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면죄부
“허이구, 으리으리하구만.”
중앙교구에 도착한 난 하늘 높이 뻗어있는 대성당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케르시아스 신성교국.
신성교단의 총본산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우리 가문 저택의 다섯 배는 되는 것 같은데.”
중앙에 위치한 대신전을 중심으로 하여 십자 모양으로 뻗은 형태.
그것들을 받치며 서 있는 수많은 성탑들을 보며 생각했다.
‘성당이라기보단, 궁전과 같은 구조로군.’
금빛으로 빛나는 수많은 문양들과 장식.
종교시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호화로운 공간을 걷고 있던 때였다.
철컥!
날 둘러싼 성기사들의 움직임이 굳고, 몇몇 기사들은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뭐야, 습격인가?’
갑자기 경계태세를 취하는 성기사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하던 때.
“이 자가 클라인 공자인가?”
굵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입에 담고 있었다.
‘뭐야. 누구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미간을 좁혔다.
덥수룩한 수염과 수도복을 찢고 나올 듯한 근육.
그리고 허리춤에 찬 플레일까지.
얼핏 보기엔 교화소의 심판관들과 비슷한 형상이었지만, 그가 내뿜는 분위기는 그들과는 사뭇 달랐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어깨에 두르고 있는 붉은 갈레로.
금실로 장식된 붉은 띠를 보자, 성기사들 중 한 명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바울 추기경님.”
추기경.
교황의 선출권을 지닌 128명의 고위사제 중 한사람이었다.
“죄인을 압송하는 중입니다. 죄송하지만….”
“이 자가 클라인 공자가 맞냐고 물었네만.”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성기사들의 눈에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
“예, 예에….”
“흠.”
잠시 성기사들을 흘겨본 남자는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가 날 향해 물었다.
“개리슨 신부가 밝힌 것이 사실이오?”
“어, 예……?”
아니, 만나자마자 뭔 소리야?
대뜸 내밀어진 질문에 대답해야 할지 말지를 재고 있던 사이, 그는 날 향해 재촉하듯 물어왔다.
“크리펠 이단 교화소에서,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벌인 것이 사실이냐 묻지 않았소!”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붙잡으려는 추기경을 성기사들이 막아섰다.
“바, 바울 추기경님!”
“호송 중인 죄인을 심문해서는 안 됩니다! 부디…!”
“놓으시오! 그대들도 성기사단의 일원이라면, 명명백백히 진실을…!”
그렇게 바울 추기경과 성기사들이 한바탕 몸싸움을 벌이던 때.
내 머릿속은 온갖 추측과 가정으로 복잡해진 상태였다.
‘추기경 중 한 명이 대성당 한복판에서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교단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동요가 있단 뜻.’
그리고 내 발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선, 그들의 심리를 자극할 필요가 있을 터였다.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머릿속으로 판단을 마친 난 바울 추기경을 향해 목소리를 높혔다.
“개리슨 신부가 거짓을 고할 사람으로 보입니까?”
“무, 무슨…!”
“섣불리 입을 열지 마시오 클라인 공자!”
내 돌발행동에 발끈한 성기사가 서둘러 다른 기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입을 막아라! 참회실로 데려가! 어서!”
곧바로 내 양어깨를 잡은 성기사들이 우악스러운 팔로 날 끌고가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크리펠이 어떤 곳이었는지! 개리슨 신부가 어떤 자였는지!”
그들의 방해를 무릅쓴 채 성당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만일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 내가 한 이 행동이, 이후 있을 재판에서 꽤 중요하게 작용할 것 같으니 말이야.
***
“아직 죄가 확정되지는 않았으니, 감옥에 보내지는 않을 것이오.”
미리암의 경고가 먹힌 것일까, 날 회유하기 위한 술수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난 건물 내부에 있는 철문 앞에 다다랐다.
“허나!”
날 바라본 성기사가 짐짓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성하의 자비도 여기까지이니,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말을 마친 성기사들은 날 철문 안으로 밀어넣었다.
쿵-!
그들이 날 가둔 곳은 중앙교구 상층에 위치한 참회실.
문만 걸어 잠그면 훌륭한 감옥으로도 쓸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윽박지른 것 치고는….”
