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상환받을 겁니다
“헬리안의 시신을… 제국에서 회수하겠다 하셨습니까?”
미심쩍은 표정을 애써 숨긴 채 하인켈이 묻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헬리안의 차남인 지르헨 공자가 제국에 있으니, 그에게 인도하는 것이 도리에 맞다 생각하네만.”
‘웃기는 소리.’
그 말을 들은 난 속으로 코웃음쳤다.
‘성혈에 잔뜩 절어있던 몸이니, 가져가서 연구용으로 쓰겠다는 거겠지.’
성혈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상, 제국의 의도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황제가 근거로 내세운 것은 헬리안의 남은 자식들.
하인켈로서는 더 반박할 수도 없었다.
자식이 어미의 시신을 수습하겠다는데, 이를 막을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
“쯧.”
성 전체에 깔린 제국군의 면면을 보며 혀를 찼다.
‘성혈 얘기를 꺼내 봐야, 제국의 경계만 더 높이는 꼴이고….’
이미 라인란트도, 라이아의 병사들도 전투 피로가 누적된 상황.
압도적 우위를 지닌 제국군을 당해낼 수도 없었고, 싸워서도 안 된다.
‘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군.’
원정군에 버금가는 제국군의 규모.
제국의 위세가 얼마나 높은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 주는 장면이었다.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하인켈이 그렇게 말하자, 황제 역시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이미 펜스타 백작의 실책으로 제국군이 개입하게 된바.”
죽은 펜스타에게 모든 일을 덮어씌운 셈이다.
“이 이상 내전에 개입한다면, 제국의 공작을 무시하는 처사겠지.”
“…당치도 않습니다. 폐하.”
“그런 말 말게.”
하인켈의 말을 웃어넘긴 황제는 이윽고 자신의 기사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싸우던 제국군들을 향해 명령했다.
“모든 제국군은 폴와이번 영지에서 철수! 요새로 귀환한다!”
황명이 내려지자 기사들이 성 곳곳으로 퍼져 제국군 병사들을 인솔하기 시작했다.
‘제 뜻대로 했으니, 이 정도는 양보하겠다는 건가?’
영지 일은 뜻대로 하게 해 줄 테니, 성혈에 관해서는 더 묻지 말라.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행동에 그것을 지켜보던 난 입가를 비틀었다.
‘예나 지금이나 치졸한 건 매한가지로군. 멜디르.’
그렇게 생각하는 내 손에 들린 것은, 성혈을 담아두었던 유리병.
‘그렇지만,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그곳에는 성혈 대신, 미리 회수해 둔 헬리안의 몸 조각이 들어있었다.
“폐하, 이쪽으로.”
“음.”
기사의 안내를 받아 마차에 오르던 황제가 돌연,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
“뭔가, 걸리는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황제의 기사 중 한 명이 그렇게 물었지만, 잠시 내 쪽을 바라보던 황제는 고개를 저으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기분 탓이겠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황제가 탄 마차는 제국군과 함께 요새 밖으로 사라졌다.
이것으로 폴와이번 공작가의 내전은, 라인란트의 지원을 받은 공녀파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
“이쪽으로!”
“좋아! 천천히!”
싸움이 끝난 폴와이번 성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폭정과 사치를 일삼던 헬리안과 적통으로 명망이 높던 라이아.
거기에 헬리안이 내전에 시민들을 징병하려 한 것이 겹쳐, 공후파 귀족들은 완전히 발언권을 잃었다.
향후 가문의 대소사에 관여하기는커녕, 당장 목이 달아나지는 않을까 걱정해야 할 판이었으니까.
툭, 투툭.
그렇게 라이아가 폴와이번 성으로 금의환향한 지 사흘.
난 응접실 천장에서 떨어진 돌조각을 이마에서 치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도 너무하긴 했지?”
손님용 응접실마저 벽과 천장 곳곳에 금이 간 상황.
헬리안과 하인켈의 전투가 얼마나 격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물론, 나 역시 싸움의 반동으로 근 이틀 동안은 앓아누워야 했고.
