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거꾸로 솟은 마탑(1)
플리시안에서 네크로맨서는 이단이다.
그런 네크로맨서 집단과 영합했다니.
갈론드 마탑장도, 그리고 플리시안 본국에 있어서도 치욕스러운 사실이었다.
뭐, 가장 빡 치는 건 그 사실을 알아낸 게 네크로맨서라는 거겠지만.
“플리시안을 위해 큰일을 해주셨습니다. 클라인 공자님.”
심기가 아~주 불편하신 듯, 서류를 소리 나게 뒤적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삼중으로 겹친 육망성 문양.
본국 소속의 전투마법사였다.
“죄인은 이쪽에서 처리하겠습니다. 공자님께서는 이제….”
“이 건에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
자신이 할 말을 가로챈 탓인지, 말을 멈춘 남자가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굳이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어 다행이군요.”
그렇게 말한 마법사는 작성 중이던 서류를 탁, 소리 나게 덮었다.
“플리시안의 영토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엘프란 공작은 저희 측에서….”
그렇게 운을 뗀 그가 선을 그으려는 찰나.
“그럴 수는 없겠는걸요?”
대화에 시엘이 끼어들자, 마법사는 당황한 듯 흠칫했다.
“시, 시엘 공녀님….”
“탈주자라고는 하나, 엘프란은 아일라시스 가문의 전대 공작이에요.”
그렇게 말한 시엘은 검은 장갑 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제국과 가문 사이의 기밀정보, 가문의 비급과 지식이 전부 그의 머릿속에 있죠.”
시엘이 얘기하는 것은 그의 효용 가치와 용도.
전대 공작에 대한 예우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말투였다.
“그, 그것이….”
분위기에 압도된 듯, 마법사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런 자를, 플리시안과 같은 외국의 손에 섣불리 넘길 수는 없어요.”
“무, 무슨……!”
플리시안을 대놓고 의심하는 한마디.
그 말에 마법사가 발끈했지만, 시엘은 더 말하는 대신 마력을 끌어올렸다.
쿠구구구구…….
당장이라도 짓눌릴 듯한 흉흉한 마력.
그렇지만 저자가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은, 꼭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정곡을 찔렸나 본데?’
중앙청의 다른 마법사들을 살피며 그렇게 생각했다.
핑계는 좋지만, 속을 까보면 결국 이런 법이지.
지금은 제국의 책봉을 받는 제후국이었지만, 플리시안은 남몰래 힘을 키우고 있다.
마법사들 자존심이 얼마인데, 언제까지고 제국의 발아래에 엎드릴 생각은 아닐 터.
그런 와중에 엘프란을 확보할 만한 건수가 들어왔으니, 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일 것이다.
‘머릿속을 뒤지면 제국의 마법 체계를 통째로 확보할 수 있을 테니, 이놈들도 몸이 달아오를 수밖에.’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사이.
자기 속내가 들킨 것이 여간 부끄러웠는지 전투마법사는 계속해서 횡설수설했다.
“다,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저흰 그런 의도는 조금도….”
저쪽은 일개 마법사인데 반에, 이쪽은 공작가의 가주.
쩔쩔매는 것이 당연하지.
‘정치 존나 못하네 책벌레 새끼들.’
속으로 그렇게 내뱉으며 시엘의 모습을 살폈다.
내게 있어선 저들의 행동보다 시엘의 행동이 더 의외였으니까.
‘어때요? 클라인.’
얼마 전 그녀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웃는 얼굴로 날 바라보던 시엘의 모습을.
‘당신을 위해서, 8년 동안 이렇게 강해져서 돌아왔답니다!’
얼굴 한가득 넘실거리던 광기와 마력.
그렇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때와는 달리, 여느 귀족들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 사이 성격이 죽었을 것 같진 않은데 말이지.’
그렇게 내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시엘을 바라봤을 때.
“클라인. 어때요?”
시엘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그렇게 속삭였다.
“저번보단 훨씬 얌전해졌죠?”
날 향해 웃는 시엘을 보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나 잘했지?’라며 칭찬을 바라는 듯한 모습.
가문의 가주이자 자기 아버지를 죽이러 가는 건데, 무슨 마실이라도 나가는 어조였다.
‘성질 죽이기는 개뿔, 더 심각해졌잖아….’
