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여
“당장 검을 치우시오! 클라인 공자! 아니면…!”
“아니면?”
날 말리는 마법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되려 첼레그의 목을 찍어누르고 검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꺽…! 커헉…!”
“말해보십시오. 검을 치우지 않으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라인란트 공자의 서슬 퍼런 눈빛.
마탑에 틀어박힌 책벌레들이 전장을 경험한 자의 시선을 감당해낼 리 없다.
본국의 전투마법사들이라면 또 몰라도 말이지.
“끄으……!”
숨이 넘어가기 직전.
첼레그는 방금까지의 여유는 온데간데없이,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죄…송…! 제발, 살… 려…!”
‘이쯤이면 되겠군.’
침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
그것을 본 난 그의 목을 누르고 있던 검을 치웠다.
“헉-! 컥! 커억! 허억-!”
모자란 숨을 몰아쉬며 캑캑대는 첼레그를 내려다보는 나.
참, 못 할 짓이다.
사람 하나 살리자고 이런 연기를 해야 한다니.
근데 뭐 어쩌겠어.
남의 약혼녀한테 치근거린 게 죽을죄는 아니잖아?
“바, 방금 저게…!”
“5위계의 마법사를, 마력 한 줌 쓰지도 않고 제압하다니?”
날 보며 수군거리는 마법사들을 무시한 채 첼레그를 바라보았다.
“다음부턴 신경 좀 쓰지. 서로 얼굴 붉힐 일 없게.”
“크으……!”
그렇게 말하며 대충 상황을 끝내려던 와중.
- 클라인.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 레이븐의 목소리에 연회장 구석을 살폈다.
‘이것 봐라.’
내 눈에 들어온 한 무리의 남자들.
한창 갑갑하던 찰나에, 이 파티에 온 보람이 있었다.
‘귀하신 귀족분들 연회에, 웬 쥐새끼가 기어 들어왔구만?’
귀족들이 흔히 입는 연미복 차림.
하지만, 옷매무새와 장신구가 엉망진창인 것을 보며 난 확신했다.
날 추적하던 암살자 조직, 낙엽.
그놈들이라고.
“밴시.”
연회장 천장에 띄워놓은 밴시를부르자, 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 애새끼 보모 노릇이나 할 줄 알았는데, 클라인 공자라니. 월척입니다.
- 본부로 돌아가서 대장께 보고한다. 넌 마탑주 아들 잘 지켜.
그렇게 말하면서도, 남자는 내 쪽을 연신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래, 본부가 있단 말이지?’
파츳-!
대화를 듣는 동시에 마기를 움직였다.
내 시선이 닿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 술잔을 홀짝이는 남자.
그의 그림자엔 이미 추적의 룬이 심어진 상태였다.
‘좋아, 이걸로 놈들 움직임은 알아서 파악할 테고.’
그렇게 생각한 난 바닥에서 비척거리는 첼레그를 보았다.
‘이 반푼이가 낙엽의 보호를 받고 있다라….’
알량한 재능 한 줌만 믿는 반푼이인 줄만 알았는데.
이런 뒷구멍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적당히 자극해서 미끼로 쓰면 딱이겠는데.’
그런 생각과 함께 첼레그를 보며 눈을 빛내던 와중.
“클라인 공자!”
이 철부지의 아비인 마탑주, 갈론드 란이 내게 소리쳤다.
“대관절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짓입니까?!”
얼굴이 시뻘게진 갈론드가 계속해서 주절거렸다.
연회장에서 아들이 이 꼴을 당한 탓에?
아니.
‘날 교보재 삼아서 아들을 돋보이게 할 생각이었는데, 결과가 시원찮았으니까.’
온 연회장이 떠나가라 소리치는 갈론드를 보며 생각했다.
‘사람 하나 살리자고 끼어든 건데, 예상치도 못한 정보를 얻었어.’
하늘마탑과 낙엽이 서로 한통속이다.
마탑주의 아들을 조직 직접 보호할 정도로 밀접하게.
‘보호? 아니지. 이건 보호가 아니라 감시야.’
이 자의 머릿속에 뭔가가 있다.
내 목숨을 노리는 놈들에게 아주 치명적인 정보가.
그렇게 생각을 마친 난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예, 미안합니다, 첼레그.”
전혀 미안하지 않은 사죄.
그와 동시에, 난 바닥에 쓰러진 첼레그를 비웃었다.
“이 정도는 본가 수련 생도들도 막아내는 수준이라서. 힘 조절을 못 했네요.”
