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해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시엘 공녀?”
“헛소리다. 공녀는 이미 우리 감시원들이…!”
그림자들 몇몇이 코웃음을 쳤지만, 몇몇 이들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연락이 끊겼다고…?”
손목의 표식을 확인한 그림자 몇몇의 몸이 굳었다.
‘사전에 통신 마법을 발동해둔 듯한데, 뭔가 잘못됐군’
당연하지.
임시 꼬리표가 붙었다 한들, 아일라시스의 가주.
제국 최고의 전투마법사가, 암살자들 통신 마법을 내버려 둘 리 없지.
“제길, 뭔가 이상해!”
“만약 시엘 공녀가 정말로 여기 있다면…!”
“일단 후퇴한다!”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챈 듯, 그림자 몇몇이 몸을 빼려 했다.
“안돼요. 그렇게 멋대로 가려고 하면.”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쿵-!
“끄으으?!”
내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그림자 중 하나가 고꾸라졌다.
“이봐, 무슨 일이야!?”
“아악…! 끄아아아……!”
갑자기 주저앉은 동료의 모습에 당황한 듯, 다른 암살자들이 소리쳤다.
“몸이…! 무거워…!”
팔다리를 모두 땅에 댄 채 몸을 떠는 암살자.
마치 자신의 몸이 너무 무거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몸짓이었다.
“당신들에게는 듣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있는데 말이에요.”
싱그러운 미소를 지닌 시엘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귀족들이 입는 연회용 드레스가 아닌, 마법사들이 입는 모자와 로브 차림.
“묻는 말에 대답하세요. 아니면….”
그렇게 말을 흐린 시엘은 다른 그림자들을 둘러보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 순간.
“자, 잠깐만…!”
“뭐야, 왜 몸이 멋대로…?”
암살자들 중 몇몇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룬도, 술식도 없이 손짓만으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니.
심지어 모든 마법 중 가장 복잡하다는, 중력조작 마법을.
“제길 이게 뭐야?!”
“움직일 수가 없어…!”
발 디딜 곳이 없어지자, 암살자들은 공중에서 발이 묶여버렸다.
‘저기에서 끝나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공중에 떠오른 암살자들의 몸이 점점 움츠러들었다.
“어, 어어…!”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자신을 사방에서 짓누르는 형상.
이전에 영지에서 봤던 마법이었다.
뿌득! 우그그그…!
소름끼지는 파열음이 어두운 밤거리를 가득 메웠다.
관절이 부러지고, 살이 짓뭉개지는 소리였다.
“으으으으?!”
“살려, 살려주…!”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다 한들, 이미 늦었다.
자비를 구하는 비명조차도 압착으로 인한 소음에 짓눌린 채.
암살자들의 몸은 점점 사람의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아, 아아…! 아아아아…!”
비명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짓눌린 단말마.
철퍽-!
그 끝에 남은 것은, 피를 뿜어대는 네모반듯한 정육면체 뿐이었다.
“……!”
“이런, 미친……!”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낙엽의 암살자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음.”
시엘의 목소리와 함께, 이번엔 방금 전의 두 배가 되는 암살자들이 공중에 떠올랐다.
“으, 으으으…!”
“자, 그럼 이제 질문할게요?”
천천히 다가간 시엘은 아직도 부복해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시선을 맞췄다.
“엘프란. 어디에 있어.”
이윽고 들려온 것은 평이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
벌레와 대화하는 듯, 시엘의 목소리에는 혐오감이 가득 묻어있었다.
“내가 그걸 말할 것 같나?”
실패를 직감한 듯, 암살자의 눈에 비장미가 감돌았다.
“낙엽의 의뢰는 철저한 비밀이다. 우릴 전부 죽인다 한들, 너흰 단 한 줌의 정보도 얻을 수 없다.”
정보와 방첩을 업으로 삼는 이들은 보안이 생명.
자백제나 정신조작 마법을 써 봤자, 그 전에 자살하면 그만이다.
“그럼 죽여야지.”
그가 시엘에게 더 말하기 전에, 대화를 가로챘다.
“뭐라고?”
내 말을 들은 암살자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부 죽이세요. 시엘.”
그렇게 말한 난 심장에서 마기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저것들 시체에다가 물어보면 그만이니까.”
***
“동북부 삼림지대 중앙, 버려진 마탑이라….”
죽은 암살자의 영혼이 흘린 정보에 내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아키몬드 교단과 엘프란 백작이 한통속이란 말이지?’
