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초원은 영원히 우리를 기억하리라(6)
“우와아….”
왕릉 하층의 전경을 둘러보자, 스텔라의 입에서 나지막이 탄성이 흘러나왔다.
“엄청 넓네요.”
“쓸데없이 넓은 거죠.”
아래층에 위치한 것은 거대한 원형 경기장.
벽면에는 옛 제국의 모습을 그린 벽화와 조각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위치한 커다란 석관.
난 그 석관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게 뭐야.”
그것도 잠시.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난 다시 한번 관을 살펴보았다.
‘비어있잖아?’
마기로 석관을 한 번 더 훑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거대한 무덤에 주인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니.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뚫고 온 언데드들은 도대체 뭘 지키고 있는 거지?’
곧바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기장의 구조, 왕릉에 배치된 언데드.
깊이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통로와 200년이 지나서도 매끄럽게 작동되는 수많은 기계 장치들까지.
“…이건 외부의 침입을 대비한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
이 무덤은 밖에서 들어오는 이를 막는 것이 아닌, 안쪽에서 나가는 이를 막는 데에 특화된 구조.
일종의 감옥이었다.
“잠깐만.”
표정을 굳힌 스텔라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앞에 뭔가 있어요.”
그 말에 곧바로 정면을 주시했다.
터벅. 터벅.
아무도 없을 지하 묘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혼의 울림.
언데드의 발소리였다.
- 후손들의 피를 가져왔기에 누구인가 했는데.
깊이 울리는 망자의 음성과 함께, 목소리의 주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마포로 짠 로브.
녹슬고 낡은 장신구와 마법구를들고 있는 손은 앙상한 해골이었다.
- 설마 이곳에, 네크로맨서가 기어들어 올 줄이야.
망령화한 끝에 이성을 잃은 다른 언데드들과는 달리, 이성을 갖춘 한 마디.
“진짜 가지가지 하네.”
그 말을 들은 난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흐렸다.
고위 언데드의 존재는 눈치챘지만, 이건 예상 못했다.
“리치까지 있단 말이야?”
리치(Lich).
영생을 원하는 마법사가 스스로 언데드가 된 모습.
영원한 생명을 대가로, 끊임없이 생명력을 탐하는 고위 언데드였다.
- 왜 이곳을 찾았지? 이곳에 있는 언데드를 얻기 위함인가?
날 향한 리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쩍 마른 시체의 두 눈구멍 사이에선 시퍼런 안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허락이 쉽지는 않아 보이네.”
- 흐하하하하.
음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리치의 마력이 요동쳤다.
- 건방지기 짝이 없는 애송이로구나.
우우웅-!
곧바로 그의 손안에 모이는 마력.
그렇지만 나 역시, 그걸 감지한 순간부터 소환문을 생성해 둔 상황.
- 1진은 정면에서 방어. 나머지는 사격 준비.
촤르르륵-!
내 목소리에 맞춰 사방에서 튀어나온 스켈레톤들이 진형을 갖췄다.
- 좋아, 좋아. 이 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그렇게 말을 이어가던 중.
내 얼굴을 본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말을 흐렸다.
- 잠깐만….
“?”
리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모습을 살폈다.
- 이런 혼을 지닌 네크로맨서는, 한 사람밖에 없을 텐데…?
내 모습이 낯이 익은 듯 리치의 눈빛이 서서히 바뀌었다.
적대하는 시선에서, 경악에 찬 시선으로.
- 네놈, 설마…?
‘……야 이 미친.’
불길한 직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언데드의 눈은 육신이 아닌 영혼을 본다.
그리고 저 리치가 살아있었을 200년 전이라면, 내 신상정보는 대륙 전체에 퍼졌을 터.
그렇다면, 저 리치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클라인 라인란트가 아니라.
아키몬드일 터…!
- 네놈이었구나!
X발.
제대로 X됐다.
설마 이 유적에서, 전생의 날 아는 존재를 만나게 될 줄이야.
- 그렇지! 이 봉인을 풀고자 할 인간은, 대륙에 네놈밖에 없지!
리치의 목소리에 노기가 떠올랐다.
‘돌겠네. 여기서 들키면 골치 아픈데…!’
등 뒤에 있는 스텔라의 존재를 떠올렸다.
이곳에서 내 정체가 밝혀진다면 순례는 둘째고.
애써 분열시킨 교단이 한마음으로 날 죽이러 달려올 테니까.
- 하이델베르그의 악마!
반가운 얼굴을 한 그가 내 이름을 말하려던 그 순간.
- 아키…!
스걱-!
절삭음과 함께, 리치의 목이 땅으로 떨어졌다.
툭.
데구르르르….
“엥?”
어이가 없어서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절로 나왔다.
