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일부러 그런 거죠?
얘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어떻게 내가 있다는 걸 알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시엘은 이미 내 두 손을 잡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클라인!”
“아, 예….”
“교화소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 거예요? 다친 데는….”
그간 걱정이 많았던 것인지, 시엘은 내 몸 곳곳을 살피기 급급했다.
‘교화소에 끌려간 건 또 어떻게 알았…. 아니다. 신경 쓰지 말자.’
초대장에 적혀있던 시엘의 직책을 떠올리니 지금 일어난 상황이 대충 납득이 갔다.
[아일라시스 공작가 임시 가주.]
임시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한들, 그 칭호가 주는 무게는 외면할 수 없다.
지금 날 걱정하고 있는 이 소녀가, 아일라시스 공작가의 가주.
제국 최고의 마법사다.
‘공작가 정보망이면, 내 위치 정도는 금방 파악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내 등 뒤에서 아린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어? 그때 봤던 이쁜 공녀님이다!”
내 옷깃을 잡은 채 그렇게 말하는 아린을 보자….
꿈틀.
시엘의 눈꼬리가 움찔거렸다.
“뭐야, 플리시안에 아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윽고 스텔라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시엘의 웃음은 점점 더 진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시엘의 표정을 보며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를 떠올렸다.
편지 한 장 달랑 남겨놓고 자길 바람맞힌 약혼자.
그랬던 인간 여관방에서 여자가 튀어나온다면….
약혼녀 입장에서는 뭐라고 생각할…?
‘아, X됐다’
불길한 예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여자는 데이트를 방해받았다며 사람을 정육면체로 짓이기는 마법사.
한 마디라도 삐끗하면, 이 자리에서 전투가 일어나도…!
“신성교단의 스텔라 수녀님, 맞으시죠?”
일촉즉발의 상황을 대비하려던 찰나, 밝은 표정을 한 시엘이 스텔라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클라인 공자님의 약혼녀인 ‘시엘 라 아일라시스’라고 합니다.”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예를 표하는 모습.
귀족가의 영애 티를 팍팍 내는 움직임이었다.
“아.”
갑작스러운 소개에 잠시 얼이 빠져있던 스텔라가 부랴부랴 고개를 숙였다.
“케르시아스 신성교단 전투수사, 스텔라 라프탈리아입니다.”
물론, 그 말과 함께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에요? 약혼녀가 왜 갑자기 찾아오고, 제 이름은 또 왜…? ’
‘묻지 마십쇼. 저도 지금 뭔 상황인지 감 안옵니다.’
그렇게 나와 스텔라가 눈짓으로 서로를 나무라던 사이.
“안녕하세요!”
“……?”
아린은 시엘에게 다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전 도련님 하녀고, 이름은 아린이에요!”
“아…….”
“그리고 얘는 아울이에요!”
그렇게 말한 아린은 양손을 뻗어 시엘에게 아울을 보였다.
“꾸꾹?”
그러자 시엘은 잠시 동안 아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싱긋.
판에 박은 미소와 함께 아린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래서, 이렇게 깜짝 방문을 한 이유는요?”
내가 그렇게 묻자, 시엘은 품속에서 내가 받은 것과 같은 초대장을 꺼내 들었다.
“연회에 가려는데, 에스코트 해 주실 신사분이 필요해서요.”
시엘의 말을 들으며 초대장의 첫 문장을 떠올렸다.
[신대 아일라시스 공작가 가주의 방문을 기념하여….]
‘그게 설마 얘일 줄이야….’
이미 초대장도 받은 마당에.
직접 데리러 오기까지 했으니, 안갈수도 없다.
“가죠.”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시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하지만 저 지금 순례 중이라서, 입을 옷이 없습니다만.”
여관 2층 계단을 내려가며 그렇게 말했다.
모래먼지로 잔뜩 더러워진 여행복.
그것을 내보였지만, 시엘은 걱정 말라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시, 시엘 님. 오셨습니까….”
깍듯한 예의로 시엘을 대하는 아일라시스 가문의 마법사.
고개를 숙인 남자에게 웃어보이며 시엘이 말했다.
“지시한 건 전부 준비해놨지?”
“예, 예…!”
그 말에 곧바로 고개를 숙인 마법사는 마차 한 칸을 열어 날 안내했다.
“미친, 이게 다 뭐야?”
남성용 연미복과 연회용 정복으로 가득 찬 마차.
금실에 오우거 가죽에 보석에….
이거 다 하면 얼마나 하는거지?
