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미안, 좀 피곤해서
“베르켈의 유언? 날 기다려? 뭔 헛소리야?”
계약문을 연 채 그렇게 되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아니, 야! 하던 말은 다 하고 가야 할 것 아니야?!”
돌겠네, 진짜.
자유의지를 주면 이게 문제다.
아니, 뭔 놈의 데스나이트가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져?
“에이 씨, 몰라. 나중에 붙잡고 캐봐야지.”
대답하라고 난리 쳐 봤자 헛수고다.
말싸움하고 있을 시간도 없고.
“클라인!”
그렇게 구시렁거리던 사이, 원형 경기장 안쪽으로 들어간 스텔라가 돌아왔다.
“말한 거 갖고 왔는데, 이제 어떻게 하죠?”
“이리 줘요. 알아서 할 테니까.”
이곳에 온 본래의 목표는 언데드를 늘리는 것.
난 하늘 위로 날아오른 앙헬의 머리로 베슬을 내밀며 말했다.
“근처에 나타난다는 듀라한들. 너네 애들이지?”
- 애, 애들…?
듀라한을 부르는 내 말투가 거슬리는 듯했지만, 앙헬은 마지못해 그렇다고 대답했다.
뭐 어쩔 거야.
지 심장이 나한테 있는데.
- 원래는 나와 함께 무덤을 지키는 기사들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력이 버티지 못했겠지. 그렇게 망령이 되었을 테고.”
내 말에 앙헬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영혼들 위치는 대충 이쯤.”
원형 경기장 벽면의 벽화에 손을 갖다 댔다.
말을 탄 기수들이 초원을 질주하는 풍경.
이 사막이 한때 초목이 무성한 초원이었음을 알려주는 작품이었다.
파츳-!
벽화를 통해 마기를 쏘아 보내자, 곧바로 반응이 일어났다.
쿠르르르….
벽화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검은 연기.
이윽고 원형 경기장의 벽에서, 목 없는 기수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중심핵이 마모되었군. 보강하지 않으면 소멸할 정도로.”
그들의 상태를 진단한 뒤, 곧바로 그들의 몸에 마기를 채워 넣었다.
투화악-!
한곳에 모인 듀라한들을 감싼 거대한 계약문이 떠올랐다.
수는 약 천 명.
각각의 존재를 나타내는 룬이 새겨지고, 그들의 혼을 감싼 탁한 그림자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 아아…….
몇몇 기수들이 들고 있던 검을 놓았다.
영체가 마모될 정도로 오랫동안 달려온 초원의 기수.
망령화가 풀리자, 낡은 육신을 벗어던진 혼이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파스스스스…!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그와 같은 수순을 밟았다.
“남기로 한 건 500명 정도인가.”
지친 이들과 달리, 아직도 전투와 영광을 원하는 영혼들.
그들은 내 계약문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새로운 영체로 재구축되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그 광경을 잠시 보던 스텔라가 내게 물었다.
“저 방금 그쪽 좋은 일만 한 거 맞죠?”
“참 빨리도 알아채십니다. 수녀님.”
계약문에 새로 이름을 올린 500여 명의 목 없는 기수.
“좋아. 이쪽은 얼추 마무리됐고.”
그들의 존재를 나타내는 룬들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다음은 네 차례다.”
그렇게 말한 난 곧바로 앙헬을 향해 계약문을 내밀었다.
- 계약하겠다고? 나와?
“당연하지. 넌 쟤들과 달리 환원도 못하잖아.”
원한에 의해 망령화한 저들과 달리, 앙헬은 스스로의 의지로 언데드가 된 마법사.
라이프 베슬에 영혼을 분리한 시점에서, 그는 환원될 기회를 잃은 것이다.
“원한다면 베슬을 부숴서 소멸시켜줄 의향도 있는데. 어떻게 할래?”
짓궂은 웃음과 함께 그렇게 말하자, 헛웃음 소리와 함께 앙헬의 대답이 들려왔다.
- 사람 잡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로군.
당연하지.
네크로맨서 짬이 몇 년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난 앙헬의 라이프 베슬에 룬을 그렸다.
츠츠츠츠츠…!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모여들어 선을 이뤘다.
기존의 육체와의 연결을 해제하고, 새로운 영체와 베슬을 연결하는 작업.
“자, 회로는 네가 직접 구축해.”
- 그러지.
데스나이트의 영체가 기성품이라면, 리치의 영체는 주문제작에 가깝다.
네크로맨서는 기본 골자만 제공하고, 나머지 부분은 마법사 본인이 구축하는 것.
술자마다 서클의 개수, 마력 회로의 배열이 상이하기 때문이었다.
파아아앗-!
눈부시게 빛나는 마력광.
이윽고 나타난 것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해골의 형상이었다.