뭐지?
내가 지금 잘못 본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땅에 떨어진 리치의 목이 굴러가는 것을 얼마나 더 보았을까.
“하이델베르그는 뭐고, 악마는 또 뭔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네요.”
털썩.
머리 잃은 리치의 몸이 허물어졌다.
리치가 쓰러진 자리에는 스텔라가 손을 툭툭 털고 있었다.
“위험해 보여서 일단 처리했는데, 방금 저 리치 뭐라고 말한 거예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을 씰룩이던 난 이윽고.
….
…….
……….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
어색한 웃음을 들키지 않게 최선을 다하며,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
“큰일 날 뻔했네.”
허무하게 쓰러졌지만, 이 리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육체는 허울일 뿐.
이 유적 어딘가에 숨겨진 라이프 베슬이 놈의 본체일 테니까.
“그러니까, 항아리 같은 걸 찾으면 된다는 거죠?”
내 말을 들은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치가 나온 유적 안쪽으로 들어갔다.
“자, 이걸로 보는 눈은 사라졌고.”
스텔라의 모습이 사라진 걸 확인한 뒤, 난 리치의 시신에 온갖 룬들을 박아넣었다.
파아아앗-!
“일단, 이렇게 해 놓으면 안심이지.”
신성력으로 차단된 연결을 복구하자, 잘려나간 리치의 머리가 눈을 떴다.
- 으허억?!
죽다 살아난 듯, 리치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미리 설치한 룬들은 정상작동 중.
그의 목소리는 나 의외에는 들을 수 없다.
- 내 육신은 단순한 허살일지니! 섣불리 기습한 걸 후회…!
그렇게 말하던 치리는 이윽고.
- 이, 이게 뭐야?!
머리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몰골을 보며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 아키몬드! 네 녀석, 내 몸에 무슨 짓을…!
“라이프 베슬과 연결된 부분을 좀 손봤지. 마력은 못쓸거다.”
그렇게 말하자 리치의 머리는 당황한 듯 마력을 짜내려 안간힘을 썼다.
“언데드가 네크로맨서한테 까불어 봤자지. 안그래?”
그렇게 말한 난 그의 면전에 복종의 룬을 내밀었다.
“얌전히 묻는 말에 대답해. 안 그러면 이걸 박아 버릴 거니까.”
혼의 의지를 지우는 술식.
이전에 헥토르에게 써먹었던 방법이었다.
“알겠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리치는 빠르게 대답했다.
끄덕끄덕.
- 좋아. 상황파악이 빠르군.
곧바로 입을 다문 리치를 보며, 난 흡족한 얼굴로 수인을 맺었다.
파츳-!
- 원하는 게 뭐냐, 네크로맨서. 이 곳은 네가 함부로 올 곳이…!
“시끄럽다니까.”
다시 한번 말한 난 어깨를 으쓱이며 설명했다.
“아까 네 목을 날린 수녀가 네 심장을 가지고 올 거다. 그럼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겠지?”
다른 이의 손에 심장을 빼앗긴 리치.
내 말을 듣자, 바닥에 널브러진 자신의 몸을 본 리치는 낙담했다.
- 이렇게 허무하게….
200년을 살아온 리치가, 아무것도 못한 채 목이 잘리다니.
‘아무리 신성력이 언데드 잡는 특효약이라 해도….’
스텔라가 사라진 곳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신부놈 딸 아니랄까 봐, 저쪽도 괴물이었어.’
그와 동시에, 난 리치의 머리를 공중에 띄우며 물었다.
“자, 상황 파악은 된 모양이니, 슬슬 들어나볼까?”
- 듣다니, 뭘?
그렇게 되묻는 리치에게 대답했다.
“네가 이 주인 없는 왕릉을 지키고 있던 이유.”
- 흡……!
내 질문에 리치의 혼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숨겨봤자 소용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텐데?”
- 크으….
정신은 내가. 라이프베슬은 스텔라가 차지한 상황.
자신의 처지를 잘 파악한 것인지, 리치의 혼은 체념한 듯 한숨쉬었다.
- 그래. 제국이나 교국에게 들키느니, 오히려 이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중얼거인 리치의 머리는 날 중앙의 석관으로 안내했다.
우우웅-!
리치의 혼을 감지한 듯, 석관에 난 작은 룬이 빛났다.
아이신기오르 제국 황실의 문양.
그것을 본 내 눈이 가늘어졌다.
‘황실의 일원, 혹은 측근이라는 소리군. 거기에 마법사라.’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같은 시대의 사람이란 뜻.
생각나는 이름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앙헬, 록산느.”
아이신기오르 제국 최후의 궁정마법사.
그리고 최후의 항전에서 도망쳐, 이름 모를 암굴로 은거한 자였다.
