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관문도시(2)
“그래, 클라인 공자가 도착했단 말이지….”
테르친 시 중앙에 위치한 영주의 저택.
저택의 주인인 테레인 탈리크 변경백은 하인의 말을 들으며 손에 든 술잔을 단번에 비워냈다.
덥수룩한 수염과 거친 갑옷에선 제국의 귀족들에게선 볼 수 없는 야만이 느껴지고 있었다.
“네놈의 정보. 허튼소리는 아니었군”
그렇게 말하는 변경백의 맞은편에는, 그와 같은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로브 차림의 남자가 있었다.
“글렉.”
탐탁지 않다는 듯 테레인이 말하자, 글렉이라 불린 남자는 텅 빈 술잔을 이리저리 흔들며 대답했다.
“이제야 제안을 받아들일 마음이 드셨습니까?”
능글맞은 목소리.
순간 부아가 치밀었지만, 테레인은 저런 가벼운 도발에 넘어갈 정도로 우둔한 자는 아니었다.
“그렇게 큰 건수라면 너희들끼리 독식하면 될 일이지, 왜 나한테까지 협업을 제안하는 건가?”
평소 즐겨 먹는 절인 올리브를 한 알 베어 문 테레인이 그렇게 물었다.
술과 간단한 간식을 즐기는 그의 식탁 옆에는, 보석으로 가득 찬 상자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그 ‘낙엽’의 지도자가 뇌물까지 가져오면서 말이야.”
금화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묻는 사이, 글렉은 안주로 준비된 올리브를 입에 머금고는 퉤 하고 뱉어버렸다.
‘이딴 건 왜 먹는 거야?’라며 불평을 내뱉던 그는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숱하게 거래해 온 고객이신데, 말도 없이 일을 벌이려니 죄송해서 말입니다.”
“…….”
“대충 성의 표시라고 생각해 주십쇼.”
그런 글렉의 말에 테레인의 심기가 한층 더 불편해졌다.
조직원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활동하고 있는 와중에도, 자신에게 온 보고는 없었다니.
‘집 잃은 쥐새끼들이라 생각했는데, 실력은 확실하다는 건가.’
눈을 가늘게 뜬 테레인이 그렇게 생각할 때, 글렉은 손가락을 들어 하늘 위를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 교국의 윗분들이 워낙 극성이셔서.”
윗분.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그로서는 글렉의 의뢰인이 누구인지 알 수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네크로맨서라….’
그의 구미를 당긴 것은 공자의 신분이 아닌 그의 힘.
제국과는 결이 다른 사령술을 사용한다는 글렉의 한 마디였다.
‘이번 발굴도 실패했다고 했었지.’
낮에 있었던 보고를 떠올리며, 백작이 미간을 좁혔다.
대륙 동부와 남부 전체를 호령한 대제국, 아이신기오르의 왕릉.
그곳을 발굴하는 것은, 탈리크 백작가의 숙원사업이었다.
그렇지만 왕릉이 위치한 사막 중심부는 언데드가 들끓는 마굴.
수십 번을 시도했지만, 얻은 것이라곤 시체뿐이었다.
“좋아.”
생각을 마친 테레인 백작이 알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기사 한 명을 붙여주지. 밤중에 경비병들이 귀찮게 하는 일도 없을 거다.”
“하핫! 이래서 백작님이랑 일하는 게 속이 편하다니까요?.”
빙글거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글렉의 눈에 그림자가 졌다.
“본국 쪽은 이런 융통성이 없어서, 뒤처리하기가 좀 까다롭거든요.”
가늘어진 눈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짙은 살기.
저자가 말한 ‘뒤처리’라 뭔지는 불 보듯 뻔했다.
‘살인귀 놈들.’
속으로 악담을 퍼부으며, 테레인은 글렉을 향해 말했다.
“대신.”
“음?”
뭔가 더 할 말이 있다는 듯 글렉을 부른 테레인이 그에게 말했다.
“생포 후 교국으로 압송하기 전까지, 클라인 공자는 우리 측에서 구금하겠네.”
만일 공자를 확보한다면, 왕릉을 지키는 언데드를 뚫을 가능성이 있다.
그를 위해선, 교단보다 앞서서 그를 확보해야 했다.
“예, 뭐. 숨만 붙여 놓으시면 됩니다.”
글렉의 대답은 담백했다.
어차피 고용된 그들로서는 돈만 받으면 그만.
테레인 백작이 공자에게 무슨 짓을 하든, 자기들 책임은 아니다.
“일은 저녁 중에 진행될 겁니다.”
“내 언질 해두지.”
여느 때와 같이 순조로운 거래.
더 볼 일이 없다는 듯, 글렉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말일세.”
그렇지만 그 순간.
“만약 자네들이 실패하면, 그땐 어떻게 할 생각인가?”
