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106화 (106/209)

106. 초원은 영원히 우리를 기억하리라(3)

“귀인을 위하여!”

“위하여-!”

와하하하하-!

사막 외곽에 위치한 푸른 다리 부족의 정착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도련님! 이거 엄청 맛있어요!”

“꾹-! 꾸꾹-!”

왼쪽에 앉아 양손 가득 고기를 집어 든 아린의 말에 다른 이들이 껄껄 웃기 시작했다.

“이야~ 이 아가씨가 먹을 줄 아는구만?!”

“많이 드세요! 고기는 밖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겠지.

낮에 있었던 전투에서 죽은 전투마들을 먹고 있는 거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인데요.”

“그것참 우연이네요. 나도 그 생각 했는데.”

숯불에 구운 말고기를 질겅이며 스텔라의 말에 답했다.

와, 역시 전투용 말이야.

더럽게 안 씹히네.

무슨 가죽 갑옷 씹어먹는 식감이다.

“하하하! 섭섭한 말씀 마십시오. 사형!”

그러는 사이 호탕하게 웃은 부족의 족장, 티무르가 내게 다가왔다.

“이젠 피차 남도 아니지 않습니까!”

“남이야.”

그것도 생판 남이지.

오늘 처음 만난!

퉁명스레 답하며 마유주를 입에 머금었다.

시큼한 맛이 확 올라오는 게, 진짜 현지인 아니면 못 먹을 맛이다.

“진작 설명했잖아. 잃어버린 검술이고 나발이고, 난 모르는 일이라고.”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을 마다하며 말했다.

전생의 내 또래는 되어 보이는 인간이 열다섯 살짜리 애한테 존칭을 쓰는데.

부담스러워서 밥이 안 넘어간다.

“그렇지만 사형께서는 검술을 구사하셨습니다.”

사뭇 진지한 표정의 티무르가 말했다.

“사영격, 그리고 흉사.”

“…….”

내가 잠시 말이 없자, 잠시 숨을 고른 티무르가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부족엔 한 가지 예언이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예언?”

내가 되묻자, 티무르는 어색한 옛 제국의 언어로 천천히 말했다.

“초원의 전사와 북방의 기사에게 이 검을 전하라.”

“…….”

“그리하면 우리의 제국은, 다시 한번 찬란히 빛나리라.”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초원의 전사.

이 사막이 초원이었던 시절, 아이신기오르 제국의 검사를 일컫는 말.

지금은 그 제국의 후예인 저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북방의 기사란 누구인가?

더 말할 것도 없다.

“예언에 따라, 조부께서는 제 부친과 북부 출신의 검사에게 당신의 기술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북부 출신 검사의 이름이?”

“이안, 라인란트.”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설마 진짜로 사형제 격인 인물을 만날 줄이야.

“부친께서는 전투 중 요절하셨고, 제게 전해져야 할 검술 또한 사라졌습죠.”

저들의 검은 교본이 아닌 몸으로 전하는 것.

이안이 내게 가르친 것과 같았다.

“하지만 사형께서 오셨으니, 한 시름…!”

“아아, 잠깐잠깐.”

일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확인한 난 서둘러 티무르를 진정시켰다.

‘허구한 날 조져댄 게 이것 때문이었나?’

눈으로 본 기술을 완벽히 재현하는 내 능력.

단순히 가르치는 재미 때문인 줄 알았는데, 이런 것까지 안배해뒀을 줄이야.

……아니, 그럴 리 없다.

그 노친네 성격에.

그냥 닥치는 대로 때려 박다가 얻어걸린 게 분명하지!

‘이 상황이 득이 될지 아닐지도 따져 봐야 하고 말이야.’

날 데려와 극진히 대접한 이유는 보나 마나다.

실전된 검술을 복원하는 걸 도와라.

즉 이곳에 눌러앉아서 당분간 검술교관 노릇을 해 달란 뜻일 텐데.

미안하지만, 난 전혀 그럴 생각이 없거든.

“너흰 날 잡으려고 했지?”

“그, 그건 의뢰였습니다! 저흰 단순히, 돈 때문에….”

그제서야 생각한 듯, 얼굴이 벌게진 티무르가 고개를 숙였다.

‘의뢰라. 역시 뒷배가 있다는 뜻이군.’

그렇게 생각한 난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넌 그 의뢰를 완수하는 대신, 저들의 목표인 날 보호하려 하는 거고.”

“…….”

그렇게 말하자 티무르의 말문이 막혔다.

“날 쫓는 게 누구인지 알아?”

“아, 그건….”

알 턱이 없다.

이들의 임무는 날 잡아 테레인 백작에게 데려가는 것.