“뭐, 뭐라…?”
그 말에 갈론드가 발끈했지만, 당사자인 첼레그는 캑캑대느라 그 말을 곱씹을 겨를도 없는 듯했다.
“실례.”
짧은 인사와 함께 등을 돌렸다.
원하는 정보는 다 얻었고, 마법사놈들 연회도 한바탕 뒤집어놨으니.
여기서 더 재미 볼 일은 없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스윽.
시엘이 내 옆으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뭐합니까?”
시엘을 보며 그렇게 물었지만, 그녀는 보란 듯 몸을 가까이할 뿐이었다.
“나가시는 거잖아요? 저도 같이 가려구요.”
“그럼 그냥 가면 되지, 굳이 저와 함께 갈 이유가 있습니까?”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말하자, 시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클라인의 약혼녀잖아요.”
미치겠다.
처음 봤을 땐 부담스러웠는데.
이젠 저 약혼녀라는 말이 무슨 족쇄처럼 느껴진다.
“표면적인 이유는 알겠고. 진짜 이유는?”
목소리를 낮춰 그렇게 묻자, 시엘은 방긋 웃으며 내 말에 답했다.
“저 남자, 마력이 이상하더라구요.”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그렇게 말하는 시엘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하다는 말은?”
“마나 코어가 비정상적으로 커요. 제 것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말한 시엘의 눈가가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남의 마력 기관을 이식하는 기술은, 엘프란의 전문 분야구요.”
말인즉, 첼레그는 낙엽뿐만 아니라, 엘프란과도 연관되어있다는 것.
‘목적이 같단 말이군.’
그렇게 생각한 난 고개를 끄덕이며 연회장을 나갔다.
“아니, 저게 무슨…!”
“시, 시엘 공녀!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시는 건…!”
떠나가는 시엘을 붙잡으려는 플리시안 귀족들의 말소리와.
“클라인 라인란트….”
“크으……!”
당장이라도 죽일 듯 날 노려보는 하늘마탑의 마법사들을 뒤로 한 채.
***
“…내가 분명 그렇게 나간 지 두 시간이 채 안 된 것 같은데.”
시간은 이미 어두운 한밤중.
난 내 앞을 가로막은 세 명의 인영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사이에 날 족치겠다고 달려온 거냐, 너네?”
그렇게 말하자 내 앞길을 가로막은 검은 로브 셋이 스산하게 웃었다.
스산한가?
모르겠다.
제 딴에는 분위기 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그냥 양아치들과 진배없었다.
“태연한 척해도 소용없소. 클라인 공자.”
“마탑주의 자제를, 그것도 연회장 한복판에서 핍박하다니.”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추적자가 있다 해서 기대했건만….’
이런 일이 처음인 듯 어색하기 짝이 없는 구성.
그리고 그들 사이에 섞인 첼레그까지.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이놈들은 낙엽의 암살자가 아니다.
생초짜들이지.
“하늘마탑과 척진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소!”
“이곳은 당신 가문의 힘도 닿지 않는…!”
“지랄한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들이.”
그들의 말을 끊으며 난 계약문 두 개를 작동시켰다.
쿠르르르르…!
푸르게 빛나는 계약문에서 걸어 나온 두 언데드.
데스나이트인 레이븐.
그리고 언데드 리치, 앙헬이었다.
“언데드다!”
“한쪽은 데스나이트. 다른 한쪽은 뭐지?”
“볼 것 없다. 어차피 변변찮은 언데드 나부랭이겠지.”
듣고 있자니, 이것들을 상대하겠답시고 고위 언데드를 꺼낸 내가 바보 같아졌다.
‘마법사라는 것들이, 마력감지도 제대로 안 하냐? 리치인 거 안 보여?’
책상물림으로 마법을 배운 놈들은 이게 문제다.
위계가 높고, 서클이 많으면 뭐하나.
실전에서 해야 할 기본적인 조치도 안 하는데.
“작전대로 움직인다. 내가 언데드의 움직임을 막는 사이, 나머지는 클라인 공자를…!”
뭐라고 주절거리던 이들이 손을 뻗자, 형형색색의 마력광이 뿜어져 나왔다.
투화악-!
거대한 화염구와 수십 줄기의 마력탄.
촤르륵-!
마력으로 이루어진 사슬이 나와 언데드들의 몸을 꼼짝없이 옭아맸다.
“잡았어!”