“음, 아까보다 훨 낫네.”
마법사의 영체는 오랜만에 만드는 거였는데.
다행히 실력이 녹슬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걸로 병력도 구색을 갖췄고.”
즐거운 기분으로, 난 밴시와 연결시킨 영혼 지도를 펼쳤다.
무언가에 쫓기듯, 사막을 방황하는 백여 명의 기사들.
날 쫓아온 테레인 백작의 기사단이었다.
“덫에 걸린 쥐새끼들을 잡으러 가 볼까?”
***
“젠장, 젠장, 젠장-!”
사막을 달리는 기사들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백작님! 어떻게 된 겁니까?! 저런 게 있다고는…!”
“성으로 돌아가는 것만 생각해라!”
그렇게 말한 테레인 역시 제정신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하녀인 줄만 알았는데, 저런 괴물이었을 줄이야…!’
기사인 그들이 이 넓은 사막을 두 다리로 뛰고 있는 이유.
그것은, 지금도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 저 망할 놈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콰득! 콰득!
줄기줄기 뻗어있는 그림자에 난 수많은 입.
저것들은 지금, 자신들이 탄 말을 전부 잡아먹으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으아아-!”
스걱-!
마력을 담은 기사의 검이 그림자를 잘라냈다.
그렇지만 이 또한 부질없는 짓.
투화악-!
잘려나간 곳에서 돋아난 새로운 그림자가 계속해서 그들을 쫓고 있었다.
‘잡으려면 진작에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우리를 쫓는 거라면…!’
테레인 백작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괴물은 지금 자신들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이라고.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이 사막의 열기가, 자신과 기사들을 전부 죽일 때까지!
투투투투투….
그렇게 절망감에 몸을 떨고 있을 무렵.
“이, 이 발소리!”
“누군가가 있다!”
멀찍이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몇몇 기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수가 많습니다. 백작님! 적어도…!”
“그래. 5백은 되는군.”
소리와 방향을 봤을 때, 플리시안 쪽에서 다가오는 것이었다.
주변 부족의 순찰대, 혹은 플리시안의 기병대.
“어느 쪽이든, 희망이 보이는군.”
어떻게든 저들과 합류해서, 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영지에 돌아가기만 하면, 병사들을 전부 모아서 저 괴물을…!”
이를 갈아붙인 테레인 백작이 그렇게 생각할 무렵.
말발굽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저 멀리서 먼지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우, 우릴 발견했나 봅니다!”
“여기! 여기요-!”
화색이 돋은 기사들이 먼지구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어, 어어…?”
“저건 설마…!”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의 모습을 보자, 기사들이 품은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듀라한…!”
마갑으로 무장된 그림자 말.
중장갑을 갖춘 목 없는 기수.
수백 명의 듀라한들이, 그림자와 함께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제길…!”
“완전히 포위됐습니다!”
아무리 기사라 할지언정, 달리는 말을 뿌리칠 수는 없는 법.
테레인 백작과 기사들을 둘러싼 듀라한들이 일제히 창을 치켜들었다.
“오오!”
그러자, 마치 친구라도 만난 듯.
자신들을 쫓던 그림자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련님, 다녀오셨어요!”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 라인란트 공자가 말을 못 탄다니, 이게 말이 된가도 생각하나?
“시끄러! 타려고 별 난리를 쳐도 안 되는 걸 어떡하냐?”
듀라한들 사이에서 잠시 실랑이가 일었다.
“야, 앙헬! 나 좀 받아줘!”
- 폼은 있는 대로 잡더니, 마지막에 와서 죄다 초 치는군.
그렇게 뒤쪽에서 잠시 소란이 일은 뒤.
촤르륵!
좌우로 갈라진 언데드 무리에서 은발의 소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크, 클라인 공자…!”
한쪽에는 갑옷을 차려입은 데스나이트.
다른 한쪽에는 로브를 두른 정체 모를 언데드.
“이게, 무슨…!”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힘을 가늠한 테레인 백작은 경악했다.
저 정도의 언데드를 단 한 명의 네크로맨서가 다루고 있다니.
“어우, 허리야. 이거 두 번은 못 하겠다.”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연 클라인의 옆으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히히!”
웃는 얼굴로 공자에게 얼굴을 기대는 괴물.
클라인은 한데 모인 기사들의 행색을 살폈다.
“시킨 대로, 사람은 안 먹었지?”
자신에게 다가온 괴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공자는 그렇게 물었고.
“네! 저 잘했죠!”
“그래, 고생했어.”
이어지는 괴물의 대답에, 기사들의 얼굴은 한층 더 창백해졌다.
시킨 대로.
말인즉, 클라인 공자는 자신들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저 괴물을 준비시켜놨다는 말이었으니까.
