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초원은 영원히 우리를 기억하리라(1)
“탈출했다고?”
영주의 집무실.
전령의 보고를 받은 테레인 영주가 되물었다.
“예, 예. 경비대의 보고에 따르면, 두 시간 전에 낙타 두 마리가 나가는 걸 봤다고….”
“그렇다면 낙엽 놈들은 실패했다는 뜻이군.”
호언장담하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린 테레인 백작이 물었다.
“투멘은 어떻지?”
동행시켰던 기사의 이름을 부르자 전령은 침통한 얼굴로 답했다.
“목숨에 지장은 없습니다만, 그 몸 상태로는 더 이상….”
“기사 노릇은 끝이라는거군.”
잠시 생각하던 백작이 입을 열었다.
“본국에 서신을 넣어야겠군. 기사학교 교관 자리가 비어있다 했으니, 제격이겠지.”
헌신과 충성에 보답할 줄 아는 것이 귀족의 덕목.
그는 탐욕스러웠지만, 천한 자는 아니었다.
“놀랍군. 놀라워.”
제국의 다른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달리, 그는 자신이 직접 훈련시킨 기사.
헌데, 고작 열 다섯 꼬맹이가 그를 잡아낸 것이다.
심지어 기사도 아닌, 네크로맨서가!
“암살에 실패한 살인귀 놈들이 무능한 것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테레인 백작이 창 밖을 보았다.
“아니면, 클라인 공자가의 능력이 출중한 것인가.”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열 다섯.
아무리 빨라야 갓 토너먼트에 얼굴을 비치는 것이 고작인 나이.
그런 어린아이가 저 살인귀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부터가 정상이 아니란 소리이다.
‘그뿐만이 아니지.’
습격 직후, 소년은 도시를 떠났다.
망령과 괴물이 득시글거리는 저 사막을, 그것도 한밤중에 걸어간 것이다.
‘불안감에 도망친 것이 아니다. 철저히 계획된 거야.’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다는 듯, 아무런 동요 없는 움직임.
그것을 확인한 테레인 백작은 확신했다.
저 소년은 평범한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머릿속에 든 게 뭔지 캐볼 심산이었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군.’
왕릉을 발굴한다는 당초의 목적은 이미 잊어버렸다.
이제 그의 관심사는 클라인 공자 그 자체.
어린 소년의 치기라기에는 너무나도 거침없는 행보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크하하하하-!”
말없이 창문을 바라보던 백작이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배, 백작님…?”
항상 권태와 무표정을 유지하던 백작이 웃음이라니.
낯선 모습에 전령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그는 진심으로 놀라워하고 있었다.
저 소년이 성장하면 어떻게 될까?
둘째 공자라는 어중간한 위치가 아닌, 실세로 자리 잡는다면?
그렇게 가정한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피가 끓는 기분이었다.
“전령!”
“예, 예-!”
자신을 부르는 백작의 외침에 전령이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기사단을 준비시켜라. 클라인 공자를 내 앞에 데려와!”
“알겠습니다!”
명분은 충분했다.
그가 먼저 자신의 기사를 건드렸으니까.
먼저 습격했으니 정당방위다?
웃기는 소리.
목격자가 없는데 누가 그걸 증명한단 말인가?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럼에도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 테레인 백작이 전령에게 말했다.
“‘푸른다리’ 놈들에게로 가라.”
“……!”
별안간 흘러나온 이름에 전령이 헛숨을 들이켰다.
푸른다리 부족.
언데드와 몬스터가 들끓는 동부 사막을 터전으로 삼은 토착민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테레인이 직접 후원하고 있는 용병집단이기도 했다.
“이쯤 되면, 새 족장이라는 놈도 슬슬 정신을 차렸겠지.”
그렇게 혼잣말한 테레인 백작이 전령을 향해 말했다.
“가서 전해라. 공자를 잡아 온다면, 그에 상응하는 황금을 주겠다고.”
***
플리시안으로 향하는 길.
한낮의 동부 사막을 비추는 햇빛이 화창하기 그지없었다.
“후우….”
물론, 화창하다는 말로는 이 더위를 설명할 수 없지.
찌다 못해 굽는 듯한 더위를 느끼며 안 그래도 허약한 내 체력은 점점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도련님! 여기 봐요! 엄청 넓어요!”