그녀의 말마따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던 이전과는 달랐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갈무리된, 응축된 광기.
내 약혼녀는, 예전에 봤을 때 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해졌다.
- 어째 주변 여자들 중 정상인이 없는 것 같은데.
- 그거 놀랍군. 나도 같은 생각을 하던 중이었네만.
‘시끄러.’
그런 내 내심을 읽은 듯, 고위 언데드 두 명이 슬쩍 한 마디씩 거들었다.
같은 계약문에 둬서 그런 건지, 아니면 동년배여서인지.
언제부턴가 죽이 참 잘 맞는 두 언데드였다.
‘남 일이라고 아주 신났지 새끼들….’
속으로 그렇게 툴툴거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중천에 떠오른 해가 점점 기울어, 형형색색의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아린 쪽도 일이 다 끝났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며 난 밖으로 나섰다.
계속해서 날 쫓던 교단의 끄나풀을 잘라냈으니.
내 이름을 팔아 잇속을 채우던 버러지들을, 이 대륙에서 남김없이 박멸할 시간이었다.
***
클라인과 시엘이 연회에 참석한 사이.
할 일이 없어진 스텔라와 아린은 여관방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흥~ 흥흥~”
클라인이 마련해 둔 고급 여관 객실.
아린은 클라인의 침대에 앉아 다리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공자님 허락도 없이 그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거예요?”
먼저 방에 돌아와있던 스텔라가 그렇게 물었다.
그동안 입던 수녀복과는 달리, 날렵한 복장과 성수와 수은으로 만들어진 무기들.
출발할 때 플리시안 교구로 주문했던 장비들이 이제서야 도착한 것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스텔라는 길거리 도박사를 찾아냈고, 이번에도 이번 주 급여를 전부 꼴았다.
“언니도 공자님 허락 없이 여기저기 놀러 갔으면서!”
“크, 크흠!”
아린의 일침에 스텔라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클라인의 위치와 정보를 캐내랬더니, 옆에서 같이 놀고 있으면 어떡해?!’
…라며, 방금 자기 상관에게 된통 쪼이고 돌아오는 길이었으니까.
“놀러 가다니, 현지 교회에 일하러 갔을 뿐이에요.”
혼나긴 했어도 일은 마쳤기에, 스텔라는 그렇게 말하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어?”
그러던 중.
스텔라는 아린의 치맛단 끝자락을 보며 눈가를 좁혔다.
‘시장에서 뭐가 묻은 건가?’
물감이 튄 듯, 그곳이 검게 물들어있었다.
“언니는요.”
아린의 옷에 대해 더 생각하려는 찰나.
침대 선반에 놓인 쿠키에 손을 뻗으며, 아린이 입을 열었다.
“우리 도련님 괴롭히는 사람들이랑 같은편이에요?”
으적. 으적.
우물거리는 아린의 입에서 과자 씹는 소리가 났다.
이곳에서 구한 것이 아닌, 클라인 공자가 본가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죠.”
콰득.
씹는 소리가 유난히 컸지만, 스텔라는 별생각 없이 창밖에서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요오.”
그러는 사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던 아린이 물었다.
“나중엔 스텔라 언니도, 우리 도련님 괴롭힐 거에요?”
“글쎄요…….”
대충 아니라고 둘러대면 될 법도 했지만, 스텔라는 그러지 않았다.
“위에서 명령이 내려온다면, 그렇게 해야하겠죠?”
스텔라의 대답하자, 쿠키를 씹던 아린의 입이 멈췄다.
“그래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린의 발아래에 깔린 그림자가 점점 짙어졌다.
스스스스스…….
아린의 치마에서 침대 밑으로.
그리고 스텔라가 앉아있는 의자 밑으로.
그림자는 그렇게 스텔라를 향해 나아갔지만, 생각에 몰두한 그녀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쩌어어억…….
그렇게, 무형의 그림자가 스텔라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던 그 순간.
“줄곧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한숨과 함께 그렇게 말하자, 스텔라를 향하던 아린의 그림자가 우뚝 멈춰 섰다.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말한 스텔라는 의자에 쪼그려 앉으며 말을 덧붙였다.
“같이 다니다 보니까, 아버지가 말하는 악당 같지가 않아 보여요.”
