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 마녀의 자식
딸깍.
라인란트 저택, 하인켈의 서재.
이름 없는 꽃으로 우린 차향이 서늘한 공간을 채웠다.
후룩-.
자신의 작품을 한 모금 머금은 하인켈의 표정이 풀어졌다.
오래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포근한 향기.
한평생 검만 휘둘러 온 하인켈에게 있어선, 이것이 유일한 재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병신같이 망설이니까, 마지막 순간에 와서 이렇게 되는 거야.’
그렇지만 그 따뜻함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머릿속에 떠오른 악에 받친 목소리가 그의 미간에 주름을 만들어냈다.
“후우.”
결국, 죽이지 못했다.
가문의 공적으로 선포하고, 기사단을 이끌고 쳐들어가, 그녀의 목을 앞에 둔 상황에서.
그 모든 결정을 내리고도, 자신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또 여기서 궁상떨고 있을 줄 알았어요.”
전조 없이 들려온 목소리.
손에 드린 찻잔을 응시하던 하인켈이 목소리의 주인을 불렀다.
“프리실라.”
외눈 안경을 낀 프리실라 공후.
밤중에도 내전의 뒤처리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는지, 그녀의 손에는 지금도 토지대장과 서류가 한 움큼 쥐어져 있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공작 전하께서 이렇게 기운 없어서 되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는 프리실라를 보며, 하인켈은 차망에 찻잎을 담았다.
“지난 전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소.”
“…헬리안에 대해서요?”
잠시 말을 멈춘 하인켈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당신은 못 당해내겠군.”
“누구에 비하면 양반이죠.”
미사여구를 걷어내고 핵심만을 논하는 것이 그녀의 화법.
잠시 뜸을 들인 하인켈은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헬리안의 목에 검을 겨눈 건 나였지만, 그녀를 죽인 건 클라인이었소.”
“…….”
돌아온 뒤 좀처럼 입에 담지 않았던 전투에 관한 얘기.
하인켈의 목소리에 프리실라 또한 표정을 굳혔다.
“만일 그 아이가 없었다면, 그녀를 죽이지 못했겠지.”
다 마시고 난 찻잔을 바라보던 하인켈의 표정에 균열이 생겼다.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한때 가족이었던 자를 죽인 거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하인켈의 자책을 끊어낸 프리실라는, 서류를 내려놓고 하인켈이 건넨 차를 받았다.
“망설였다고 해서, 당신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내가 용납할 수 없소.”
라인란트 공작의 목숨은 자신이 아닌 가문의 것.
그의 죽음은 그 자신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가문에 몸담은 수많은 기사들, 가신들, 그리고 다른 귀족들.
그의 뒤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삶이, 그의 행동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대의 앞에선 누구보다 냉정해야 하는 것이 귀족이요. 그렇지만 난….”
“대의를 방패 삼아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도 귀족이죠.”
자책으로 일그러지던 하인켈의 목소리가 멎었다.
“냉정한 판단이 필요할 때가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의 시선을 받으며 입을 연 프리실라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괴물이 되지는 말아요.”
“…….”
하인켈은 천천히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프리실라의 말은 제국 정계에서 펼쳐지는 온갖 진창을 보고 겪은 경험담.
매일같이 암투와 음모가 끊이지 않는 귀족사회에 대한 신랄한 한 마디였으니까.
“당신이 그런 귀족이 되는 걸 본다면, 전 그녀를 볼 낯이 없어요.”
그렇게 말하던 프리실라가 천천히 한쪽 팔을 들어 보였다.
그곳에 있는 것은 얇은 가죽 팔찌.
공작부인의 지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손때 묻은 물건이었다.
“클레어….”
팔찌에 새겨진 문양을 본 하인켈이 말을 흐렸다.
저 팔찌의 원래 주인은 클레어.
죽은 그녀가 프리실라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우정의 증표였다.
“미안하오, 프리실라.”
프리실라 하인켈의 눈이 창밖을 향했다.
저택 정문 앞에 심어져 있는 커다란 나무.
예전에, 클레어가 항상 올라가 있던 나무였었다.
똑똑.
그러던 중, 문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가 하인켈을 상념에서 깨웠다.
“전하.”
라인란트의 집사장, 버크만의 목소리였다.
“클라인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런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은, 이번에도 일을 해내고 왔다는 것이겠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가는 클라인을 떠올리며 하인켈은 표정을 고친 뒤, 서재 밖으로 나갔다.
“고민은, 해결되셨습니까?”
그의 심중을 꿰뚫듯, 집사장이 그렇게 물어왔다.
젊은 시절부터 그를 보필해 온 자신의 친구.
“물론이지.”
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하인켈은, 맑은 웃음과 함께 그를 향해 말했다.
“별채로 가는 마차를 준비해주게.”
별채.
그 말을 들은 버크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채비하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하인켈의 명에 따랐다.
***
“올 때마다 일거리를 늘리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새오 온 서류 더미들을 보며 절망하던 프리실라의 행정관들.
‘저 새끼다….’
‘저 자식이 우리 과로의 원흉이다….’
…라고 말하듯, 날 쏘아보는 행정관들의 시선이 아련하기 그지없었다.
“아뇨, 훌륭한 정보였어요.”
서류 중 하나를 훑어본 프리실라가 혀를 내둘렀다.
제국과 방계귀족,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은밀한 거래.
내가 건넨 서류에는 지출 내역과 장부, 거기에 연루된 인원의 명단이 빼곡히 적혀있었으니까.
“전부 척결하기에는 우리 측 여력이 부족합니다.”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내 말에 답한 프리실라가 스산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정도면, 기사단을 움직일 명분으로는 충분할 테니까요.”
