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 주마등이 좀 기네
‘끄으?!’
정신을 잃은 벤이 깨어났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의 손에 얼굴을 붙잡힌 상태였다.
“흠….”
화상 자국도, 한쪽 눈의 흉터도 없는 말끔한 얼굴의 자신.
‘뭐야, 왜 내 눈앞에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순간.
그의 얼굴을 품평하던 벤은 더 관심이 없다는 듯 그를 심판관들에게 넘겼다.
“이건 못 먹여. 처리해.”
그렇게 말한 벤은 손날로 두어 번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뭐, 뭐? 처리? 이건…!‘
상황이 이상하다는 느낌에 벤은 입을 벌려 목소리를 냈다.
“자, 잠깐만 기다리게! 본가에, 본가에 연락하면 사람이…!”
그렇지만 거기까지 말한 벤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내 목소리가 왜 이러지?’
다급하게 외치는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힘없이 떨리는 손발도, 교화소를 낯설어하는 이 공포심도.
시선을 돌려 자신의 양손을 보자, 그곳에는 피골이 상접한 노인의 손이 있었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자신이 다른 이의 몸을 움직이고 있다니?
“그래, 이 녀석인가?”
그가 놀라고 있던 사이, 시야에 보이는 말끔한 얼굴의 자신은 한 무리의 성직자들에게 다가갔다.
“베, 벤 소장님….”
“이런 어린아이를 교화소에 보낸다니, 너무 가혹해요!”
그에게 항변하는 수녀의 품에 은발 머리의 아이가 안겨있었다.
그렇지만 말끔한 얼굴의 벤은 엄숙한 얼굴로 심판관들을 향해 손짓했다.
“소장님…!”
“교단이 그대들에게 명한 것은 내게 저 아이를 보내는 것이지, 저 아이를 변호하라는 것이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말한 그는 이를 드러내며 다른 성직자들을 위협했다.
“아니면, 그 사이에 저 악마의 꾐에 넘어가기라도 한 건가?”
기억 속에 남아있는 광경.
그리고 그 와중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저 어린아이의 눈까지.
그것을 보자, 벤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졌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클라인, 라인란트…!’
의문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공포가 엄습했다.
클라인. 아니, 아키몬드.
그가 자신에게 내렸던 형벌은 분명…!
스릉-!
그가 생각에 몰두한 사이, 날카로운 쇳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자, 잠깐만 기다리게! 제발!”
제 것이 아닌 목소리가 멋대로 나오고, 그가 더 생각을 이어가려던 그 순간.
서걱-!
시야가 핑 돌고, 그의 머리는 목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끄아아?!’
그렇게 한 차례 죽음을 경험한 벤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아니.
잃었다고 생각했을 뿐.
‘으헉?!’
그는 다시 깨어나, 자신을 둘러싼 심판관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건방진 놈. 감히 도망을 치려 하다니.”
“네 놈을 잡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빠악-!
머리를 걷어찬 심판관들의 발길질에 정신이 멍해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 보려 몸을 움직이려 한순간.
“아아, 아아아! 끄아아아아-!”
온몸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
비명 말고는 그 어떤 소리도 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고문기술자가 일을 꽤 열심히 해 뒀군.”
그의 비명을 즐기기라도 하듯, 흡족하게 웃는 자신의 얼굴.
제 것이 아닌 증오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 넘쳤다.
“안 그래도 대행자 놈이 저 악마 새끼를 싸고도는 게 마음에 안 들던 차에 말이야.”
그렇게 쏘아붙인 자신의 시선은 사방에 늘어선 감옥 중 한구석을 향하고 있었다.
“…….”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서슬 퍼런 눈.
관리되지 않아 엉망으로 산발했지만, 클라인의 은발은 그 특유의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어이쿠, 눈 좀 봐라. 잡아먹히겠네.”
그렇지만 당시의 그가 보기에는 그저 피라미에 불과했던 어린아이.
짧게 비웃은 당시의 자신은 더 볼 것 없다는 듯 심판관들에게 명령했다.
“죽여버려. 어쭙잖게 반기를 들면 어찌 되는지 보여줘야지.”
