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진의
“…….”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클라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누워있던 곳은 플리시안에 잡아둔 여관방이 아닌, 처음 보는 호화스러운 방.
“뭐야, 여긴 또 어디….”
몽롱한 정신을 바로잡으며, 클라인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따뜻한 감촉에 옆을 돌아봤고.
그 자리에서 다시 기절할 뻔했다.
“야 이 미친….”
그의 침대 옆에 시엘이 잠들어있었다.
그의 손을 꼭 잡고, 팔에 얼굴을 기댄 채로.
그렇게 말하던 순간.
“아~!”
짙은 원목 재질의 문이 열리며, 그곳에서 입에 빵을 문 아린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이것 봐요! 도련님 일어났다니까요?”
“우와, 정말이네….”
뒤이어서 들어온 것은 방금 전의 클라인처럼 비몽사몽한 상태의 스텔라였다.
“그 먼거리에서 어떻게 알아차렸대요? 공자님이랑 뭐가 통하나?”
“히히, 이래 봬도 우리 도련님 전속 하녀라구요!”
자부심이 흘러넘치는 한 마디와 함께 두 사람이 클라인에게 다가갔다.
“음?”
그러던 중, 뭔가가 허전하다는 것을 느낀 클라인이 스텔라에게 물었다.
“삼촌께선 어디 가셨습니까?”
“2억…. 아니, 이안 님이요?”
“이젠 뭐, 아무렇게나 부르십쇼.”
내 이름도 아닌데 뭐.
그렇게 말하자 스텔라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적이며 말했다.
“먼저 떠난다고 하셨어요. 개인적인 일이라고 하실 뿐, 목적지는….”
“말했을 리 없겠죠. 온 대륙에 수배된 인간인데.”
플리시안으로 간다 말했던 건 그곳이 라인란트 영지이기 때문.
아군이라고 확신하지 않는 이상, 그는 어디에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떠나면서 뭔가 남긴 말은 없습니까?”
“남긴 말이… 아.”
클라인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스텔라가 입을 열었다.
“공자님이 쓰는 데스나이트 있죠?”
“말 많은 놈이요? 아니면 말 없는 놈이요?”
‘난 굉장히 과묵한 편이라고 생각한다만….’ 이라며 레이븐이 볼멘소리를 냈지만 무시했다.
“말 없는 쪽이요.”
“……?”
스텔라의 말에 클라인의 표정이 더욱 괴상해졌다.
이안은 자신의 검술에 관심이 있었을 뿐, 언데드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는데.
게다가 레이븐이 아니라,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다른 한쪽이라고?
“그 데스나이트, 이름이 키예스라고 하던데요.”
“그걸 그 노친네가 어떻게 아는데요?”
들으면 들을수록 아리송해지는 기분이었다.
‘키예스, 중부 대륙식 작명인 걸 보면 아마 제국인일 텐데….’
몇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이안의 지인이라면 가문 내에서도 아는 이가 있을 테니. 돌아가면 하인켈에게 물어보든가 해야지.’
생각을 거듭하던 클라인이 그렇게 결론을 낸 사이.
“으음….”
주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잠이 깬 듯, 시엘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클라인…?”
긴 속눈썹 사이에서 빛나는 자수정 빛깔의 눈동자.
인형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클라인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전부터 생각하던 건데, 정략결혼 상대한테 너무 지극정성인 거 아닙니까?”
정략결혼이라는 말을 굳이 강조하면서, 클라인은 시엘의 손을 놓으려 해 봤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를 잡은 양손에 힘을 줄 뿐.
쉽사리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죄송해요.”
“예?”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엘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클라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다니, 뭐가요?”
영문을 모른 채로 클라인이 묻자, 시엘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어갔다.
“원래 아키몬드 교단을 잡은 시점에서, 클라인은 자기 일을 모두 끝낸 거였잖아요.”
두 주먹을 쥔 시엘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있었다.
“그런데, 전 당신을 제 일에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서 중요한 때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인생을 전부 걸어 시도한 복수였다.
자신을 핍박한 가문, 그 중심에 있는 엘프란.
그 모든 것을 먹어 치우기 위한 복수.
그렇지만 결국, 그녀는 엘프란을 이길 수 없었다.