“실패, 뭐요?”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글렉이 되물었다.
“아니, 내 듣기로는 폴와이번 영지에서 실패했다고 해서 말일세.”
“……!”
그렇게 말하는 테레인의 얼굴에는 묘한 비웃음이 걸려있었다.
“자네들 본거지였던 폴와이번에서도 실패했는데, 이 이역만리 테르친에서는 더 어렵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자, 이번엔 글렉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뿌득.
내내 여유롭던 그의 얼굴에 균열이 생기자, 테레인은 재밌다는 듯 주먹으로 턱을 괴었다.
“…뭣 모르는 초짜들이 일을 그르쳤을 뿐입니다.”
내내 가볍던 분위기와는 다른 무감정한 목소리.
“그리고 실패한다 한들, 다시 기어들어 가 죽여버리면 그만이니까요.”
그 한마디가 끝나는 순간, 그는 온데간데없이 모습을 감췄다.
“하하하.”
짧게 웃은 백작이 중얼거렸다.
“그동안 일이 없다 보니 무료하기 짝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찾아온 일거리에 흥이 돋은 듯,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몸을 풀었다.
“이거, 오래간만에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지 않은가.”
창밖으로 펼쳐진 테르친 시의 풍경.
뉘엿뉘엿 해가 져가는 자신의 도시를 보며, 테레인 백작의 웃음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
무역으로 한몫 단단히 챙긴 서부 해안 도시에 비하면, 사막에 인접한 테르친의 규모는 빛을 바란다.
그렇지만, 변경의 중소도시라고 해서 즐길 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손님.”
그리고 내가 찾은 이 오래된 식당 또한, 이 테르친에서 찾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즐길 거리 중 하나였다.
“주문하신 전갈 요리 3인분 나왔습니다~!”
쿵-!
종업원의 한마디와 함께, 식탁 한가운데에 커다란 접시 세 개가 차례대로 올라왔다.
“와아~.”
포크를 한 손에 쥔 아린의 감탄사와 함께, 시뻘건 전갈 한 마리가 접시 위에서 그 위압적인 용모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도련님! 얘 엄청 멋있게 생겼어요!”
“…….”
전갈이 신기한 듯 내게 말하는 아린과는 달리, 스텔라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접시 위에 놓인 전갈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뭐합니까? 빨리 안 먹고.”
테르친 주변 사막에서 서식하는 흑전갈을 양념해서 버터와 함께 구워낸 별미.
집게 두 개를 이용해 전갈의 꼬리를 분지르며 그렇게 말하자, 한동안 말이 없던 스텔라가 대뜸 내게 물어왔다.
“이거, 얼마짜리였죠?”
가격?
글쎄. 얼마였더라.
잠시 생각하던 난 대충 어림잡아 그녀에게 알려줬다.
“아마 그쪽 한 달 월급 정도는 될걸요?”
“하, 한 달….”
내 말을 곱씹기라도 하듯, 스텔라는 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전갈 요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돈 내란 소리 안 합니다. 저도 어차피 집안 돈으로 사 먹는 거고.”
라인란트의 문양이 찍힌 증표를 보이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사막을 횡단하기 위해선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현지 행상들이 이용하는 경유지가 표시된 지도.
길잡이를 위해 만들어진 특수 나침반.
장시간 여행을 위한 건량과 물에, 그것을 운반하기 위한 낙타까지.
그 모든 것을 현금으로 처리하려면, 난 아마 돈 무게에 깔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공작가 어음은 어느 도시든 다 받아 주고 말이지.’
뽀각, 소리와 함께 갈라진 집게발에서 고기를 빼먹으며 그렇게 생각하던 사이.
“클라인 공자님.”
“말씀하시죠.”
사뭇 진지한 목소리와 함께 스텔라가 말했다.
“혹시 전속 신관이나 그런 거 필요 없으세요?”
“필요 없는데요.”
…목소리와 달리 그 내용은 하등 진지할 필요가 없는 헛소리였지만.
“개리슨 신부님은 공작가에서 지냈다고 들었는데요.”
“그건 그 인간이 멋대로 들이닥친 거구요.”
전속 신관은 개뿔.
매주 한 번씩 사람을 성수통에 처박았는데, 그게 신관이 할 짓이냐?
“아니 그리고,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전속 신관 얘기가 나옵니까?”
“그것도 그렇군요.”
내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스텔라는 이내.
“우선 천천히 시간을 두고 신뢰를 쌓으면 틈이 생긴다는 말씀이죠?”
“풉-!”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고, 난 마시고 있던 라임 주스를 뿜을 뻔 했다.
“…그걸 입 밖으로 꺼낸 시점에서 다 글러 먹었단 생각 안 들어요?”
