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111화 (111/209)

111. 플리시안

“가여운 운명을 타고난 아이로구나.”

부모에게 버려져 빈민가를 배회하던 아이.

이름 없는 아이를 거두며, 이름을 잊은 노인이 말했다.

“이 만남 또한, 네가 겪을 비극의 단초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

뒷골목의 부랑자였던 부모.

밤마다 이어지는 폭력.

희망 없는 삶.

“그러니, 네게 선택권을 주마.”

노인은 그런 소년에게 두 가지를 내밀었다.

한쪽에는 이 빈민가를 벗어나, 홀로 살 수 있는 금화를.

다른 한쪽에는 비어있는 노인의 손을.

“이곳에 남아 평안하겠느냐, 아니면 네 비극을 향해 스스로 걸어가겠느냐.”

노인은 강요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이어진 고민.

아이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노인은 그것만큼은 대신해주지 않았다.

소년은 노인의 손을 잡았다.

“허어….”

금화를 마다하고 모르는 이의 손을 잡은 소년을 향해, 노인은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이것으로 괜찮겠냐고.

정말로, 괜찮겠느냐고.

소년은 그렇다고 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삶이 아닌 사람의 온기.

소년을 굶주리게 한 것은 그의 가난이 아닌 외로움이었다.

“그것이 네 선택이라면.”

착잡한 심정으로 답한 노인은 소년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오늘부터 네가, 내 마지막 후예다.”

그렇게 소년과 노인은 여행을 했다.

대륙 곳곳을 돌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웠다.

밤낮없는 토론으로 지식도 얻었다.

그 즐거운 여정의 끝.

소년이 도달한 곳은 춥고 척박한 북쪽의 땅.

혹한의 땅은 소년에게 있어선 낯설고 거칠었지만, 동시에 친절했고 따뜻했다.

외로움에 굶주린 소년은 그곳에서 친구를 받았고, 고향을 받았으며, 이름을 받았다.

소년의 이름은 아키몬드.

북부 왕국, 윈터폴의 아키몬드였다.

***

“진짜로 순례객 맞으시죠?”

테르친도 그러더니, 여기도 난리네.

플리시안 검문소에 도착한 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경비병에게 가문의 증표를 내밀었다.

“이쪽은 신성교단 수녀고, 보다시피 난 이 가문 사람이고.”

그 뒤로는 말할 것도 없다.

몰라봬서 죄송하다, 진짜 몰랐다.

사막에서 넘어오는 이들이 어쩌구, 편안한 여행이 어쩌구저쩌구.

“그러니, 저기…. 상층부에는….”

“아무 말 안 할 테니까 통과나 좀 시켜주지. 피곤해 죽겠는데.”

“아, 옙!”

퀭한 눈으로 그렇게 말하자, 경비병은 곧바로 나와 일행들을 통과시켰다.

“후우….”

500명의 듀라한과 앙헬은 나와 계약하는 대가로 한 가지를 요구했다.

‘왕릉에 남아있는 이들의 혼을, 환원시켜주게.’

왕릉 상층에 깔려있던 미이라들.

얘기를 듣자 하니, 자신들과 함께 왕릉을 지키겠다, 맹세한 병사들의 혼이란다.

뭐 어쩌겠냐.

네크로맨서가 되어서, 길 잃은 혼들을 못 본 체할 수도 없으니.

그렇게 환원시킨 망자의 수가 4만 5천.

떠나는 이들의 영혼으로 이뤄진 은하수는 참 장관이었다.

물론, 마기를 써댄 반동 때문에 난 사막을 건너는 내내 죽상이었지만.

“잘 먹었습니다-!”

1주일 만에 도달한 동부 왕국, 플리시안의 수도.

제대로 된 식사도, 목욕도, 여관방의 침대 시트도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도련님, 그래도 이번엔 기절은 안 하시네요?”

“끄어어어….”

아린의 물음에 앓는 소리로 답했다.

좀 괜찮아졌나 싶었는데.

긴장이 풀리자마자 지난 여행의 피로가 한 번에 찾아온 듯했다.

“소리 내는 거 들으면 누가 언데드인지 모르겠네요.”

그러는 사이.

문이 열리며 여관방에 들어온 스텔라가 간단한 음료를 건넸다.

“그쪽이 네크로맨서 해보십쇼. 그 영혼들 위령하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스텔라가 건넨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냉기 보존마법이 걸린 컵이라니, 북부에선 이거만 한 돈지랄이 따로 없는데.”