계산을 모두 마친 프리실라가 그렇게 말하자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들을 전부 잡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준비 없이 그들을 친다면 되려 벌집을 들쑤신 격.
난리통 속에서 또 보이지 않는 곳에 자신의 끄나풀을 남겨둘 테니까.
‘천천히 때를 기다렸다가, 벌집째 태워버리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지.’
그렇게 생각하던 때.
덜컹-!
타고 있던 마차가 흔들리자 한창 졸고 있던 델라인이 흠칫하며 깨어났다.
“머, 으어?”
“이제 일어났나요. 델라인?”
프리실라가 못 말리겠다는 듯 델라인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괜찮아요. 어머니, 이런 건 이제 제가…!”
“한참 만에 보는 아들인데, 이런 거라도 해 줘야죠. 빨리 얼굴 이리 내요.”
“읍! 으으읍!”
스물이 넘어가는 유부남이지만, 어머니 앞에선 언제나 철부지 자식인 법.
집요한 프리실라의 손길을 피하는 델라인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클라인.”
그런 날 부른 것은,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하인켈이었다.
“예, 아버지.”
“지금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느냐?”
차창 사이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던 하인켈이 그렇게 묻자, 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그저, 따라오라는 말 밖에는….”
그렇게 말을 흐리면서도 어렴풋이 짐작은 갔다.
내가 출발하기 전에, 하인켈이 했던 말.
공작가 인원들이 한번에 움직이는 행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오늘 날짜까지.
‘아마도… 내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겠지.’
1월 둘째 주 세 번째 날.
이날은, 클레어 라 유스이아 공후의 기일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전하.”
마차의 호위를 맡은 것은 듄켈.
마부석에서 들려온 그의 목소리와 함께, 나와 세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주위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하아….”
“하나도 변한 게 없군요.”
오랜만에 방문한 듯, 하인켈과 프리실라가 그렇게 말했다.
라인란트 저택을 벗어나, 라인란트 시 외곽으로 빠진 뒤 수십 분.
작은 오솔길을 따라 달려간 마차가 우릴 내린 곳은, 외딴 숲속에 지어진 작은 집 마당이었다.
“어, 여기는…?”
델라인 또한 낯이 익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델라인은 아마, 기억이 있을 거예요. 그렇죠?”
프리실라가 그렇게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델라인이 입을 열었다.
“어릴 적에 이곳에서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긴 분명…!”
거기까지 말한 델라인의 시선이 날 향하고.
“클레어, 공후님의 거처….”
내 얼굴을 본 그는, 곧바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내막이었나.’
외딴곳에 떨어진 작은 공간.
그리고 이 공간이 내게 보내는, 이 아련한 감각까지.
생각을 마친 난, 무겁게 가라앉은 하인켈의 등을 보며 말했다.
“이곳이, 제 어머니가 살던 곳이군요.”
“…….”
내 말을 들은 하인켈이 주먹을 쥐었다.
같이 온 프리실라도, 델라인도.
곁에서 날 보필해 온 델라인 역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생각을 마친 난,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뽀득, 뽀득.
얕게 쌓인 눈에 내 발자국이 이어지고, 집 앞에 다다른 난 천천히 나무문을 잡아당겼다.
끼이이….
최근까지도 관리가 된 듯, 부드럽게 열리는 문.
텅 빈 집안 한가운데에는, 자그마한 묘비가 놓여져 있었다.
“…그분의 묘지가 되었고요.”
공작가 영묘에 클레어 공후의 자리는 없다.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유추해낸 사실이었다.
“미안하구나, 클라인.”
침통한 얼굴을 한 하인켈이 내게 말했다.
마치 동화 속 오두막집처럼 평화로운 공간.
그곳을 본 하인켈은 거의 울 듯한 표정이었다.
“널 이곳에 데려오는 것이… 너무나도 늦어버렸어.”
잠시 그곳을 둘러본 난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날 원망해도 좋다. 이건…!”
“이럴 수밖에 없었겠죠.”
교화소에서 풀려난 뒤로 지금까지, 하인켈이 날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은 이유.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민족 출신의 공후. 정신이상자. 아키몬드의 환생을 잉태한 마녀.”
내 입에서 클레어 공후에 대한 온갖 추문이 흘러나오자, 하인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아버진 절 라인란트의 공자라 천명하셨어요.”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자 하인켈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클라인, 당신은 방계 귀족들의 표적이 되었죠.”
집 안으로 들어오며 부연설명을 덧붙인 것은 프리실라였다.
“그런 상황에서, 전하나 당신이 섣불리 이곳을 방문한다면….”
“그것을 빌미 삼아 방계에서 어떤 술수를 걸어올지 몰랐을 테죠.”
내가 태어났을 당시는 헬리안이 건재하고, 방계의 세력이 준동하던 시기.
그런 상황에서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 다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우리는, 그만큼 위태로웠으니까요.”
그들의 손에서 이 장소를 지키는 동시에, 그들에게서 날 지키는 방법.
그 당시에는, 이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지켜냈습니다.”
한껏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난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이 공간도, 그리고 저도요.”
“클라인….”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깨끗하게 관리되어있는 공간.
하인켈이, 그리고 이곳에 모인 이들이 내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행동이, 지금의 승리를 가져온 겁니다.”
하인켈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자, 꽉 쥐어진 하인켈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러니, 이젠 제 차례입니다.”
어머니, 클레어 공후의 비석에 손을 댄 채 말했다.
“클레어 라 유스티아 공후의 자식으로서, 당당히 설 겁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라인란트를.”
내 숙적이자, 내 희망.
베르켈의 유지를 이은 이들을.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북부의 지배자로 만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