….”
“공작가 자제한테 아주 못하는 말이 없습니다, 그쵸?”
둘이서 아주 신났네, 신났어.
당사자 입장에선 아주 죽을 맛인데.
‘아니지, 이건 오히려 기회다.’
계획까지 밝힌 마당에, 언제까지 시엘을 피해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면으로 부딫혀서, 관계를 확실히 해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은 뒤, 난 사뭇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시엘. 이 기회에 제대로 말하겠지만, 전….”
“결혼 할 생각 없다고요?”
내 말을 가로챈 시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본인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차라리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엘프란도 없고, 가문은 당신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이제와서 그 인간이 정한 약혼에 연연할 이유가….”
“있어요.”
내 말을 끊은 시엘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제 성격이 어떤지는 잘 알고 계시죠?”
엘프란이 그녀를 저주하던 말을 떠올렸다.
인간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광인.
그 말을 증명하듯, 그녀의 자수정 빛 눈동자의 심부는 엉망진창으로 엉켜있었다.
“전 본능적으로, 인간에게 혐오감을 느껴요.”
“…….”
“이게 제 천성인지, 제게 이식된 이 마력 회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아마 후자일 것이다.
별을 움직이는 힘을 다루는 것은 용족들 뿐.
그리고 그녀는, 그 용의 마력 회로를 받아들인 인간이었으니까.
인간을 벌레보듯 하는 용들의 천성이 그녀의 정신에도 영향을 끼쳤겠지.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클라인한테만큼은 그게 없어요.”
가느다란 그녀의 손가락이 내 심장 언저리에 닿았다.
“오직 당신만이, 제게 말을 걸어도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죠.”
산 자에게서 생리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네크로맨서의 마기에서 안정을 느낀다.
‘살아있는 이에게 시체의 회로를 이식한 영향이군.’
언데드, 혹은 그와 비슷한 존재로 변한 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반응이었다.
망자를 두려워하는 것이 산 자의 본능이라면, 망자의 본능은 산 자를 증오하는 법.
레이븐의 경우엔 기사들 특유의 정신력이.
앙헬은 200년이라는 시간이 만들어낸 인내력이 그것을 억눌렀을 뿐.
스스스스-
미미한 마력이 내 몸을 훑는 것을 느꼈다.
탐색하듯이, 혹은 탐닉하듯이.
“그렇게 깨달았어요.”
시엘의 마력은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히 내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오직 클라인 만이, 저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라는 걸.”
그렇게 말하는 시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랑에 빠진 소녀와도 같은 모습.
그렇지만 그것을 보는 내 얼굴은 착잡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