“죽이진 마라! 마탑으로 데려가서 아버지께…!”
승리를 직감한 이들이 그렇게 외치던 순간.
쿠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음이 인적없는 거리를 가득 메웠다.
“좋았어!”
“제아무리 네크로맨서라 한들, 이 만큼의 마법을 맞고 무사할 리가…!”
승리감에 도취 된 그들이 거기까지 말한 순간.
- 화염구에 마력탄, 구속 술식. 거기에 소음차단이군.
내 왼편에서 들려오는 앙헬의 목소리.
방금 전까지 우릴 얽매고 있던 마법들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상태였다.
“분석할 가치도 못 느끼겠다.”
망자의 목소리로 양옆에 선 언데드들에게 명령했다.
- 죽이진 마. 외국에서 살인하면 골치 아프다.
투화악-!
화염구가 만들어낸 연기를 뚫고, 레이븐의 신형이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어, 어어?!”
“뭐야! 어떻게 그걸 맞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인지하지 못한 듯, 저들의 대응이 굼떴다.
“크으…!”
상황을 파악한 듯, 첼레그가 뒤늦게 방벽을 펼쳤지만 헛수고였다.
파창-!
“뭐야, 왜 방벽이 도중에…!”
생성되는 순간 맥없이 깨져버리는 방벽.
그제서야 생각이 닿은 듯, 눈을 부릅뜬 첼레그의 눈이 앙헬을 향했다.
“디스펠…?”
자신들을 향해 손을 뻗은 앙헬을 보며, 첼레그가 황망하게 중얼거린 순간.
스걱-!
레이븐의 검이 첼레그를 제외한 두 마법사의 팔을 베어버렸다.
“으, 아아악?!”
“손이! 내 손이이이-!”
고통에 못 이겨 허물어지는 마법사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죽이지 말라고 했지, 사지 멀쩡하게 살려오란 말은 안 했으니까.’
역시, 오래 계약한 언데드는 이래서 좋아.
굳이 말 안 해도 이렇게 잘 처리해주잖아?
“히, 히이익?!”
털썩!
피를 본 것은 이번에 처음이었던 걸까.
균형을 잃은 첼레그의 몸이 그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차라리 잘 됐어, 때마침 물어볼 것도 있었으니.”
천천히 다가간 난 그의 목에 검을 겨눈 채 말했다.
“묻는 말에 대답해. 안 그러면 죽여서 언데드로 만들어줄 테니까.”
네크로맨서의 협박은 죽음을 넘나드는 법.
더 이상의 저항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첼레그에게 서슬 퍼런 목소리로 물었다.
“널 감시하던 시궁쥐 새끼들. 목적이 뭐냐?”
“무, 뭐라……!”
흠칫 몸을 떤 첼레그가 입을 다물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 말해.
눈앞에서 목이 날아간 뒤에 들려오는 망자의 목소리.
공포가 극에 달한 그로서는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아버지께서 붙힌 사람들이야! 난 아무것도…!”
“차기 마탑주께서 자기 마탑 돌아가는 꼴을 모른다고? 거짓말도 좀 있어 보이게 하지 그래?.”
“그……!”
이렇게 말하자, 그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갈등하던 그의 입가가 달싹였다.
“에… 엘프란….”
추측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전대 아일라시스 공작이, 암살자 집단과 무슨 상관이지? 그리고 넌?”
내가 거기까지 물어본 그 순간.
카앙-!
내 등 뒤에서 불꽃이 튀었다.
레이븐이 내 쪽으로 날아오던 무언가를 튕겨낸 것이었다.
땡그랑-!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극독을 품은 비수.
내가 아니라, 첼레그를 향해 쏘아진 것이었다.
“거 참, 언제 튀어나오나 했네.”
툴툴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산한 밤거리는 어느새 수십 명의 그림자에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림자 중 하나가 내게 물었다.
“그럼, 진작에 알고 있었지.”
그렇게 너스레를 떤 난 허리에 찬 노르드빈트를 뽑으며 말했다.
“연회장을 나선 순간부터 썩은내가 진동을 했는데 말이야.”
“……!”
“안 그래? 더러운 시궁쥐 새끼들아.”
그렇게 말하자 날 둘러싼 그림자들의 눈이 살벌해졌다.
스르릉-!
곳곳에서 들리는 무기를 뽑는 소리.
그것을 확인한 난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입질이나 한번 보려고 했는데, 월척입니다.”
그렇게 운을 띄운 뒤,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