목표를 찾았다는 기쁨의 웃음.
제국 공작이 사이비랑 붙어먹었다는 상황이 웃겨서 웃음.
그리고, 팔자에도 없는 집안 싸움에 끼었다는 헛웃음이기도 했다.
“클라인!”
그러는 사이, 시엘은 내게 다가와서 감사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덕분에 말도 안 되는 사실을 알았죠.”
그렇게 운을 뗀 난 탄식하듯 내뱉었다.
“제국의 전 공작과 지하세계의 사이비 교단이, 버려진 마탑에서 은밀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걸.”
일전에 이안이 말했었지.
플리시안에서 구린내가 난다고.
‘구린내 정도가 아니라 시체 썩는 냄새였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키몬드 교단.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은 것들이, 이젠 마탑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니.
“그리고 그것을 본국에 들키지 않도록 은폐해온 것이….”
“하늘마탑의 마탑주, 갈론드 란.”
시엘의 말을 받으며 바닥에 엎어진 첼레그를 보았다.
“이 녀석의 아비였다는 말이네요.”
눈앞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광경에 그는 이미 눈을 까뒤집은 채 기절한 후였다.
“아키몬드 교단과 엘프란. 이 둘의 존재를 은폐하는 대가로, 지식을 제공받은 겁니다.”
마탑주 갈론드 란의 아들인 첼레그 란.
그는 갈론드가 얻어낸 지식의 최대 수혜자였다.
평범했던 자질을 뚫고 동년배 최고 반열에 오르는 데에 성공했으니.
“그럼 간단하네요.”
그렇게 말한 시엘의 몸에서 흉흉한 마력이 넘실거렸다.
“갈론드를 죽이고, 버려진 마탑으로 가서 전부 죽여버릴까요?”
“마탑주를 건드리면 외교 문제입니다.”
웃는 얼굴로 저러니 곱절은 더 살벌해 보이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난 그녀를 만류했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클라인?”
시엘의 질문에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쩌긴 어쩝니까. 법대로 해야지.”
그렇게 말한 난 첼레그에게로 다가갔다.
시엘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본 탓일까.
그는 이미 눈을 까뒤집은 채 기절해있었다.
짜악-!
따귀를 후려치자, 화들짝 놀란 첼레그가 번뜩 정신 차렸다.
“으, 으어어?!”
“정신이 드냐?”
그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곧바로 첼레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크, 클라인 공자! 내게 이런 짓을 한다면, 하늘마탑이 가만히…!”
“입 닥쳐.”
기가 찬다.
마탑 물 먹은 애들 콧대 높은 게 하루 이틀이 아니긴 하다만.
설마 이 지경까지 와서 마탑이니 뭐니 지껄일 여력이 있다니.
“방금 죽을 뻔한 거. 알고 있지?”
내가 그렇게 묻자, 잠시 생각하던 첼레그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 역시 처음 쏘아진 암기가 누굴 향하고 있었는지 눈치챈 탓이다.
“좋아. 상황파악은 된 것 같고.”
엘프란과 아키몬드 교단의 존재는 철저한 기밀일 터.
그것을 누설한 셈이니, 첼레그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할래?”
“무, 뭘 말이냐…?”
“냐?”
그의 말꼬리를 잡은 내가 검손잡이를 툭 건드렸다.
“무, 무! 뭘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거지.”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난 첼레그에게 말했다.
“네가 할 일은 둘 중 하나다. 협조하던가, 같이 죽던가.”
“……?”
상판을 보아하니, 이해를 잘 못한 것 같은데.
난 그의 얼굴에 시선을 가까이 한 채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플리시안 본국으로 가서 네 아버지의 죄를 전부 고하던가.”
“……!”
“아니면 아키몬드 부활에 협력한 대역죄인으로 대륙의 공적이 되던가.”
처음 한 마디에는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두 번째에선 조용해졌다.
200년의 시간.
그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키몬드라는 이름이 주는 공포는 아직까지도 대륙에 남아있다.
‘하긴, 당장 나만 해도 그렇지.’
아키몬드의 환생일지도 모른다.
진위 여부조차 모호한 소문 때문에 공작가의 일원을 교화소에 처넣는 것이 대륙이다.
- 너 같은 경우엔, 진짜로 일을 잘한 거잖아.
‘조용히 해.’
하여튼 교단놈들, 감 하나는 좋단 말이지.
“둘 다 싫어?”
내 생각이 계속되는 사이.