아키몬드의 환생.
극악무도한 네크로맨서.
망자의 시체와 혼을 가지고 노는 이단.
그것이 클라인을 처음 본 스텔라의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플리시안까지 동행하면서 그녀가 봐 왔던 것은, 교단의 말과는 정반대였다.
고통받던 혼들은 그의 인도에 따라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언데드는 그들 스스로의 의지로 클라인의 힘이 되고자 했다.
도구나 무기가 아닌, 하나의 삶을 끝마친 망자를 존중하는 태도.
그녀가 여태껏 상대해왔던 다른 네크로맨서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고아원 아이들이랑도 친하고, 이젠 뭐가 뭔지….”
뒤통수를 긁적이며 스텔라가 그렇게 말하던 순간.
벌컥-!
여관방 문이 열리고, 하루 동안 소식이 없었던 클라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어, 왔어요?”
감시대상이자 적이 돌아왔는데, 반가운 감정이라니.
꼭 있지도 않은 친구를 대하는 것 같다.
“약혼녀분 만나러 다녀온다길래, 좀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요.”
“…….”
스텔라가 그렇게 말했지만, 방에 들어온 클라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의 정적이 지나간 뒤.
“안되는 거 알고 있잖아. 아린.”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자, 스텔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잔뜩 굳어있는 클라인의 시선은 아린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추궁하는 듯한 어조.
그는 지금, 아린을 향해 분노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전 그게…….”
클라인의 목소리에 아린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평소의 활달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풀죽은 모습.
‘뭐야? 허락 없이 밖에 나간 것 때문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냉담한 태도에, 스텔라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네가 무슨 짓을….”
“아아, 잠깐잠깐.”
아린은 하루 동안 말 상대가 되어준 아이.
스텔라는 기꺼이 나서 아린을 변호했다.
“어디 위험한 데 갈 것도 아니고, 아무 일 없었잖아요?”
“…….”
그렇게 말하자 클라인은 스텔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푸우.
뜻 모를 한숨과 함께, 클라인은 잔뜩 굳어있던 표정을 풀었다.
“……그래요, 아무 일 없으면 됐지.”
그렇게 말한 클라인은 천천히 걸어가 풀이 잔뜩 죽어있는 아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날 위해서 그런 건 알겠는데, 너무 갔어. 알았지?”
한껏 부드러워진 클라인의 목소리에 아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킨 일은 잘했지?”
“네! 여기요!”
클라인의 목소리가 풀리자, 아린 역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딸자식 위로하는 아버지인지 뭔지.
기묘한 광경이었다.
“수녀님은 참 좋은 분이시네요.”
그렇게 생각하던 사이, 클라인의 약혼녀인 시엘이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좋은 분이라니요?”
무슨 말인가 싶어 물었지만, 시엘은 손으로 입을 가릴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좋아. 이걸로 위치는 파악했고.”
아린이 영혼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키자, 클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입니다. 스텔라 수녀.”
“일이요?”
클라인의 말에 스텔라가 되물었다.
자신에게 시선을 돌린 클라인은 이를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
“아키몬드 교단.”
“!”
클라인의 말에 스텔라가 퍼뜩 정신 차렸다.
이단을 제거하는 것은 성직자의 의무.
그 중 아키몬드 교단은, 지금 자신이 감시하고 있는 이 남자 이상으로 위험한 존재였으니까.
“신성 교단의 수녀가 못 본 체하지는 않겠죠. 안 그렇습니까?”
그 말과 함께 채비를 갖춘 클라인은 곧바로 여관을 나섰다.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한 움직임.
스텔라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따라나섰다.
“좀, 아깝네요.”
스텔라와 아린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시엘의 눈이 좁아졌다.
“조금만 늦게 왔으면, 날파리 하나가 그대로….”
빛이 사라진 검은 눈동자에 담긴 것은, 엉망진창으로 얽힌 광기.
“아니, 아니죠.”
그렇지만 시엘은 곧바로 얼굴빛을 고치며 클라인을 따라갔다.
“아직 적인 게 확실하지도 않은데 손을 대면, 미움받겠죠.”
방금 전 아린이 그랬듯이.
그럴 순 없다는 생각과 함께, 시엘은 한 손에 모아둔 마력을 흩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