용병들에게 그 이상의 정보는 필요 없을 테니까.

“저기 수녀. 보이지?”

그렇게 말한 난 손가락으로 한창 말고기와 씨름 중인 스텔라를 가리켰다.

“신성교단에서 나한테 붙인 감시원이야.”

신성교단.

그 이름이 나오자 그들의 얼굴에도 당혹이 서렸다.

“교단이 아니라, 전 개리슨 신부, 으읍?!”

토를 달려고 하는 스텔라의 입에 말고기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너희들을 고용한 게 교단이라는 말이지.”

이들은 케르시아스가 아닌 조상신을 숭배한다.

신성교단의 입장에서, 사막을 떠도는 유목민들은 이교도.

엮여서 득 될 것이 하나 없다.

“테레인 백작이 교단에게?”

“금시초문인데….”

“하지만 정말이라면, 위험하네 티무르.”

내 말에 동조한 것은 나이 든 부족의 원로들이었다.

“미안하지만, 직접 알려준답시고 죽치고 있을 시간 없어.”

내 목적은 이들이 아닌 사막 중앙에 위치한 왕릉.

그 안에 잠들어있는 언데드다.

갑자기 사형이라고 부르더니 황당무계한 예언이니 뭐니.

관심도 없고, 내게 득 될 일도 없다.

하지만, 그런 내가 저들에게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이 있었으니.

‘피를 무슨 수로 얻을까 싶었는데, 딱 좋은 구실이 생겼군.’

내심 그렇게 되뇌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참에 거래를….”

거기까지 말한 순간.

“테레인 백작의 부관이다!”

“티무르!”

급박한 목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기사들이 정착지로 들어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자는 붉은 옷을 입은 제국군 장교.

망토에는 테레인 백작가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히-히히힝-!

유목민들이 으레 사용하는 작은 말이 아닌, 성에서 키운 군마.

말에서 내린 기사들은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티무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클라인 공자는 어찌 되었소! 분명 오늘 밤중으로 성에…!”

다짜고짜 천막으로 들이닥친 기사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어?”

“아.”

기사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입안 한가득 고기를 집어넣은 채 행복해하는 아린과, 그걸 망연히 바라보는 스텔라.

그리고 그 중앙에 서 있는 나였다.

“……?”

“……….”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기사 중 한 명은 이윽고.

촤앙-!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아, 날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

카카캉-!

구태여 방어는 하지 않았다.

저들이 사용하는 검로는 제국검술의 기초 초식.

헬리안과의 내전에서 신물나게 경험했던 것들이었으니까.

스걱-!

검집에서 빠져나온 노르드빈트가 기사의 팔에 검상을 남겼다.

기습공격을 완벽하게 간파당했다는 당혹에 앞서, 팔을 타고 오르는 고통이 기사를 엄습했다.

“크아악?!”

“뭐야, 어느새…!”

보이기는 보인다.

마력을 가진 자와 아닌 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

그렇지만 그들은 내 움직임을 보면서도, 전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대체…?”

정면인 줄 알았더니 측면을 공략해온다.

측면을 예상하고 공격하면 나머지 방향에서 모두 검이 들어온다.

이제는 성불하신 조부님의 검술, 환영검이었다.

“거봐. 내가 시간 없다고 했지?”

앞으로 네 명의 기사가 남아있었지만, 난 딱히 개의치 않았다.

우르르르-!

시미터와 곡도를 찬 푸른다리 부족원 수백 명이 기사들을 향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미친…?”

“티무르! 이게 무슨 짓인가!”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놀란 듯, 기사들이 사방을 검으로 겨눴다.

“정신이 나간 것인가?! 왜 클라인 공자가 아니라 우리를…!”

“나도 그게 궁금하던 차였어.”

기사들의 당황한 목소리에 맞장구치던 사이.

“저분은 부족의 손님이오. 함부로 검을 겨누지 말란 말이오.”

“애초에 말도 없이 들이닥치다니. 우리 정착지가 당신들 놀이터야?!”

그들 역시도 기사들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은 듯, 날선 반응을 보였다.

‘챙겨주는 건 알겠는데….’

사형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용주에게 칼을 대는 용병이라니.

세상천지에 이런 외골수들이 어디 있나 싶다.

“손님? 웃기는 소리 마시오. 저자는 당신들의 손님이 아니라, 우리의 의뢰대상이야.”

그렇게 대치 상황이 지속되던 중.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우리야말로 더 참을 수 없소.”

전면으로 나선 장교의 목소리에 분기탱천하던 티무르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돈 받은 만큼 일하는 것이 용병의 생리인데, 이를 거부하려 하다니.”

“…….‘

“정녕 이 사막에서 굶어 죽고 싶은 것인가?”