“클라인!”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일어나고도 한참을 골골대던 내게 찾아온 것은 라이아와 집사장 고든이었다.
“다른 기사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털고 가셨는데, 공자님께서는 회복이 늦으시군요.”
“그 인간들이랑 절 비교하는 건 너무 가혹한 거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며 난 고든이 건네는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클라렌트 지방의 찻잎을 우려낸 것입니다. 원기회복에 탁월한 효과가 있으며 또….”
…라는 둥, 고든의 부연설명이 쏟아졌지만 도저히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영지 일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모양이네요?”
고든의 설명을 끊고자 화제를 돌리자, 라이아는 보라는 듯 깊게 한숨을 쉬었다.
“성 지하에서 헬리안의 비자금을 발견했어요.”
“아.”
“복구 비용으로 사용하고도 한참이 남을 거 같더군요.”
내전을 일으킨 장본인.
거기에 그 내전에 일반 시민들을 징집하려 한 전과까지.
이런 죄목이 쌓인 이상, 헬리안과 그의 혈족들은 폴와이번에 발을 들일 수 없다.
그녀가 폴와이번 성에 쌓아둔 각종 귀중품들과 재산, 거기에 토지증서.
그 모든 것이 고스란히 라이아의 손에 넘어온 것이었다.
‘고든의 표정이 왜 저렇게 밝은가 했더니, 그런 내막이었나.’
전쟁의 진짜 해악은 전쟁 당시가 아닌, 전쟁 이후에 찾아오는 법.
내전으로 무너진 성과 건물들을 수리하고, 약화 된 군대를 정상화하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할 터였다.
‘그런 와중에 거금이 들어왔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지.’
활기가 넘치는 폴와이번 성의 전경으로 보며 찻잔에 입을 가져가던 순간이었다.
“고마워요.”
어렵게 내뱉은 한 마디.
고개를 돌리자, 이전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의 라이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는, 헬리안에 맞서 함께 싸워주고, 몸을 아끼지 않고 우릴 도와줬어요.”
“아, 뭐….”
내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던 때, 한쪽 가슴에 손을 얹은 라이아가 날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대가 없었다면, 지금의 승리는 없었을 겁니다. 클라인 라인란트.”
헬리안과 그 일파가 사라진 이상, 라이아는 명실상부한 폴와이번의 지배자.
그런 이가 날 향해 고개를 숙였지만, 그걸 보는 고든은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폴와이번의 맹주로서, 그대의 헌신에 무한한 감사를 표합니다.”
잠시 동안의 정적.
대답 없이 그녀를 계속 바라보던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순한 선의로 행한 일은 아닙니다.”
나와 라이아의 관계는 동업자.
헬리안이라는 공동의 적을 쓰러트리기 위해 맺은 동맹이었다.
“당신들이 헬리안의 목으로 얻은 것만큼, 우리도 얻은 것이 있으니까요.”
관점을 달리한다면, 이 내전의 진짜 승자는 라인란트였다.
이 내전의 주전장은 폴와이번 성.
라인란트는 기사단만을 파견하여, 헬리안의 수급을 취했으니까.
‘즉, 부수적 피해는 전부 라이아 측에 떠넘긴 뒤 실리만 취한 행동이라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거리를 두려 했지만 라이아는 날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 해도, 그 상황에 우리의 손을 들어준 건 당신뿐이었어요.”
“…….”
내가 처음 라이아와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휘황찬란한 헬리안의 무도회와, 그에 대조되는 라이아의 모습.
힘의 차이가 확연한 이상, 귀족들의 지지 구도 또한 지금과는 달랐을 터.
“그러니까….”
“그건 됐고.”
그런 사실을 끄집어내려는 라이아의 말을 끊었다.
곧 공작위에 올라야 할 인간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춰서 좋을 것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계속 이러면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지지.’
그렇게 생각한 난 당황한 듯 내 말을 기다리는 라이아에게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사전에 약속한 헬리안 소유의 라인란트 지역 모든 영지과 사업 운영권.”
“아?”
“직접 파견된 하인켈 공작에 대한 의전비용과 긴급지원된 보급품 비용 일체.”