꽤 널찍한 참회실을 둘러보며 짧게 평했다.
“방이 꽤 호화스러운데.”
참회실이라기보단 여관 객실과 같은 구조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설마 진짜로 미리암 수녀한테 겁먹은 건 아닐 테고.”
성기사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던 수녀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아키몬드의 환생인 난, 교국에서는 1급 종교사범.
본래라면 지하 감옥에 수감 되어야 할 터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편의를 봐준다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지.
“그 교단이 이제 와서 공작가 대우를 해줄 리도 만무하지.”
그랬으면 애초에 벤을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유가 뭘까.”
그렇게 혼잣말한 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내가 고아원에서 버티는 동안, 교단 내부에서도 말이 나온 거다.”
개리슨의 성격상, 교화소에서 벌어진 일을 허투루 넘기지는 않았을 터다.
‘그렇다면 대행자가 교화소의 부정을 폭로한 셈이니, 난리가 났겠지.’
교황과 교국이 성혈을 유통한다고 해서 모든 성직자들이 그에 연루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번거롭게 교화소에 연구소를 숨길 필요조차 없을 테니까.
정치에는 뜻을 두지 않는 성직자.
겉으로는 교황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지만, 뒤에서 기회를 노리는 반대파들.
개리슨이 폭로한 교화소의 실상은 그들에게 좋은 먹이를 던진 셈일 것이다.
‘미리암 수녀가 날 지킨 진짜 이유가 이거였군.’
개리슨이 교화소의 실상을 폭로하고, 성혈과 실험에 관해 논란이 점화된 상황.
이제 난 단순한 죄인이 아닌, 개리슨의 말을 입증할 유일한 증인이 된 것이다.
“졸지에 교단의 파벌 다툼의 중심이 되었어.”
쓰게 웃었지만, 그와 반대로 내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지금 내게 있어서는, 이 상황이 오히려 큰 기회였으니까.
‘재판 전까지, 교단은 섣불리 날 죽일 수 없다.’
이미 대행자인 개리슨이 일을 벌여 놓은 상황.
섣불리 날 죽인다면 되려 의혹이 증폭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교황 측에서 써먹을 만한 방법은….’
그렇게 생각을 거듭하고 있을 때.
똑똑.
굳게 잠긴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라인 라인란트 공자님.”
문이 열리고, 낯선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갈한 신부복 차림을 한 남자는 성직자보다는 무인에 가까운 형상이었다.
“그쪽은?”
참회실 문을 멋대로 열 수 있다면, 아마 교황 측 인사일 테지.
“인사드리겠습니다. 클라인 라인란트 공자님.”
내 생각이 맞았는지, 남자는 날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교황 성하의 보좌관을 맡고 있는 버켄이라고 합니다.”
교황의 보좌관.
잠시 그를 바라보던 난 식탁에 놓인 식사용 나이프를 들며 물었다.
“성하의 보좌관께서 죄인에게 존칭을 붙여도 되는 겁니까?”
“하하하, 죄인이라니요. 그런 섭한 말씀을.”
비꼬듯 물어봤지만, 그에게 별다른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교화소와 라인란트 사이의 불미스러운 오해일 뿐이죠.”
“오해?”
“예. 오해요.”
세 살짜리 아이를 지하에 처넣고.
한평생을 멸시 속에 살게 해 놓고선.
이제 와서 오해라고.
“교황 성하께서도 이 불미스러운 일에 큰 유감을 표하셨습니다.”
내 표정이 뒤틀리는 것을 모르는 듯, 버켄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주신 케르시아스의 대리인으로서, 죄인 ___ 의 원죄를 사하노라.]
양피지에 붉은 잉크로 쓰여진 문장.
그리고 그 아래에 찍혀 있는 교황, 브리간테의 문장까지.
“면죄부….”
그 의도가 훤히 보이는 행동.
비웃음과 동시에 속이 뒤틀리는 혐오감이 밀려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키몬드의 환생이라는 혐의.
교단은 지금, 그 멍에를 빌미 삼아 날 회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서명만 하신다면 이후의 처우는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재판도 약식으로 진행될 거고요.”
암, 그러시겠지.
