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당신이 저희의 영웅입니다
“푸우….”
재판을 모두 마치고 광장으로 나오자 어깨에 들어간 힘이 절로 풀렸다.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입에 담배를 문 채 그렇게 말하는 미리암 수녀의 말에 피식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무모했죠.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으니까.”
교황 앞에선 있는 대로 허세를 부렸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신분을 바꾼 채 교국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
그렇지만, 교화소에서 탈출한 이들은 이 아이들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각지에서 잡혀 온 가문에서 버려진 귀족들.
비리에 연루된 자.
봐선 안 되는 것을 본 자.
그 중에선 분명, 이들처럼 교국 내부에서 칼을 가는 이들 또한 있을 것이다.
그 단편적인 추측만을 가지고 세운 계획이었으니까.
성공했으니 망정이지, 사실상 도박이나 다름없는 무리수였다.
“연락을 돌리긴 했는데, 진짜로 전부 다 찾아올 줄은 몰랐어.”
그렇게 말한 미리암은 큭큭 웃으며 그녀의 뒤에 선 사람들을 보았다.
“그만큼 쌓인 게 많았단 뜻이지.”
미리암은 그녀와 동행한 서른 명의 증인들을 보며 말했다.
“그런 와중에 네가 일을 벌인 거고.”
“하하.”
공작가의 후광을 지닌 나와는 달리, 이들은 어떤 보호장치조차 없는 일반인들.
교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인체실험을 증언한 이상, 이들은 교국의 치부이자 약점.
이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클라인 공자님.”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깨가 떡 벌어진 장정이 날 불렀다.
방금 전 재판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윤 게르단이라 하는 용병이었다.
“먼발치에서 뵌 것이 8년 전인데, 몰라보게 성장하셨군요.”
그렇게 말한 그가 날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 기억에는 없는 이들.
그렇지만 이들은 8년이 지난 지금도 날 기억하고 있는 듯, 눈에 물기가 고여 있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이었는데, 화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손을 맞잡으며 내게 다가온 사람들의 면면을 보았다.
몇몇은 환하게 웃고 있었고, 또 몇몇은 긴장한 듯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오히려 저희가 감사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말한 윤이 가슴팍을 쿵쿵 쳤다.
“교화소에서 탈출한 뒤 8년을 숨어 살았는데, 이걸로 속이 후련해졌습니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순간.
“재판장에 들어갈 땐 있는 호들갑은 다 떨더니, 허세는?”
릴리 메이안이라 자신을 소개했던 여인이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딴죽을 걸었다.
“무, 뭐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황급히 손을 내젓는 윤이었지만, 가만히 그것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끝나면 성기사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면서 난리도 아니었잖아?”
“체커 경 아니었으면 도망갈 생각이었고!”
“하하하하하-!”
농담처럼 주고받는 말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웃음.
그렇지만 난 그들의 얼굴이 애써 감추고 있는 한 줌 불안을 엿볼 수 있었다.
‘두렵겠지. 그럼에도 맞서기로 선택한 거고.’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용기가 아닌 오만이요, 의지가 아닌 아집이다.
진정 용기 있는 자는 두려움을 아는 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일어나 맞서는 자들이다.
‘그러니, 난 이들의 의지에 화답해야 할 책임이 있는 거고.’
기사도니 정의니, 난 모른다.
가진 것은 네크로맨서로서의 책임감.
내 계획에 동참한 이상, 난 이들을 책임지고 보호해야 했다.
“클라인 공자님.”
“아, 예?”
그렇게 생각하던 날 상념에서 깨운 것은 체커라는 이름을 가진 중년의 남자였다.
“저희가 증인으로서 재판에 참여한 이유는, 교단에 대한 복수뿐만이 아닙니다.”
심각한 표정을 한 채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을 보자, 내 표정 또한 진중해졌다.
‘역시, 편지만으로는 신뢰할 수 없겠지.’
이들은 미리암과 지방교구의 신관들이 보호한 후, 라인란트 공작령으로 이주할 계획이었다.
이미 본가에서 출발한 기사들이 교국으로 향하고 있을 터.