“왜요? 전 이거 하나 정도는 가져가고 싶은데.”

바닥에 옅게 떠오른 룬을 보며 스텔라가 말했다.

“북부에서 이런 마법은 필요 없으니까요.”

‘아저씨, 생태 한 마리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뭐야, 이건 동태잖아요?’

‘어? 아까까진 생태였는데?’

북부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농담이다.

‘그래도 저번보다는 상황이 좀 낫네.’

교화소에서 언데드들과 계약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땐 3일 동안 기절했다가 고아원에서 깨어났는데.

이젠 일주일 머리가 아픈 거로 끝이라니.

나날이 성장하는 몸을 보니 새삼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이렇게 성장이 빠른 거지?’

스스로도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가 계약한 언데드 군단의 규모를 헤아려보았다.

그레이브 하운드가 약 2천.

스켈레톤, 3만 5천.

듀라한 5백에 추가로, 언데드 리치인 앙헬까지.

단순히 머릿수만 따져도 4만에 인접한 언데드.

거기에 왕릉에 있던 혼들을 전부 환원시킨 걸 생각한다면, 내 마기는 거의 바닥을 보여야 정상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마기가 남아있어.’

열다섯이라는 나이에, 전생의 3할까지 마기를 회복했다.

‘흑요석 반지의 힘은 진작에 다 흡수했고, 마기가 늘어날 만한 요소는 더 없는데….’

물론 힘이 늘어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선 할 일이 산더미인데.

네크로맨서로서의 성장이 빠르다면, 그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이렇게까지 빨리 성장하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는 것이다.

재능?

애초에 사령술은 재능의 여부를 따질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노력?

그것도 장담할 수 없다.

망자들과 대화하고, 한풀이해주고, 계약하고.

내 노력은 대부분 이런 데에 쓰이는 거지, 마기의 총량을 키우기 위한 노력은 많지 않았으니까.

‘전생과 지금의 유일한 차이점을 꼽자면….’

그렇게 생각하며, 여관방 거울에 비친 내 눈을 바라보았다.

‘이거밖에 없는데 말이지.’

미약한 푸른 빛을 내뿜는 내 두 눈.

눈으로 본 기술을 완벽히 재현하는 재능.

검술에만 한정된 줄 알았는데. 설마 사령술에도 이 힘이 적용되는 건가?

“아, 그러고 보니.”

그렇게 내가 생각에 열중하던 도중.

그제서야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스텔라가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편지를 받아들며 물었다.

검은 편지지에 금박으로 이뤄진 장식선.

편지지 하나에 이렇게 돈을 처바르는 건 귀족들 밖에 없을 텐데.

“시장에서 누가 주더라고요. ‘라인란트 공자께 전해달라’라면서.”

내 물음에 시장에서 산 빵을 우물거리던 스텔라가 말했다.

“…잠깐, 뭐라고요?”

이건 또 뭔 소리야.

스텔라에게 접근해서, 내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했다고?

“누군지는 확인했어요?”

“플리시안 왕성이라던데요? 보낸 사람은 따로 적혀있을 거라고 했고.”

“그리고 그걸 덥석 받아가지고 저한테 가져온 겁니까?”

어이가 없어 그렇게 묻자, 스텔라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귀족분들 얘기인데, 수녀가 끼어들어서 뭐하겠어요?”

말을 말자.

화내는 쪽이 손해지.

‘예상가는 건 내 목을 노리는 암살자들이거나,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며 난 편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클라인 라인란트 제 2공자님.]

[신대 아일라시스 공작가 가주의 방문을 기념하여, 플리시안 왕성에서 환영회를 개최합니다.]

[본국에 방문 중이신 공자님께선 제국 3대 공작가의 일원이신 바, 부디 참석하시어 제국과 플리시안 양국의 우애와…….]

온갖 미사여구가 가득한 초대장.

편지지에 찍혀있는 인장 또한 플리시안 왕성의 것이었다.

“그사이에 내가 왔다는 걸 알아차린 거야?”

경비병에게 내 신분을 밝힌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이런 초대장이 준비되었다.

내가 온다는 걸 사전에 알고 있었단 뜻이겠지.

‘마법사 놈들이 교단에서 벌어질 일에 관심이 있을 리 만무하고.’

순례니 뭐니 신경 쓸 플리시안이 아니다.