“그러냐….”
50도가 넘는 뙤약볕에서 방방 뛰노는 아린.
새삼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며, 스텔라가 탄 낙타를 살폈다.
“브웨에에에….”
낙타의 두 혹 사이에 끼인 채로 추욱 늘어져 있는 수녀.
사람보다는 짐짝에 가까운 꼴이었다.
“늘어지지 마요.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이, 사막을 건너던 낙타의 발소리가 점점 달라졌다.
터벅. 터벅.
모래를 밟는 소리가 아닌, 석재 바닥을 걷는 발소리.
그것을 들은 난 곧바로 지도를 펴며 태양의 위치를 확인했다.
“좋아. 도착했군.”
그렇게 말한 난 낙타에서 내렸다.
“모래에 함부로 발 집어넣으면 큰일 나는데.”
“걱정 마요. 여기 모래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며 수인을 맺어 소환문을 생성했다.
- 크르르르….
이윽고 스무 구 정도의 스켈레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언데드는 왜요?”
“왜긴 왜입니까. 할 일이 있으니까 그렇죠.”
스텔라의 말에 답하면서 스켈레톤의 무장을 전환시켰다.
넓적한 날과 굳건한 자루를 가진 만인의 무기.
군인의 영원한 친구.
삽이었다.
“밑에 돌바닥 보이지? 윤곽만 모이게 싹 파내 봐.”
- …키익?
잠시 말이 없던 스켈레톤들이 해명을 요구하듯 내 쪽을 바라보았다.
- 키이이이이-!
곧이어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
‘내가 이 짬에 죽어서도 삽질을 해야 하냐’라는 일종의 항의였다.
“계약문에 삽질 시키지 말란 조항 있었냐? 빨리빨리 움직여.”
부당함을 호소하는 스켈레톤들이었지만, 어림도 없다.
내 네크로맨서 경력이 몇 년인데.
그들은 곧 명령에 따라 사막의 모래들을 파내기 시작했다.
“하다 하다 언데드가 노동권을 요구하고 자빠졌네.”
그러기에 계약문에 각인할 때 잘 살펴봤어야지.
죽은 혼이라고 해서 뒤통수를 안 맞는 게 아니거든.
“도련님! 저 도련님이랑 비슷한 일 하는 사람 알아요!”
“말해봐.”
내가 스켈레톤들에게 하는 양을 보며 아린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어… 탐관오리! 그리고 악덕 귀족이요!”
“…그런 나쁜 말 누가 알려줬냐?”
“고아원 친구들이요!”
자기가 한 말이 자랑스러운 듯 방긋 웃는 아린을 쓰다듬어줬다.
악덕 영주라니, 말이 심하네.
누군진 몰라도, 걘 돌아갈 때 선물 빼고 줘야지.
“이게 다 뭐에요?.”
그러는 사이.
그 새 정신을 차렸는지, 스텔라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계속 낙타에 늘어져 있으시지.”
“그럴 생각이었는데, 등이 따가워서요.”
그렇게 말하던 스텔라가 날 향해 물었다.
“이 사막 한가운데에 석판이라니….”
“석판이 아닙니다.”
그녀의 말에 답하며 스켈레톤들이 한창 삽질 중인 돌바닥을 바라보았다.
“문이죠.”
고오오오….
모래를 걷어내자 나타난 것은 거대한 돌바닥.
새하얀 모래와는 대조를 이루는 검은 색의 석판이었다.
“그때 말했죠? 사막에 옛 제국의 왕릉이 있다고.”
“이 석판이 그 입구란 말인가요?”
“그렇죠.”
그렇게 말한 뒤 석판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사막에 창궐한 언데드들의 근원지가 여기라는 건 확실한데….’
내 목적은 이 문 아래에 잠든 언데드들을 군단에 복속시키는 것이다.
그럼 우선 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지.
‘억지로 들어가서 주민들과 척질 수는 없고. 정문으로 절차를 갖춰서 들어가야 한다는 건데….’
그렇게 생각에 잠긴 채 석판을 더듬던 순간.
“어?”
이질적인 감촉을 느낀 내 손이 한 부분에서 멈췄다.
“쯧.”
아무런 무늬도 없는 검은 석판 한가운데에 위치한 홈.
그곳을 본 난 짧게 혀를 찼다.