정론이다.

몇 푼 되지 않는 황금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용병.

방패벽에 돌진하던 전사들의 모습은 그 치열한 삶의 반증이었다.

“잘 생각하시오. 티무르 족장.”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장교가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당신들이 백작님께 빌렸던 그 수많은 금화.”

“……!”

“뭣하면 지금 당장 징수해갈 수도 있다는 말이오.”

그 말에 티무르의 눈이 흔들렸다.

잠시 동안의 침묵.

기선을 제압했다 생각한 듯, 장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클라인 공자를 데리고 있으니, 이 건은 문제 삼지 않겠소. 그러니 어서….”

“야, 사제.”

그렇게 말하는 장교의 말을 끊고, 티무르를 불렀다.

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저 장교 새끼 말본새가 좀 짜증이 나서.

“나 잡으라는 의뢰비용. 얼마였냐?”

그렇게 묻자, 얼마 안 가 대답이 흘러나왔다.

“…3천.”

“은? 금? 똑바로 말해.”

그렇게 말하자, 주먹을 꽉 쥔 그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금화입니다.”

그 말에 멀리서 이 사단을 구경하던 스텔라가 입을 틀어막았다.

“3천… 3천….”

적은 액수는 결코 아니었다.

웬만한 기사단이라 할지라도 눈이 돌아갈 만한 거금.

모르긴 몰라도, 저 백작이라는 자가 내 몸값을 어지간히도 높게 쳐준 듯 했다.

문제가 있다면 한 가지.

요 근래 우리 집안이 돈이 좀 많아져야 말이지.

‘내 몫으로 들어온 돈을 어디에 쓸지 고민이었는데.’

프리실라 공후가 내게 보낸 묵직한 돈주머니.

별 다른 망설임 없이, 난 티무르를 향해 그 돈주머니를 던졌다.

툭.

묵직한 돈주머니에서 흘러나온 것은, 평범한 금화가 아닌 백금화.

“계약금 4천. 일 다 끝나면 한 번 더 준다.”

그 말에 티무르와 기사들, 그리고 장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가 단박에 가라앉았지만, 난 어깨를 으쓱인 뒤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뭐해? 쟤들 입 안 틀어막고.”

***

“북부 초원지대라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다음 날 아침.

기사들과 장교를 심문하여 얻은 정보를 정리했다.

의뢰주는 테르친의 영주, 테레인 변경백.

이미 기사단을 준비해, 날 쫓을 준비에 한창이다.

수는 약 100명.

집단전에 능하고, 실전경험이 풍부한 노련한 기사들이었다.

“가는 길이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백작과 척을 진 이상, 티무르와 그의 부족들은 사막에서 살 수 없다.

‘다른 부족들의 침입이 이어질 테고, 어쩌면 백작이 직접 손을 쓸 수도 있겠지.’

그렇기에 난 티무르에게, 부족을 이끌고 라인란트 영지로 향하라고 했다.

방계의 세력권에 있었던 동부 접경지대.

초원지대인 그곳이라면, 그들에게도 나쁜 얘기는 아닐 테니까.

“백작은 너네가 아니라 날 먼저 조지려고 할 거거든.”

밤새 심문한 뒤 돌려보낸 기사들의 면면을 떠올렸다.

위아래를 죄다 벗겨놓은 채, 자루에 넣어 돌려보냈으니.

아마 굴욕감이 장난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사형. 그, 약조하신 건….”

“걱정 마. 약속은 확실하게 지킬테니까.”

의뢰금과 더불어, 난 이안에게 배운 저들의 검술을 전수하겠다 말했다.

‘물론, 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

난 검사인 동시에 학자.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가문 서고에 검술서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걸 참고해서 만들면 돼.”

“오오…!”

그렇게 말하자 티무르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잃어버린 선조의 검술.

그걸 위해 사막을 떠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만한 보답은 있어야겠지.

“아니 근데, 부족의 장이라는 인간이 아까부터 나한테 존댓말 해도 되는 거냐?”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그렇게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라는 게….

“사막에서는 힘이 곧 위계요, 검이 곧 신분입니다!”

라는, 참 어느 집구석과 비슷한 신조가 돌아올 뿐이었다.

‘기사도 그렇고 이놈들도 그렇고….’

칼 든 놈들은 역시 제정신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던 것도 잠시.

“아, 맞다.”

난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티무르를 향해 말했다.

“검술 교본 써주는 대신에, 한 가지 필요한 게 있는데 말이야.”

“오, 뭡니까 사형?”

곧바로 답하는 티무르를 향해 웃으며, 난 품속에서 화려하게 장식된 유리병을 꺼냈다.

“네 피 좀 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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