하지만 당장 성기사들의 눈이 도처에 깔린 마당에, 내 말을 신뢰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여러분의 신변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그렇게 입을 연 순간.
“아니, 그것이 아닙니다.”
“예?”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내 말을 끊었다.
“저희가 증인으로 참석한 진짜 이유.”
그렇게 말한 남자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8년 전에 하지 못했던 말을, 당신께 전하고자 합니다.”
진중한 목소리로 내게 말한 남자는 천천히 날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니, 저. 지금 뭐 하는….”
영문을 모른 채 그를 만류하려 하는 순간.
“교화소에서 죽어간 모든 친우들을 대표하여 전하니.”
고개를 들어서 나와 얼굴을 마주한 체커가 입을 열었다.
“클라인 라인란트. 당신은 우리의 영웅입니다.”
그리고 그 한마디에, 난 잠시 할 말을 잊어버렸다.
“지금, 뭐라고…?”
그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증인으로 나섰던 이들 모두가 내게 몸을 낮춘 채, 예를 표하고 있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때 공자님이 아니었으면, 저흰 이곳에 없었을 겁니다!”
“저희의 목숨을 구하셨어요.”
잠시, 그들이 날 부른 칭호를 되뇌었다.
영웅.
약자를 구하고, 악을 멸하며, 세상에 광명을 비추는 자.
내 심장에 검을 박아넣었던 베르켈에게 주어진 칭호.
분노와 광기에 사로잡힌 내 행진을 멈춘,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명(異名)이다.
“…….”
가슴 한구석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 감정.
라이아의 요새에서, 어린아이에게 꽃을 건네받았을 때 느꼈던 뭉클한 감정이었다.
“교단이 당신을 악마라 부른다 해도. 온 대륙이 당신을 재앙의 근원이라 떠들어도.”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이름 없는 자들.
“저희는 당신을, 그리 부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날 향한 그들의 말은 일종의 맹세와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
“꾹! 꾸꾹-!”
“아 제발 잠 좀 자자 잠 좀….”
이른 아침.
이마를 쪼아대는 아울의 성화에 난 단잠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얘는 어떻게 제 주인이 편히 쉬는 꼴을 못 보냐.”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냐….”
“감자다… 감자 싫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뒤로한 채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었다.
수도복이 아닌 간단한 여행복과, 라인란트의 인장이 새겨진 야전 망토.
본가의 정보원들이 고아원에 미리 맡겨둔 물건들이었다.
“이 녀석들도 오랜만이네.”
침대 밑에 숨겨둔 꾸러미를 풀자 검집이 끼워진 두 자루의 검이 날 반겼다.
검의 영묘에서 가져온 베르켈의 검, 노르드빈트.
얼음성의 설화수정을 깎아 만들어낸 수정검까지.
스릉-!
검을 뽑자 잘 관리된 검날이 새하얗게, 그리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철컥!
그렇게 소지품을 확인하고 외출준비를 다 마쳤을 때쯤.
“유리로 만든 검이라니, 별 해괴한 걸 다 보겠구만.”
한 손에 위스키 병을 든 미리암이 그렇게 말하며 방 밖으로 나왔다.
“잠깐만, 그새 한 상자를 다 비운 겁니까?”
술병으로 방을 거의 메우다시피 한 미리암의 방을 보며 물었다.
“엉?”
뭐가 잘못되었냐는 듯 괴상한 표정의 미리암을 보니 더 뭐라 할 기운도 없었다.
“형아, 밥 안 먹어?”
아이들이 모두 일어난 식사 시간.
살집이 두툼하게 오른 남자아이 한 명이 내게 물어왔다.
이름표에 적힌 이름은 ‘레빈’.
이전에, 감자를 통한 심도 있는 토론을 펼치던 아이였다.
“왜. 좀 모자란가?”
그렇게 말하며 식탁에 놓인 감자를 건네주려 했지만.
“아니야. 주지 마. 감자는 지긋지긋해.”
이내 굳은 표정을 한 레빈이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감자스프도, 감자 팬케이크도 지긋지긋해.”
“이번에 새로 나온 이 감자빵도 지긋지긋하지.”