기사 학살자인 이안 라인란트와 전투마법사가 수백 명의 보조를 받았음에도.
다 죽어가는 상대에게 방심하여 일을 그르치다니.
치욕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무력감에 그녀의 어깨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전 아마….”
“실패했겠죠.”
클라인의 한 마디에 시엘의 목소리가 멎었다.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저 없는 목소리.
“사람이 괴물을 이기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압니까?”
그렇지만 이어지는 클라인의 말에, 시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잘못 들었다 생각하여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아니에요.”
‘저것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감정을 이해 못 하는 광인이다!’
‘원로원을 몰살한 살인귀! 정치적 기반도 없는 무지렁이! 제힘에 미쳐 날뛰는 통제 불능의 도구!’
‘그런 괴물이 한 가문을, 그것도 제국 3대 공작 가문을 맡아? 영지를 다스려?’
자신을 저주하는 엘프란의 말.
그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생리적 혐오감은 진짜였고.
그녀의 마법 또한, 엘프란이 만들어낸 ‘작품’의 일부였을 뿐이니까.
아마 엘프란과 자신 중 누가 더 정상인에 가까웠느냐 묻는다면, 글쎄.
아마 대부분 엘프란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을까?
“클라인. 아시다시피, 전….”
“괴물로 태어났다 해서, 사람이 될 수 없는 게 아닙니다.”
‘한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그의 타고난 성질이 아닌, 의지와 행동일지니.’
평소 클라인이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닌 이 어구는, 대륙의 영웅 베르켈이 남긴 격언.
혈통과 가문에 얽매인 것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야 한다는 그의 지론을 담은 말이었다.
“엘프란 그 새끼가 한 짓을 생각해보세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뱉은 클라인은 침대에서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그 알량한 힘 좀 얻겠다고 이 난리를 친 놈에 비하면, 그쪽은 오히려 귀여운 수준이죠.”
그렇게 말한 클라인은 아린이라는 이름의 하녀에게 하듯 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시엘은 잠시 넋이 나간 듯, 클라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렇게 말한 클라인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꼬우면 자기도 친구 잘 사귀던가. 안 그래요?”
“풉!”
클라인의 말에 웃음을 터트린 것은 스텔라였다.
“진짜, 사람이 어떻게 겸손이라는 걸 몰라요?”
“모릅니다. 겸손해서 손해 본 일이 보통 많았어야죠.”
스텔라의 딴죽을 능청스레 받아넘기던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아차 싶었는지, 클라인은 시엘을 쓰다듬던 손을 황급히 치웠다.
“이크, 아일라시스 공작한테 너무 격 없이 행동했네.”
“에?”
클라인의 말에 시엘은 순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앞으론 주의하겠습니다. 잠기운 때문인가, 눈에 뵈는 게 없네요.”
“아, 아니…….”
혼란스러웠다.
분명 이럴 때, 해야 하는 행동이 있었는데.
‘수줍어하거나 얼굴을 붉히는 게 일반적이다. 환심을 사기 위해선 눈의 각도를 낮추고, 입술은….’
…이렇듯, 계속해서 이어지는 생각과는 달리, 시엘의 몸은 마치 목각인형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날뛰는 감정.
가슴 언저리께가 고장 난 것만 같았다.
“자 그럼, 사소한 얘기는 이쯤 하기로 하고.”
이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듯, 클라인은 방 안에 구비된 의자에 앉아 몸을 낮췄다.
“재미있는 제안을 하나 드릴까 합니다. 아일라시스 공작 전하.”
시엘을 부르는 클라인의 말투가 단숨에 뒤바뀌었다.
이름이 아닌, 가문명으로.
공녀라는 호칭이 아닌, 공작 전하라는 극존칭으로.
“…….”
그런 클라인의 의중을 눈치챈 듯.
시엘 역시 침대에 걸터앉아, 클라인의 행동에 화답했다.
“듣겠습니다. 클라인 라인란트 공자님.”
마치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것 같은 분위기.
그렇지만, 클라인의 입이 내뱉은 한 마디는, 도저히 연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위험했다.
“같이 황제를 죽이고, 제국을 박살 내지 않겠습니까?”
***
“폴와이번의 내전과 이번 사건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말한 내용을 곱씹던 시엘이 그렇게 되묻자, 난 고개를 끄덕였다.