‘처음부터 저자의 의도에 놀아났다는 말인가…!’
제대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다.
낙엽 놈들을 이용해 사막으로 유도한 뒤, 납치하면 된다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기사들도 충분히 준비시켰을 텐데.
이런 말도 안 되는…!
“테레인 탈리크 백작. 맞지?”
테레인 백작을 내려다본 채 클라인이 말했다.
“날 잡으러 온 암살자들 사이에 그쪽 기사가 한 명 껴있었는데.”
클라인은 테레인 백작을 처음 봤지만, 굳이 말투에 격식을 차리진 않았다.
“이젠 아예 기사단을 싹 다 동원해서 날 잡으러 오셨군그래?”
제국의 공작들이 으레 그렇듯, 오만한 눈빛.
입가를 비틀어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지경까지 온 이상, 변명할 필요는 없을 테지.”
스릉-!
백작의 허리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병력을 앞세워 압박했다면 승산이 없었지만, 지금은 클라인 공자 본인이 전면에 나선 상황.
‘호위하고 있는 두 언데드를 뚫는다면, 술자를 죽여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
그는 한평생을 승부사로 살아온 자이며, 고명한 기사다.
이런 역경은 이전에도 숱하게 겪었고, 그때마다 보란 듯 극복해냈다.
“사막의 법도를 알려주겠소. 클라인 공자.”
“듣지.”
클라인의 승낙에 백작은 검을 겨눈 채로 말을 이어갔다.
“승자는 모든 것을 얻고, 패배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 그것이 사막의 질서다.”
“…….”
백작의 그 한 마디에, 다른 기사들 또한 함께 검을 뽑았다.
‘수가 많다 한들, 우리 인원의 다섯 배 정도!’
‘저 괴물만 아니라면, 뚫을 수 있다…!’
물러설 곳이 없어지자 그들의 눈에 투지가 서렸다.
그들 또한 테레인과 함께 사막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역전의 기사들.
두려움에 앞서, 고양감과 긴장감에 피가 끓는 듯했다.
“그래서?”
클라인 공자 역시 재밌다는 듯, 웃는 낯으로 백작의 말을 받았다.
“그대가 이긴다면, 난 사막에서 행방불명. 그쪽은 무사히 다음 목적지로 갈 수 있을 것이고.”
이제 저 안에 남아있는 건 없지만.
그렇게 생각한 클라인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내가 이긴다면, 난 그대가 왕릉에서 찾아낸 모든 것들을 취할 것이오.”
사막의 모래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제국 공작가의 자제를 죽인다 해도, 증거가 없으면 아무 상관 없지.
사막에서 객사하는 인간들이야, 테르친에 널리고 널렸으니까!
“자, 간다! 클라인 라인란트!”
오랜만에 느끼는 공포와 긴장감에 잔뜩 흥분한 테레인이 몸을 날렸다.
촤아악-!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뒤, 그대로 검을 휘둘러 공자의 목을 노렸다.
“난 그대의 시체를 밟고, 그 너머에 있는…!”
코앞까지 다다른 검을 보며 백작이 승리를 직감한 그 순간.
“앙헬.”
클라인의 옆에 선 언데드는 이미, 테레인을 향해 손을 뻗은 뒤였다.
투콰아아앙-!
사막을 뒤흔드는 폭발음.
이윽고 정신을 차린 기사들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후두두둑!
산산이 조각난 채 흩날리는 살점과 뼛조각.
방금까지 용맹하게 돌진했던, 테레인 백작의 파편들이었다.
“배, 백작님…?!”
“흐, 흔적도 없이…!”
아연실색한 기사들의 검이 떨렸다.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한 기사를, 일격에 부숴버리다니.
자신들의 상식 밖의 일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정도면 플리시안에서도 별문제 없겠군.”
백작이 돌진하고, 산산이 부서질 때까지.
클라인 공자는 검 손잡이에 손도 대지 않았다.
우르르르…!
“……!”
“이, 이게 다 뭐야…?”
말과 창으로 시야를 가린 듀라한들이 사라지자, 기사들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촤르르륵-!
사방을 둘러싼 스켈레톤의 군세.
어림잡아도 4만은 훌쩍 뛰어넘는 이들이, 자신들을 향해 쇠뇌를 겨누고 있었다.
“명색이 기사단이니 어떻게 뚫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본데.”
클라인이 한 손을 들어 올리자, 쇠뇌병들의 석궁이 일제히 기사들을 겨눴다.
“그럴 거면 내가 여기 오지도 않았지.”
그 말과 함께, 사방에서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력으로 강화한 신체라 한들, 수만 발의 쿼렐을 막아낼 수는 없는 노릇.
이윽고 언데드 군단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피칠갑을 한 채 쓰러져있는 한 무더기의 시신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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