“은거한 게 아니라, 여기서 이 무덤을 지키고 있었던 거였군?”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 궁정마법사를 지하에 묻어버리다니.
- 아니, 은거한 것이 맞네.
그렇게 말한 리치, 아니, 앙헬의 혼은 회한에 찬 듯 탄식했다.
- 단지 그 장소가, 이 왕릉이었을 뿐.
쿠르르르….
거대한 석관 뚜껑이 천천히 열리고, 그 안에 든 내용물이 공중에 떠올랐다.
“이건….”
석관에서 떠오른 것은 왕릉 문과 같은 재질의 석판.
그곳에 적힌 문자는 현 대륙어도, 옛 아이신기오르 제국의 문자도 아니었다.
고대 룬어로 쓰여진 구절.
읽는 것만으로도 그 권능을 발휘하는, 하나의 술식이었다.
[하늘을 먹는 용은 서쪽에.]
[세상을 휘감은 뱀은 동쪽에.]
[땅을 헤엄치는 고래는 남쪽에.]
그곳에 쓰인 문구를 읽은 내 입에서는….
“이런 미친…?”
곧바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 역사시대 이전, 세상을 불태웠다 전해지는 세 괴수 중 하나.
리치의 입이 그 이름을 입에 담는 동시에, 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 요르문간드(Jǫrmungandr).
이제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지하에 위치한 요새.
수만의 미이라 군대.
수천의 듀라한.
리치.
이 모든 걸 준비한 이유를.
“검은 용에 이어서 뱀까지….”
중간 경유지인 줄만 알았던 곳에서 이걸 발견할 줄이야.
- 이곳에 있다는 것은 아니야. 석판이 가리키는 것은 위치일 뿐.
그 말에 난 하늘에 떠오른 석판을 자세히 살폈다.
각각의 룬이 가리키는 장소는 세 곳.
폴와이번이 지배하고 있는 서부.
플리시안이 통치하는 동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륙 최남단에 있는 달의 섬까지.
‘순례보다도 이쪽이 더 큰 수확인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석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 어떻게 할 생각인가?
등 뒤에서 레이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쩌고 뭐고 없어. 묻어둬야지.”
얼음성의 보조를 받지 않는 이상, 지금의 난 저것들을 깨울 수도, 제어할 수도 없다.
“생각할수록 얄궂기 짝이 없네.”
착잡한 표정으로 석판에 손을 댔다.
“200년 전에 써먹으려 할 땐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이제 와서 나타나면 뭐 어쩌라는 건데?”
나오려면 좀 일찍 나오던가.
비밀을 알았다는 성취감에 앞서 짜증이 밀려왔다.
‘그렇지만….’
짜증이 나는 이유는 그뿐이 아니었다.
만일, 이 몸이 생전의 내 수준까지 성장한다면.
만일, 내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열쇠를 꽂아 얼음성을 가동한다면.
만일 그렇게 한다면, 난 이번에야말로….
- 대륙을 산산조각낼 수 있겠지.
“……!”
머릿속에서 들려온 레이븐의 목소리에 황급히 석판에서 손을 뗐다.
베르켈 라인란트의 첫 번째 기사, 레이븐.
그가 날 무거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 못다 한 일을 끝마치고 싶나? 아키몬드.
마치 날 도발하는듯한 목소리.
“그렇다고 하면, 뒤에서 내 목이라도 칠 생각인가?”
차갑게 웃으며 레이븐을 향해 말했다.
- 불가능하지. 상호계약이라곤 해도, 난 엄연히 네게 예속된 존재이니까.
그렇지만 서슬 퍼런 내 시선에도,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게다가 이 시대엔… 베르켈도, 대륙 연합도 없지 않은가.
“……….”
그의 말을 들으며, 한동안 말없이 석판을 응시했다.
“쯧.”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짧게 혀를 찬 난, 공중에 떠오른 석판에서 시선을 뗐다.
“내 복수는, 200년 전에 끝났어.”
당사자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
재차 확인하듯, 레이븐이 되물었다.
-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그를 향한 내 목소리에 흔들림은 없었다.
“그래 새끼야.”
지키지 못한 것들을 끌어안은 채 절규했었다.
울분과 광기에 미쳐 괴물이 되었다.
그 슬픔과 분노.
날 막아선 기사의 칼에 쓰러질 때 느꼈던 안도감까지.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 …베르켈이 말한 대로로군.
그렇게 말한 레이븐은 결심을 굳힌 듯, 날 향해 입을 열었다.
- 이곳에서의 일을 전부 마친다면, 장벽으로 가라.
“뭐?”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묻자, 그는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영체를 해제했다.
- 베르켈의 유언이,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