그 말과 함께, 뒤통수로 격통이 밀려왔다.
으직-!
심판관의 메이스가 머리를 내려치는 소리.
둔탁한 충격과 함께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쏟아졌다.
‘꺼, 꺼어어…!’
뇌가 뭉텅이째 짓뭉개지는 느낌과 함께, 그의 의식은 점점 멀어지고.
‘으으으으…!’
그는 다시 한번, 누군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이름 없는 죄수의 몸으로 깨어났다.
“난 아무 죄도 없다고!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억울한 누명을 쓴 세리의 몸으로.
“부탁입니다, 제발 우리 스텔라, 이 아이만큼은 제발…!”
교화소 안에서 태어난 이름 없는 아이의 아버지로.
“벤 수사, 이러지 마시오! 난 그저, 교단의 미래를 위해 충언을…!”
팔리만의 뒤를 캐던 어리석은 수도사의 몸으로도, 죽음을 경험했다.
‘그만… 이제, 이제 그만…!’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정신에 가해지는 끔찍한 고통.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절망 속에서, 얼마나 더 많은 죽음을 경험했을까.
“헉…. 헉…!”
이제 그는 어느 죄수의 모습을 한 채, 눈앞에 보이는 출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쫓아라! 죄수들이 도망친…! 으아악?!”
“신관들은 뭘 하는 거야?! 도대체 왜 저게 지하에서…!”
콰드득-!
감옥이란 감옥은 전부 부서진 채, 죄수들이 사방팔방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들을 막아야 할 심판관들은 전부 하층으로 내려가, 날뛰는 ‘그것’을 잡는 데에 급급한 상황.
‘이건 8년 전에 있었던…!’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그때를 떠올린 벤을 향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끄아아아악-!”
피를 뚝뚝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있었다.
“이걸로 네 업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벤 드레이크.”
일곱 살 난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의연한 모습.
이 혼란을 틈타 교화소의 반란을 주도한, 가증스러운 꼬마였다.
‘네놈이, 네놈이 나를-!’
어린 클라인을 향해 저주를 내뱉었지만, 그는 무력했다.
이것은 과거일 뿐, 현실이 아니다.
자신은 이미 죽어, 다른 죄수의 죽음을 경험할 뿐이었으니까.
“막을 수가 없습니다!”
“소장님이 쓰러지셨다! 이러면 우린…!”
“후퇴! 교화소 밖으로 후퇴하라-!”
자신을 수습한 채 교화소 밖으로 도망치는 심판관들.
남겨진 이들은 검은 구덩이에서 나온 그림자에 둘러싸여, 그 안으로 녹아 없어지고 있었다.
치이이익…!
창에 꿰뚫린 채, 숨이 끊어지지 않은 자신도 마찬가지로.
“안녕하세요?”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순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고개를 들자, 그곳에 서 있는 것은 하녀복 차림의 소녀.
갈색 머리와 커다란 검은 눈.
그리고 그 눈보다도 커다란 안경을 쓴, 어디에나 있을 법한 어린 하녀였다.
“너는……”
그렇지만 잠시 그 소녀를 바라보던 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첫째는 이곳이, 아키몬드가 만들어낸 기억 속 세계라는 점.
그곳에서 저 소녀는, 이 이름 없는 죄수가 아닌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두 번째는 소녀의 모습.
소녀의 하녀복 치마 밑으로 무언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로 이루어진, 기괴한 그녀의 몸이.
“어… 떻게…!”
벤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지막으로 체험한 죽음.
교화소 전체가 뒤집힌 대사건.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냐…?”
크리펠 이단 교화소의 진짜 목적은 수감이나 연구가 아니다.
최초의 목적.
그것은 이 구덩이 끝에 잠들어있는 한 존재를 발굴해내는 것.
그리고 이 소녀가 바로 그것이었다.
크리펠 최심층부에 잠들어있던 이형의 존재.
그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의 편린.
‘그럴 리 없어! 그것은 분명 그때, 개리슨의 손에…!’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내젓던 벤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때의 기억을 되짚던 그의 사고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파괴되었던 게 아니었어….?”