“자, 잠깐만, 그게 갑자기 무슨….”
“그리고 발견된 헬리안의 비자금 4할.”
“무, 뭐라구요?!”
마지막 말을 내뱉자 기어코 발끈한 라이아를 향해, 난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말 한마디로 퉁 칠 생각 말고, 돈 내놔요. 돈.”
***
“아니, 뭐 저딴 새끼가 다 있어-?!”
…라는 라이아의 외침을 뒤로 한 채, 난 라인란트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받아야 할 돈을 계산하는데 걸린 시간만 반나절.
이미 해는 넘어간 지 오래였고, 밤하늘에는 별들이 만개했다.
- 웬일로 좋은 일 한다 싶더니, 아주 수전노가 따로 없군.
“이 전투에 들인 공이 얼만데, 이 정도는 받아와야지.”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레이븐의 목소리에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라인란트와 우호 관계를 성립하는데 이 정도면 값싼 거야.”
토지, 사업장 그리고 비자금.
이들 태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따져보면,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닐 터였다.
그런 계산이 섰으니 라이아와 고든도 증서에 승인을 한 것일 테고.
파직-!
토지 증여에 관련된 서류를 검토하던 와중, 형성해 둔 계약문 하나에 균열이 이는 것이 보였다.
“그래,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지.”
그렇게 중얼거린 내 눈앞에 수많은 술식들이 나타났다.
이 전투를 위해 나와 계약한 기사들과 병사들의 혼.
헬리안을 죽이고, 영지를 정상화했으니, 이들과의 계약 또한 만료된 것이었다.
- 죽어서도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힘쓴 모든 혼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목소리에 마기를 담아 그렇게 말하고, 계약문이 하나하나 사라져가며 빛나는 구체들이 떠올랐다.
- 당신들의 후예가 수호하는 이 땅에서, 그대들의 안식을 기원합니다.
간단한 축문과 함께 그들의 혼을 환원했다.
하늘 위로 올라가는 빛나는 구체.
위로 솟구치는 은하수와 같은 이 장관은, 아마 네크로맨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특권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그렇게 말하며 한 곳을 둘러보자, 그곳에는 희미한 영혼이 계약문에 묶여있었다.
“헥토르.”
어미의 죄를 받아, 그 대가로 내게 이용당한 헬리안의 아들.
소멸 직전에 다다른 그 혼을 보던 난, 한숨과 함께 그를 묶어둔 계약을 해제했다.
“네 어미의 죽음으로 네 업 또한 빛이 바랬으니, 그만 놓아주마.”
파츳-!
그를 묶었던 종속계약의 낙인이 사라지고, 죄 많은 그의 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빛무리에 삼켜졌다.
- 저렇게 보내도 되는 건가?
창밖으로 떠나가는 헥토르의 혼을 보던 찰나, 레이븐이 내게 물었다.
“저 녀석이 아니었으면 죽을 뻔한 적도 있어서 말이야.”
의지를 지우는 종속계약이라 할지라도, 계약은 계약.
본분을 다한 혼을 방치하는 것은 안내자의 도리가 아니었다.
“계약문에 사로잡혀, 제 어미의 죽음까지 목도하지 않았나.”
겁에 질려 벌벌 떨던 생전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 정도면, 이승에서 내가 줄 수 있는 벌은 다 준 셈이지.”
제 갈 길을 찾기도 전에 어미의 죄를 받은 철부지.
이 이상 데리고 다녀봤자 아무런 득도 없으니, 이제 보내주는 것이다.
그렇게 설명을 마친 난, 사라져가는 그의 혼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다음 생에는 죄짓지 말라고. 철부지 자식아.”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밤하늘을 보며 그렇게 말하자 어깨를 으쓱인 레이븐이 말했다.
- 그래서, 이제 다음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 말을 들은 난 이를 드러낸 채 라인란트 영지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야 정해져 있지.”
헬리안의 권세 뒤에 숨어, 본가를 향해 이빨을 드러낸 방계 귀족들.
“주인 잃은 개들을, 모조리 잡아 족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