목적은 아마 나.

아키몬드의 환생이라고 불렸던 인간이 플리시안에 찾아왔으니, 얼굴이나 볼 속셈이겠지.

라인란트에 대한 탐색전까지 겸해서.

‘차라리 잘됐어.’

초대장을 내려놓은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키몬드 교단 놈들을 캐내려면, 한 번쯤 들러줘야 하니까.”

동토지대에서 얻은 조직원의 기억을 되살렸다.

수천 명에 달하는 네크로맨서가 비밀리에 이동했지.

‘내 정보를 듣고 가문에서 정보원들을 파견했지만, 결국 잡지 못했고.’

누군가가 그들을 숨겨주고 있는 것이다.

공작가의 정보원들을 차단할만한 권력자, 혹은 그만한 힘을 지닌 조직.

‘플리시안 왕가, 혹은 다섯 마탑의 주인들.’

용의선상에 잡힌 놈들이 하나같이 거물이라면, 이 초대장은 오히려 기회였다.

‘공작가 이름으로 공식행사에 참여하는 거니, 낙엽 놈들도 귀찮게 안 할 테고.’

테레인 백작의 시신에서 뽑아낸 정보를 떠올리며 편지지를 유심히 보았다.

‘장소는 플리시안 시 중앙청 연회장.

참석 인원은 마탑 학회장 만슈타인 교수에, 하늘마탑 마탑주 갈론드 란. 그리고….’

그렇게 초대된 인사들의 명단을 훑어보던 내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아니, X발 잠깐만.”

참여자 명단 한가운데에 위치한 이름.

그것을 본 난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일라시스 공작가 임시 가주, 시엘 라 아일라시스 영애.]

잘못 보았나 싶어 몇 번이나 확인해봤지만, 명단에 적힌 이름은 그대로였다.

벌떡!

곧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합니다.”

“출발이요?”

내가 잔뜩 굳은 목소리로 말하자, 스텔라가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전까지 피곤하다며 골골대더니, 갑자기 왜….”

“설명할 시간 없어요. 지금 당장 동쪽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스텔라를 뒤로 한 채 난 곧바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열자 여관 문 앞에는.

“클라인!”

내 약혼녀, 시엘 라 아일라시스가 활짝 웃는 얼굴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

- 키이이이…!

- 크워어어억-!

캄캄한 지하실.

복도 양옆으로 이어진 철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흠~ 흐흠~”

괴성과 비명으로 가득한 복도 한가운데를 걷는 남자가 있었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즐겁게.

그리고 여유롭게.

쾅-!

그러던 중, 털과 핏줄이 선명한 근육 덩어리가 철창에 몸을 박았다.

두 다리를 땅에 선 모습.

역으로 꺾인 관절은 말의 그것과 같았고, 갈기와 이빨은 사자의 것이었다.

“크으으으-!”

오우거 특유의 잔뜩 부푼 몸을 지닌 괴물이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팔리마아안-!”

울분에 찬 괴성에, 추기경 팔리만 엘이 고개를 들었다.

여느 순박한 청년과 같은 무구한 표정.

그렇지만 그 눈동자가 담고 있는 것은 지독한 악의와 열의였다.

“이렇게까지 진행했는데도 이성이 남아있다니, 성과가 좋군요.”

그렇게 말한 팔리만은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엘프란 공작 전하.”

로브 속에 감춰진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검은 머리칼을 늘어트린 중년의 깡마른 남자.

아일라시스의 전대 가주, 엘프란 아일라시스였다.

“…….”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이 탐탁지 않은 듯, 엘프란은 실험체에게서 눈을 돌렸다.

“착각하지 마시오. 당신의 실험에 협력하는 이유는 단순히….”

“공작위를 되찾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엘프란의 말을 끊은 팔리만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양옆으로 늘어선 ‘실험체’들을 살폈다.

“그래도 정말… 대단한 성과입니다. 역시 아일라시스 공작다워요.”

“큭…….”

네가 한 짓을 보라는 듯, 팔리만은 끊임없이 그의 양심을 자극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

물론 그와 동시에, 이 일로 얻은 과실을 강조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받은 만큼 선사할 것이다.

이것은 팔리만이 그에게 내건 가장 큰 조건이었으니까.

“원하는 것을 얻고 난다면 전하께선….”

그렇게 말을 흐린 팔리만은,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성기의 힘과 젊음을, 되찾으실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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