“폴와이번 내전에서, 제국은 헬리안과 휘하 기사들에게 이걸 복용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내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화려한 장식으로 뒤덮인 유리병.
내 기술을 변형시켜 만들어낸 ‘성혈’이 담긴 병이었다.
“그리고 플리시안에선 엘프란의 몸을 개조한 뒤, 이 녀석으로 강화했죠.”
다음으로 꺼낸 것은 엘프란의 심장에 박혀있던 말뚝.
그에게 마력과 생명력을 주입하던 성물의 파편이었다.
“헬리안과 엘프란….”
성혈이 담긴 병과 성물의 파편을 번갈아 본 시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제국 3대 공작가의 수장 두 명이 교단의 실험체로 전락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이, 제국이 의도대로 흘러갔다는 말이군요.”
성혈을 주입한 헬리안의 몸을 관리하던 것은 제국의 네크로맨서.
아키몬드 교단 역시 제국의 네크로맨서가 군데군데 잠입해있었다.
“교단의 음모는 연막일 뿐, 이 일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제국입니다.”
“그렇게 해서 제국에 무슨 이득이 있죠? 제국의 세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
그렇게 묻는 시엘의 말에 난 고개를 저었다.
“그 이상을 꾸미고 있을 겁니다. 확신할 수 있어요.”
헬리안의 시신, 이 마탑에서 진행된 실험 기록.
제국은 그것을 전부 회수했다.
‘멜디르 황제가 꾸미는 건 아마….’
성혈은 그저 수많은 부품 중 하나일 뿐.
당시의 내가 그것을 통해 만들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리며, 난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 당하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죠.”
내가 시엘에게 건넨 제안은 간단했다.
라인란트, 폴와이번, 아일라시스.
제국의 국경을 지키던 세 공작 가문이 연합하여, 역으로 제국을 포위해 황가를 전복시키는 것.
“폴와이번은, 이 계획을 알고 있나요?”
“이미 라이아 제 1공녀가 협조할 예정입니다.”
폴와이번은 이미 제국군의 농간에 가문의 성전이 유린당한 상황이다.
헬리안을 위시한 친 제국파는 내전으로 전부 척결되었고, 라이아는 이미 라인란트와 뜻을 함께하겠다 타전한 상황.
“원래 이 계획의 가장 큰 걸림돌은, 완전히 친제국파로 돌아선 아일라시스였습니다. 하지만….”
“그 제국파 원로들을 전부, 제가 죽여버렸죠.”
이것만큼은 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덕분에 일이 훨씬 쉬워진 것도 사실이다.
“아일라시스의 정의는 힘. 엘프란이 죽은 지금, 당신에게 반기를 들 인물은 가문에 없습니다.”
“맞는 말이에요.”
별을 움직이는 용의 마법을 다루는 자.
성물만 아니었다면, 시엘 혼자서도 엘프란을 꺾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아일라시스의 사람들을 아군으로 만들어요.”
“…사람들이요?”
내게 되묻는 시엘을 향해 부연 설명했다.
힘으로 가문 내부를 결속시키고, 부패한 귀족들을 처치하는 여공작 행세를 해라.
세율을 낮추고 위정자 몇몇을 본보기로 보인다면, 시엘을 해방자로 인식한 시민들은 스스로 반란의 씨앗을 밀고할 것이다.
“재미있는 계획이네요.”
그렇게 말한 시엘의 시선이 날 향했다.
“그렇게 세 공작가가 연합하게 된다면, 연합의 중심은 당연히, 라인란트가 될 테고 말이지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 방법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폴와이번은 내전의 여파.
아일라시스는 시엘의 쿠데타를 빙자한 테러로 힘이 빠진 상황.
반면, 라인란트의 경우는 남아있는 방계 세력만 축출한다면 기사단을 위시한 전력은 온전히 활용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게 바로 계획의 핵심입니다.”
그렇게 말한 내 웃음이 한층 짙어졌다.
“제국을 부수고 난 뒤엔….”
하인켈에게 약속했던 한 마디.
그 누구도 라인란트를 넘보게 하지 않겠다는 말의 진짜 의미.
“라인란트 공작가를, 왕가로 만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