“그중 가장 지긋지긋한 건 감자로 점철된 우리의 삶이지만 말이야.”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옆자리에 앉은 친구와 철학 논쟁을 시작하려던 찰나.
“레빈이 또 반찬 투정한대~요.”
“아, 안 그랬어-!”
그의 사소한 반란은, 언제나 반찬 투정이라는 거대한 벽에 막혀 좌절되는 것이었다.
아아, 철학가를 죽이는 것은 압제와 폭력일지니.
아름답게 핀 지성의 꽃은 이리도 쉽게 짓밟히는구나.
…슬슬 머릿속으로 하는 개소리에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잠이 덜 깼나?
똑똑똑.
상념에 빠진 채 옥수수 맛이 나는 감자빵을 입에 집어넣고 있던 때.
문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가 날 상념에서 깨웠다.
“시간이 된 모양이군.”
약간의 경계를 담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리시안 극동에 위치한 원초의 화로.
그곳에 불을 밝히는 의식인 태양길 순례.
그렇지만 이 순례가 순탄하게 이어질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교단이 내게 내건 조건부터 그렇지.’
순례자가 된 내게 교단이 내건 조건은 두 가지였다.
‘사용하는 도로는 교단에서 규정한 것을 이용할 것.’
‘교단에서 지정하는 성직자 한 명과 동행할 것.’
내 이동 경로를 제한하고, 24시간 감시하에 넣겠다는 뜻이었다.
‘아마 지금 문을 두드린 자가 교단에서 보낸 동행일 테지.’
요주의 인물인 날 항상 감시해야 할 교황의 수족.
“습격도 숱하게 일어날 테니, 기회를 봐서 제거하는 게….”
그렇게 내가 향후 대책을 궁리하던 사이.
끼이익.
나무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클라인 라인란트 공자님.”
문밖에서 들려온 것은 아직 어린 여인의 미성(美聲).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서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검은 단발은 빛을 받을 때마다 푸른 빛을 냈고.
그와 같은 빛을 띤 검은 눈이 내 모습을 담고 있었다.
“태양길 순례에 동행하게 될 수녀, ‘스텔라’라고 합니다.”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차분한 목소리.
인형과 같이 무표정한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아니, 잠깐만’
뇌리를 스치고 간 불길한 예감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스텔라라는 수녀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어?”
“어.”
나와 그녀는 서로를 알아챈 듯, 동시에 멍청한 소리를 냈다.
“대성당 지하감옥에서 만난….”
“이름 모를 형제님?”
그녀를 가리킨 내 손가락이 떨려왔다.
아니지.
이건 아니지!
왜 하필 동행으로 이런 인간을…!
“오오!”
“스텔라 언니다!”
나와 스텔라가 서로를 마주 보며 그러고 있을 때.
식사 중이던 아이들이 저마다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뭐야, 아는 사이야?’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반기는 듯한 태도.
“다들 잘 지냈군요.”
수녀 역시 면식이 있는 듯,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안부 인사를 건넸다.
“이번엔 얼마나 있어? 맛있는 거 사 왔어?”
“잠깐 들린 거예요. 그리고 돈은….”
그렇게 그녀가 아이들의 말에 화답하며 는 사이.
“수녀님-! 스텔라 언니 왔어요-!”
“아….”
미리암을 부르는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그녀의 무표정에 살짝 균열이 갔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빠악-!
성기사들을 내쫓을 때 날렸던 삶은 감자가 그녀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위협용이 아닌 실전용.
직선으로 날아간 삶은 감자는 그대로 수녀의 이마에 부딪혀, 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누가 왔다고~?”
그렇게 말하며 주방에서 걸어 나온 미리암의 손에는, 벌겋게 달궈진 후라이팬이 연기를 뿜고 있었다.
“다녀, 왔습니다….”
어색한 표정을 한 그녀가 뭐라 말하려던 순간.
“이 싸가지 없는 X이 집에 얼굴 좀 비추라고 한 게 언젠데, 이제야 기어들어 와?!”
걸쭉한 욕설과 함께 미리암의 감자가 다시 한 번 그녀의 머리를 향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