재판이 길어질수록 교화소와 성혈에 관련된 질문이 많아질 테니까.
“하오니, 공자께서는 서명하신 이후….”
“교화소와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입 닥치고 있어라.”
내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오자 순간 움찔한 버켄이 말을 멈췄다.
“…이해가 빠르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정중히 고개를 숙인 그의 대답에 난 입가를 비틀어 보였다.
“원하신다면, 공자님의 혐의에 관해서도 교단 차원에서 재검토를….”
“지랄하고 있네.”
이어지는 버켄의 말을 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화소에 가두고, 날 죽이겠다며 심문관까지 보낸 주제에.”
혐오와 적의를 가득 담은 채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이제 와서 내가 당신들을 신뢰할 것 같아?”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를 떼는 그의 말에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부’ 극단적인 이들의 개별 행동일 뿐, 교단 전체의 의지가 아닙니다.”
들을 때마다 진저리가 난다.
그놈의 일부.
밥 먹듯이 이뤄지는 꼬리 자르기.
이게 성직자인지, 하수구 똥통에 처박힌 지렁이 새끼들인지.
“근데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냐.”
그렇게 말한 내 다음 행동에, 버켄의 얼굴이 굳었다.
찌이익-!
내 손에 반으로 찢겨, 땅바닥에 떨어진 면죄부.
교황이 찍은 인장을 짓밟으며, 난 그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난 너희들이랑 야합할 생각 없으니, 꺼져.”
“하, 하하….”
내 행동에 적잖이 놀란 듯, 헛웃음을 흘린 버켄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쿵-!
그에게서 발한 신성력이 내가 앉은 참회실을 무겁게 짓눌렀다.
“지금 뭔가 크게 착각하고 계신 모양인데.”
쩌적!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갈라진 나무 잔에서 포도주가 흘러나왔다.
“칼자루를 쥔 것이 어느 쪽인지 오판하지 마십시오. 클라인 공자.”
이제 그의 어투는 회유가 아닌 협박으로 변해있었다.
내가 좋은 말로 해서 들어먹을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안 것이다.
“지금 전 당신과 협상을 하러 온 것도, 거래를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며 내게 다가온 버켄은 곧바로 내 멱살을 잡았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얌전히 지시한 대로…!”
“손.”
그의 위협을 중간에 끊고 내뱉었다.
“뭐라고?”
얼굴을 찡그린 그가 그렇게 되묻는 순간.
“손 치우라고 X 만한 새끼야.”
그렇게 말한 것과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를 휘둘렀다.
스걱-!
한 박자 늦게 들린 절삭음.
방금 전 까지 날 잡고 있던 버켄의 손목을 그어버렸다.
“끄, 끄아아악?!”
참회실 바닥에 보좌관 버켄의 피가 흩뿌려졌다.
손목을 깊숙이 파고들어 동맥을 끊어냈으니.
움켜쥔 손목에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대성당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자, 질겁한 성기사들이 내게로 몰려왔다.
고통에 겨워 침과 눈물을 쏟아낸 버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버, 버켄 수사님?!”
“동맥이 잘려 나갔다! 치유사를 불러라!”
“클라인 공자! 이게 무슨 짓이오!”
황급히 사람을 부르러 기사 몇 명이 달려갔고.
남은 성기사들은 얼굴이 새파래진 채 날 추궁했다.
“북부에서 얌전히 지내주니까, 공작가문이 그리도 우습게 보였나?”
그렇지만 난 그가 붙잡아 구겨진 옷을 툭툭 털며 바닥에 쓰러진 버켄을 내려다보았다.
“일개 신관 새끼가, 어디서 라인란트 공자한테 멋대로 손을 대?”
“……!”
“무, 뭐라……!”
제국의 공작은 한 나라의 왕가와 같은 귄위를 지닌다.
그럼에도 교단이 이토록 라인란트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약하기 때문이지.’
방계에게 이권을 빼앗기고, 제국에게 이권을 빼앗기며 몰락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젠 아니야.’
헬리안은 무너졌고, 방계는 내 수중에 떨어졌다.
뒤늦게 날 다시 교화소에 처넣어 견제해 볼 생각이었겠지만, 글쎄.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