“술식이나 마력이면 어떻게 해 볼 수 있었겠는데.”
문을 여는 열쇠는 다름 아닌 피.
그것도 그냥 피가 아니라, 이 왕릉을 세운 아이신기오르 제국인의 피가 필요했다.
“에이씨. 텄네, 텄어.”
짧게 탄식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신기오르 제국은 내가 아직 아키몬드였던 때에도 역사서에나 나오는 제국.
이제 와서 그 혈통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가는 길에 확인이나 해 볼까 싶었는데. 이래선 뭣도 안 되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긁던 도중.
- 아아아아아-!
하늘에 띄워준 밴시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음?”
“뭐라고 하는 거예요?”
하늘에서 울리는 하운팅을 들은 것인지, 스텔라가 내게 물어왔다.
“누군가 오고 있다는군요. 말에 탄 자들이 수백 명.”
“영주의 추격자들이에요?”
“가능성은 있죠.”
추격이 붙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이야.
약간의 긴장과 함께 밴시와 내 눈을 연결했다.
두두두두…!
탁 트인 밴시의 시야 한구석에 모래 먼지가 일었다.
사막을 달리는 것이 익숙한 듯, 말을 모는 드글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잠깐만.’
밴시의 눈은 산 자의 형상이 아닌 영혼을 본다.
제국인들과는 다른 그들의 혼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곧 이어서.
“푸하핫?!”
난 그만 그 자리에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뭐에요? 더위 먹었어요?”
“그쪽이 한참 더 먹어놓고 왜 나한테 난리예요?”
스텔라의 실없는 소리를 실없이 넘기면서도, 내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열쇠가 없어서 어떻게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열쇠가 자기 혼자서 달려오고 있잖아요.”
“…예?”
스텔라는 내 말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울!”
아린의 머리 위에 앉아있던 검은 올빼미를 불렀다.
마침 좋은 기회이기도 하니.
이참에 저 녀석을 써 볼 심산이었다.
“꾸국!”
곧바로 내 쪽으로 날아온 아울이 손가락에 앉았다.
“이왕 함께하게 됐으니. 너도 슬슬 밥값을 해야지.”
“…?”
그러자 스텔라가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이 아이는 전서구잖아요. 따로 할 일이 있나요?”
“있죠.”
교화소 지하에서 본 이 녀석의 본래 모습.
그것을 떠올린 난 녀석을 하늘 위로 던져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투화악-!
주먹만 하던 올빼미는 그대로 몸집을 키워, 내 키를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모습으로 변했다.
“어? 어?”
화들짝 놀란 스텔라가 뭐라 말하려던 순간.
- 끼이이이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높은 울음소리가 사막에 울려 퍼졌다.
“저 앞에 달려오는 놈들 보이지?”
그렇게 말한 난 거대한 몸집으로 변한 아울에게 말했다.
“적당히 흩트려 놔. 방법은 너 알아서 하고.”
내 명령이 끝난 순간.
펄럭-!
아울은 그대로 가까이 다가온 모래 먼지를 향해 날아갔다.
“어, 그러니까. 저 올빼미는….”
“전서구 치곤 좀 크죠?”
그렇게 말한 난 곧바로 수인을 맺었다.
“자, 이걸로 시간은 벌었고. 남은 떨거지들을 처리해야지.”
심장에서 흐르는 마기를 모아, 망자의 목소리를 내뱉었다.
- 아까 쓸데없이 삽질 시킨다고 구시렁거렸지?
우우웅-!
새하얀 모래에 거대한 소환문이 형성되었다.
- 원하는 대로, 이제 일할 시간이다.
그 말과 함께, 저장해 둔 언데드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철컥. 철컥.
오와 열을 맞춘 채 걸어 나오는 스켈레톤들.
대방패와 폴암으로 무장한 1열.
그리고 수많은 스켈레톤 방패병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전원 위치로.”
한 손을 들어 올린 내가 그렇게 명령한 순간.
촤르르르륵-!
일사불란하게 열을 맞춘 방패벽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히-히히힝!
이윽고 모래 먼지를 일으키는 한 무리의 기병대가 시야에 나타난 순간.
“궁병. 1차 발사.”
푸슈슈슈슈슉-!
내 명령과 함께, 방패벽 사이에서 수많은 쿼렐들이 빗발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