곧바로 튀어나온 내 반박에 스텔라는 ‘생각해 보니 그러네’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개리슨의 제자라길래 마냥 닮은 줄 알았는데. 완전 딴판이군.’
다행인 건지 뭔지.
적어도 여행 다니는 동안 심심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잘 먹었습니다!”
그렇게 나와 스텔라가 주거니 받거니 입을 놀리던 사이.
“수녀님은 배 안 고파요? 제가 대신 먹을까요?”
그 짧은 시간동안 깨끗이 접시를 비운 아린이 스텔라의 접시에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근데, 아린 얘 지금 껍질까지 다 씹어먹은 거야?
전갈인데?
“어떻게 하면 맛있게 먹을지 생각하던 중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아린의 마수에서 전갈을 방어한 스텔라는 집게를 열어 그곳에 담긴 속살을 입에 넣었다.
“……!”
봐라, 표정 풀리는 거.
역시 별미는 별미라니까.
“자, 그건 그렇다 치고….”
일행의 식사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난 슬쩍 시선을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공자님도 눈치 챘어요?”
결국 아린에게 집게 한쪽을 빼앗긴 스텔라가 지나가듯 내게 물었다.
“그쪽보다는 늦었지만요.”
이미 한 손을 책상 밑으로 숨겨둔 그녀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지금은 저녁 식사 시간에, 식당의 위치는 유동인구가 많은 대로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날 잡기 위해 도시 경비대가 물밑에서 움직인다는 뜻이었다.
‘시민들을 저렇게 통제하는 건 지하조직이나 용병으로는 무리지.’
판단을 마친 난 곧바로 망자의 목소리를 내뱉었다.
- 레이븐.
투확-!
검은 연기를 헤치고 나온 시커먼 기사 갑주.
- 언제 부르나 기다리고 있었네.
“한동안 부를 일이 없기는 했지.”
짧은 대화를 끝으로 데스나이트가 검을 뽑자, 내내 조용하던 공간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 이 건물 안에만 스물. 밖에 깔린 놈들을 합하면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데.
마력 반응을 통해 눈대중을 마친 듯, 레이븐이 자신의 검을 곧추세웠다.
“밥 먹을 시간도 없네.”
식탁 한편에 세워둔 검을 잡는 그 순간.
카앙-!
레이븐의 검이 내게 쏘아지는 단검을 튕겨냈다.
“뭐야, 생각보다 감이 좋은데?”
이윽고 낯선 목소리가 식당 한편에서 울리더니.
“데리고 다니는 언데드도 그렇고. 그 영감이 말한 대로야.”
행상 차림을 한 남자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흉터.
눈에서는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말한 대로라.”
하지만 내 관심사는 저 남자가 아니었다.
내 관심사는, 저 자가 데스나이트를 알고 있다는 것.
말인즉, 저 암살자의 배후는 사령술에 조예가 있는 자라는 뜻이다.
‘아키몬드 교단의 끄나풀이라는 거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어차피 죄다 쳐죽일 생각이었는데, 알아서 기어들어온 셈이었으니까.
“어쩔 겁니까?”
양옆을 살피던 스텔라에게 물었다.
“아마 저것들 목적은 저일 텐데요.”
그렇게 말하자 어깨를 으쓱인 스텔라가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저 쪽에 붙을까요?”
“붙는다고 하면 받아준대요?”
“음….”
잠시 고민하던 스텔라가 남자를 향해 물었다.
“혹시 교회 믿으세요?”
그리고 잠시 정적.
“….”
“…….”
“…농담인데, 안받아주네요.”
어색한 침묵을 느낀 스텔라가 툴툴거리며 일어났다.
촤르륵-!
수십 명의 인영이 허공에서 솟아났다.
그림자 속에 감춰진 눈이 날 노려보고 있었다.
“네 능력에 대한 정보는 이미 파악했다.”
새로 나타난 자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암살자가 암살 대상한테 말을 걸다니.
저 멍청이는 뭐지?
“단장급 기사에 버금가는 검술. 하급 언데드가 수백. 그리고 데스나이트까지.”
자신 있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모르는군.’
교화소의 심판관들을 전부 없애버린 것이 효과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지만 포기해라. 이곳에 모인 병력은 네놈보다 훨씬….”
“알긴 개뿔. X도 모르면서 찾아왔구만.”
그의 말을 끊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뭐라?”
미간을 좁힌 남자가 그렇게 묻는 사이.
난 이미 식당을 둘러싼 공간 전체에 소환문을 그리고 있었다.
“만약 니들이 내 언데드에 대해 제대로 알았다면.”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에 맞춰 마기가 움직였고.
“너희는 날 잡는 게 아니라, 여기서 도망가야 했어.”
그 말과 함께, 수천 마리의 그레이브 하운드들이 사방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