이제는 아예 거멓게 죽어가는 첼레그의 얼굴을 보며 난 흡족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한 가지, 네 죄를 사할 방법이 있다.”
네크로맨서들이 으레 짓는 사악한 웃음과 함께, 난 첼레그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마탑으로 안내해. 네 아비와 거래해야겠어.”
***
콰직-!
발길질과 함께 낡은 판자에 구멍이 났다.
인적없는 낡은 오두막.
그렇지만 그 오두막을 뒤지는 이안은 땅에 닿은 두 발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다섯 정도군.”
마력로의 마력을 끌어올린 이안은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특징 없는 널찍한 나무벽.
그곳에 마력을 담은 이안의 검이 작렬했다.
쿠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터져나간 벽면.
벽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커다란 동굴 입구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눈은 속여도, 바람은 못 속이지.”
동굴 입구에서 불어오는 미세한 바람.
맹인인 그가 아니었다면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이질감이었다.
- 크르르르….
물론, 그가 느낀 것은 바람뿐만이 아니었지만.
“시체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을 하더구나. 이 망할 놈들아.”
이빨을 드러내며 웃자, 동굴 안에 있던 온갖 뒤틀린 것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 키에에엑!
- 캬아아아악-!
머리 다섯 달린 사슴에, 좀비.
그리고 살덩이가 가득 들어찬 육중한 무언가까지.
소속 없는 네크로맨서들이 흔히들 하는 악취미였다.
“징그러운 새끼들”
물론, 이 언데드를 만들어낸 놈들은 평범한 네크로맨서가 아니다.
아키몬드 교단.
북부 대장벽을 언데드로 침공한 네크로맨서 집단.
사람을 죽여 언데드를 양산하는, 대륙의 암덩이와 같은 족속들이었다.
“누, 누구냐?!”
“어떻게 이 은신처를 알아낸 거지? 완벽한 위장이었을 텐데…!”
뒤틀린 언데드들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로브 차림의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그놈의 위장 차암~ 잘해놨더구나.”
결코 들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듯, 그들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찾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를 게다, 이 버러지들아.”
적개심이 뚝뚝 묻어나는 한마디.
그 말을 듣는 동시에, 검은 로브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이안 라인란트?!”
“제국의 기사 학살자다! 왜 여기에 있는…!”
기사 학살자.
그 말에, 이안은 이젠 더 떠지지 않는 눈에 힘을 주었다.
확연한 분노.
그렇지만, 이안이 분노하는 것은 이들의 악행 때문이 아니다.
“왜 여기에 있냐고?”
그가 분노하고 있는 대상은, 저들의 배후에 있는 자.
의도적으로 이들을 지원하고 부추겨,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
“제국의 끄나풀들을 잡아 족치러 왔지.”
그 말과 함께, 네크로맨서들은 서둘러 언데드들에게 명령했다.
“놈을 막아! 시간을 벌어…!”
놈을 죽여라, 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는 하지 않는다.
버려졌다 해도, 그는 라인란트.
노쇠하고 눈이 멀었다 한들, 그 검이 가진 예기는 현 라인란트 공작과 견주어도 될 정도였으니까.
키이이잉-!
이안의 손에서 눈부신 마력광이 터져나갔다.
라인란트의 비기 중 하나, 하인켈의 유성검.
쿠콰콰쾅-!
별빛처럼 쏘아져 나간 마력광이 직선상에 있는 모든 뒤틀린 언데드들을 갈아버렸다.
“쯧, 내뺐군.”
그러나, 유성검이 베어낸 것은 수십 구의 언데드들 뿐.
그들을 만들어낸 네크로맨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후두두둑…!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조각 몇 개를 맞자, 이안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에이 씨, 두 번은 못쓰겠는데.”
그렇지만 이미 통로로 이어지는 길은 깔끔히 정리된 상황.
시체조차 남지 못한 통로를 향해 걸으려는 순간이었다.
“꾸꾹?”
뭐야, 어디서 새가 들어왔나?
등 뒤에서 들려온 울음소리에 이안의 시선이 돌아갔다.
“꾸우욱-!”
온통 시커먼 색의 올빼미.
다리에 매고 있는 것은 라인란트 가문 전서구임을 나타내는 발찌였다.
“이건 또 뭐야.”
하인켈 녀석이 보냈을 리는 없고….
그렇게 생각하며 서신을 펼친 이안은 점자를 훑더니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하여튼,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인사할 시간도 없이 일부터 시켜대다니.
버릇없는 조카 놈, 다시 만나면 잔뜩 혼내줘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