‘다 합치면 요새 하나 정도는 지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음?”
아일라시스의 재력을 몸소 느끼며 옷을 고르던 도중.
고개를 깊이 숙인 마법사의 모습을 살폈다.
“잠깐만, 당신…?”
“……!”
철가면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남자가 내 시선을 피했다.
가면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짓뭉개진 흉터.
그렇지만 혼의 파장을 통해, 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 라인란트에 쳐들어왔던 다섯 명 중 하나, 맞지?”
시엘의 마법에 죽기 직전까지 갔던 이들 중 한 명.
그렇지만 그에게던 더 이상 예정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그때는 정말, 송구했습니다. 제가 가, 감히….”
오만하게 나와 시엘을 내려다보던 예전과는 달리.
그는 공포에 몸을 부르르 떨며, 시엘과 내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공작이 됐다는 것도 놀라운데, 대체 그동안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거야…?’
가문의 가주가 아니라, 무슨 괴물을 보는 듯한 표정.
두려워하는 남자의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내 연미복 차림을 본 시엘이 감탄사와 함께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 잘 어울리네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없네요. 참 신기하게도.”
마차에서 대충 옷을 골라 입은 뒤, 이리저리 움직여봤다.
준비된 옷은 이미 내 몸 사이즈에 정확히 맞춰져 있었다.
‘내 옷 사이즈는 도대체 언제 알아낸 걸까….’
소소한 공포를 느끼며 마차에 올랐다.
“그래서, 진짜 제 얼굴 보자고 아일라시스 공작께서 찾아오신 건 아닐 테고.”
내가 그렇게 운을 떼자, 시엘이 후후 웃음소리를 냈다.
“반 정도는 맞아요. 저번에 만났을 때는 별로 오래 있지도 못했잖아요.”
일부러 도망간 건데.
그 말을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검은 드레스 차림의 시엘은 그림에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자신을 모시는 시종을 바라보던 그 차가운 눈.
그녀의 본성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썬 글쎄….
거북하기 짝이 없지.
“반 정도는 절 보러 왔다 치고. 나머지 반은 뭡니까?”
내 물음에 시엘은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엘프란을 죽이러 왔어요.”
…잠깐.
누굴 뭐 어떻게 한다고?
“엘프란 아일라시스를 말하는겁니까? 당신 아버지를요?”
잘못 들었나 싶어 시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봉제 인형에 억지로 박아 넣은듯한 미소.
“공작위를 놓고 벌인 마법전에서 패배한 주제에, 가문의 비보를 가지고 도망쳤거든요.”
엉망진창으로 엉킨 눈.
그녀는 지금, 허튼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시엘 영애, 그리고 클라인 공자까지. 어서오십시오,”
곳곳에 떠 있는 옛 마법사들의 마법진과 룬들.
마법사의 왕국이라 불리는 플리시안의 왕성이기에 볼 수 있는 방식이었다.
‘제국의 승인이 없으니 공작 칭호는 붙이지 않는건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신원을 확인한 문지기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이번 학회에 발표된 마력 회로 이론에 대해서 말인데….”
“저번 발표회는 놀라웠습니다. 교수, 훌륭한 의견이었어요!”
“제국 측에서 의뢰한 폭격 마법에 대해선….”
이미 연회장은 마법 이론이나 학술에 관한 대화로 가득한 상황.
사업, 정치 얘기만 해대는 다른 귀족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연회라기보단 학회라고 봐야겠는데.’
그렇지만 나와 시엘의 등장으로, 차분하던 마법사들의 토론장에 열기가 일었다.
“저 아이가 시엘?”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소녀가 아닌가?”
애초에 이 피로연의 목적은 시엘의 환영회.
연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단연 그녀였다.
‘환영이라기보단, 탐색전 같아 보이지만 말이야.’
호승심. 경외. 의문.
시엘을 보는 마법사들의 눈에서는 각자 상반된 감정이 어지럽게 뒤엉켜있었다.
“그리고 함께 있는 것이….”
“클라인 공자.”
물론,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시엘 뿐만이 아니었다.
“공작가의 자제가 사령술이라니….”
“마력을 쓰지 못한다고는 하나, 그런 사술에 빠지는 게 가당키나 한가?”
“라인란트도 끝이군. 저딴 걸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다니….”
‘다 들린다. 책벌레 새끼들아.’
…내게 보내는 시선은 그리 우호적이진 않았지만.
- 공작가의 귀빈인데, 대접이 시원찮군?
‘당연하지.’