넋이 나간 듯 그렇게 되뇌인 벤의 눈에 그녀의 목을 향했다.
살짝 보이는 아린의 뒷덜미.
그곳에는 기괴한 형상의 룬이 새겨져 있었다.
“히히-!”
해맑은 표정으로 치맛자락을 들어 올린 아린이 허리를 살짝 숙여 보였다.
무도회에서 인사를 건네는 레이디의 모습.
그것을 어설프게 따라 한 것이었다.
“도련님이 그랬어요. 여기 오면 친구도 잔뜩 만날 수 있고, 먹을 것도 엄~청 많다고.”
친구.
먹을 것.
그것들이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를 짐작한 벤은 온몸의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전부, 그 녀석의 계획이었단 말인가…?”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감히 맞서겠다는 생각 자체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느끼며, 그는 허탈하게 내뱉었다.
“네 폭주도, 거기에 맞춰 일어난 반란도. 그리고 개리슨 까지, 전부…!”
벤의 한 줌 남아있는 의식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쩌억-!
그의 시야 전체를 메꾼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 아…!”
군침을 흘리는 그 입이 코앞까지 다다른 순간.
“제발 살려…!”
으직-!
교화소장 벤 드레이크는, 그의 유언을 다 끝마치지도 못한 채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으음~”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시커먼 그림자 속에서 입을 우물거리던 아린이 얼굴을 찡그렸다.
“퉷-!”
그녀가 뱉어낸 것은, 루비처럼 붉은 액체.
순수한 생명력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성혈이었다.
“치, 별로 맛없네. 엄청 이쁜 색인데.”
***
으적- 으적-
뼈를 씹어 삼키는 소리와 함께 벤의 몸이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걸로 화풀이는 다 끝마친 셈이군.”
그렇게 말하며 난 정렬해있는 군단 일부에게 명령을 내렸다.
- 밑으로 가라. 그곳에 숨어 떨고 있는 자들에게 너희의 분노를 보여라.
내 명령을 받은 언데드들이 곧바로 대답했다.
- 크아아아-!
- 컹-! 컹-!
처음 돌격을 명령했을 때처럼, 수천 마리의 그레이브 하운드가 지하로 몰려갔다.
‘생체 지도에 나타난 이들의 수는 2백 남짓.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지하에 있는 네크로맨서들은 전투원이 아닌 연구원.
탈출로가 막힌 이상, 저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몇 없을 터.
내가 지시를 내릴 가치조차 없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야? 신부.”
하층 구역 청소를 명령한 난 곧바로 개리슨을 향해 말했다.
“마기와 원혼으로 이루어진 망자의 군대.”
싸움이 끝났음에도, 아직 힘을 거두지 않은 개리슨의 모습.
“이것으로, 네게 씌워진 혐의는 진실이 되었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 개리슨이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 X발 미치겠네.”
그곳에서 느껴지는 것은 환희, 그리고 살의였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이 녀석이야.’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난 곧바로 남은 언데드들에게 전투 준비를 명령했다.
촤르르르륵-!
나와 개리슨 사이에 쳐진 스켈레톤의 방패벽.
그와 동시에, 교화소 상층 전체를 포위한 언데드의 군대가 일제히 개리슨을 겨눴다.
쿠구구구구…!
땅을 울리는 진공과 함께, 그 중심에 선 개리슨이 몸을 낮췄다.
주먹을 땅에 댄 채로 날 바라보는 저 모습.
마치 돌진을 준비하는 황소 같은 형상이었다.
“대륙 최악의 네크로맨서, 아키몬드.”
생각을 마친 그는, 더 이상 나를 클라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 이상 성장하기 전에, 내 손으로 네 놈의 숨통을…!”
그렇게 말한 개리슨이 전투 태세를 취한 그 순간.
“안돼요. 신부님.”
하녀복 차림을 한 아린이, 내 언데드 군단과 그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린, 양…?”
예상치 못한 그녀의 등장에 맥이 끊긴 듯, 개리슨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그렇지만 아린은 그런 개리슨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교화소의 지하를 가리켰다.
“도련님은 아래에 있는 친구들이랑 만나야 한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