은근슬쩍 말을 걸어오는 앙헬의 목소리에 답하면서도 딱히 부정은 하지 않았다.
‘플리시안 마법사들이 네크로맨서 싫어하는 게 하루 이틀인가. 안 그래?’
- 맞는 말이군.
마법사.
그중에서도 마탑의 마법사들의 시선에서, 네크로맨서의 존재는 이단이었다.
교단의 성직자들은 네크로맨서를 악하다고 생각했고, 마탑의 마법사들은 네크로맨서를 천하다고 생각한다.
[마력을 타고나지 못한 낙오자의 차선책.]
[정령사조차 되지 못해 시체나 파먹는 기생충.]
…라는 둥 실컷 무시했었지.
난 그 대답으로 대마법사 아칸의 머리를 밟아줬으니.
아키몬드의 환생이라는 내 존재가, 영 탐탁지 않을 것이다.
‘목적은 정보를 캐는 거니, 주목받으면 되려 곤란하지.’
영혼 상태인 앙헬에게 말하던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시엘 공작 전하!”
시엘에게 말을 거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훤칠한 키에 호감형 외모.
금발을 찰랑이는 20대 정도 되는 마법사가 예법에 맞춰 인사를 건넸다.
“누구신지?”
“첼레그, 란이라고 합니다.”
그의 이름을 듣자, 시엘에게 접근하려던 다른 마법사들이 입을 모았다.
“첼레그라면, 갈론드 마탑장의….”
“마법전에서 아카데미 교수를 쓰러트렸다는 천재 아닌가?”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5위계에 오른 천재.
아카데미의 자랑.
어지간히도 잘난 놈이라는 소리였다.
“그러신가요?”
그렇지만 첼레그의 인사를 받은 시엘의 눈엔 지독한 무관심만 담겨있을 뿐이었다.
“신세대의 마법사로서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괜찮으시면 연회 후에 식사라도….”
그렇게 말문을 연 첼레그라는 남자가 시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던 순간.
툭.
“엥?”
첼레그와 내 어깨가 부딪혔지만, 그는 내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였다.
‘허, 이것 봐라?’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첼레그는 시엘을 향해서만 입을 열고 있었다.
약혼자 앞에서 의도적으로 날 무시한 것이다.
‘바빠 죽겠는데, 여기도 정치놀음이냐.’
그렇게 생각했지만, 난 오히려 피식 웃으며 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니 맘대로 해라.’
약혼녀한테 치근덕거리네, 뭐네 해 봐야 내 쪽만 손해다.
저쪽도 아마 그런 반응을 원한 것이겠지.
꿈틀.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날 무시하는 첼레그의 행동에, 시엘의 눈에 처음으로 감정이 담겼다.
“…….”
가면을 두른 듯 움직임 없는 웃음.
그곳에 숨겨진 싸늘한 적의.
그리고 서슬 퍼런 살기.
‘아, X발.’
다소곳이 모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자, 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텁.
“어이.”
첼레그를 부르며 그의 어깨를 잡자, 그는 슬며시 눈을 흘기며 날 꼬나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클라인 공자님.”
은근한 비웃음.
계획대로 되었다는 저열한 감정이었다.
“마법사들의 대화라, 공자님께는 이해가 힘드실 텐….”
입꼬리를 치켜올린 그가 뭐라고 더 말하려던 순간.
콰득-!
난 곧바로 그의 다리 관절을 꺾어, 그 자리에 주저앉게 만들었다.
“커억?!”
고통에 익숙하지 못한 마법사들이 으레 그렇듯, 자세가 무너지는 것은 빨랐다.
빠악-!
그대로 그의 턱주가리를 올려 차 쓰러트린 뒤, 검집으로 그의 목을 찍어눌렀다.
“자, 잠깐만! 이게 무슨…?”
“몰랐다고 하면 다인가? 사람 어깨를 밀쳤으면 사과 먼저 해야지.”
시엘에게 보란 듯, 그에게 말했다.
최대한 화난 것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어느 안전이라고 라인란트 공자를 무시해. 죽고 싶나?”
바닥에 쓰러진 첼레그에게 그렇게 말하며 시엘의 표정을 살폈다.
“크, 클라인 공자!”
“연회장에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서 검을…!”
“……!”
깜짝 놀란 마법사들 사이에서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시엘의 얼굴을 보았다.
‘첼레그라고 했었지?’
손에 가려진 시엘의 웃음.
그걸 본 난 속으로 생각했다.
‘넌 진짜, 내 덕에 산 줄 알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