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 라인란트(2)
“헬리안을… 암살하자구요?!”
병력 배치를 점검하고, 지친 병사들을 격려하던 때.
내 말을 들은 라이아가 얼굴을 찌푸리며 재차 확인했다.
“제국군이 헬리안의 본성으로 이동한다는 소식. 들었죠?”
“……!”
“제국군에게 본성 방어를 맡기고, 자신은 이곳을 칠 생각일 겁니다.”
이미 라이아는 제국의 손에 잡힌 바 있다.
헬리안과 제국이 공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을 터.
라이아 역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 말에 답했다.
“내성의 방어군이 전부 한 곳으로 집결한다는 보고가 있었죠.”
“그뿐만이 아닐 텐데요.”
표면상의 전세는 헬리안 쪽에 유리하지만, 안쪽으로 파고들면 얘기가 달랐다.
“원래 제국은 당신을 헬리안에게 넘겨서 저항세력을 와해시킬 생각이었죠.”
폴와이번은 제국의 서부 해안과 남서부 사막지대와 이어지는 전방.
본래 이런 사사로운 내전으로 혼란스럽게 둬도 될 땅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신이 풀려남으로써, 공작령 곳곳의 영주들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헬리안이었지만, 그녀는 엄연히 외부인.
후계자인 헥토르가 죽은 이상, 그녀가 폴와이번을 쥐락펴락할 명분은 그리 크지 않았다.
제국을 끌어들인 것도, 국경지대의 영주들을 연금한 것도. 전부 그 불안감의 발로.
힘과 공포로 명분을 대체하는 얕은 수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헬리안도 다급해질 수밖에 없죠.”
“최대한 빨리… 내전을 마무리해야겠군요.”
“제국의 눈치를 봐서라도 말이죠.”
서부 해양을 주름잡는 해적들과, 남부 사막의 유목민들.
폴와이번의 역할은 그들의 준동을 막아내는 것이다.
지금이야 사태를 지켜보며 예의주시할 뿐.
내전이 장기화 되는 순간, 기회를 노린 그들이 영지로 밀고 들어올 터.
제국 입장에서도, 이런 상황은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아가씨.”
내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 라이아의 옆에 나타난 고든이 라이아에게 귓속말했다.
“그래요. 헬리안이…. 영지민들을….”
뿌득!
꾹 쥐어진 라이아의 주먹이 뒤틀렸다.
엉망이 된 내전을 빨리 끝내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할 터.
그를 위해, 헬리안은 마지막 선을 넘었다.
공작가 내부의 싸움에, 영지민들을 징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녀님. 지금 시점에서 선제공격은 무리입니다.”
“맞습니다. 성에서 방어를 굳혀야….”
라이아의 주변에 있던 참모들과 귀족들이 입을 모았다.
‘그쪽이 합리적이긴 하지.’
그들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영지민을 징집해 병력을 꾸린다면, 병력 수에서 우위를 가져갈 수 있을 테니.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성벽에서 농성하며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게 현명하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전쟁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소리다.
선혈과 오물로 이루어진 늪.
그 진창에 발을 담그지 않고,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했던 귀족의 한계다.
“그렇게 헬리안과 싸워서 이긴다면.”
귀족들의 말을 끊고, 라이아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 해서 이기면, 이 땅이 예전 같아지리라 생각합니까?”
“……?”
내가 거기까지 말하자, 귀족들이 단박에 표정을 구겼다.
“주제넘은 참견은 삼가시오. 공자!”
“공녀님의 협력자라고는 하나, 이것은 엄연히 폴와이번의…!”
“라이아 공녀의 손으로 영지민을 죽이게 만들 생각입니까”?
내 말에 라이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당신들의 시민에게, 같은 폴와이번의 시민을 죽이라 명령할 겁니까?”
“……!”
“그, 그건…!”
내 한 마디에, 좌중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같은 땅을 딛고 살던 이들이, 원치 않는 전쟁에 끌려가 서로 죽고 죽이면.”
열다섯 어린 애송이의 웅변.
그렇지만 이 말을 내뱉는 난, 온갖 전장과 지옥을 거쳐 온 네크로맨서였다.
“그렇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
“…….”
내 말에 뭐라 반박하지 못하는 귀족들을 보며 내심 안심했다.
이걸 듣고도 느끼는 게 없는 귀족이라면, 헬리안과 다를 바 없는 쓰레기였으니까.
“서로 원망하겠죠. 이놈이 잘났다. 너희들이 나쁘다.”
‘너희.’
같은 영지라는 공통분모가 사라지고,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 구분을 불씨 삼아 타오른 증오는 새로운 다툼을 낳는다.
그 다툼으로 말미암은 원한이, 또 다른 다툼의 불씨를 남긴다.
원한이 원한을 낳는, 악의로 가득 찬 순환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분열의 시작입니다.”
덩치를 키워간 원한은 이윽고 가족을, 마을을, 도시를, 국가를.
더 나아가서는 한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왕권의 근원은 왕이 아닌 백성일지니.”
이제는 사라진 옛 왕의 격언을 입에 담으며 말했다.
“우리가 징집된 영지민을 죽이는 순간, 그들은 폴와이번 자체를 져버릴 겁니다.”
단순한 이론이나 사상, 철학이 아니었다.
이것은 경험.
수많은 왕조와 왕국을 무너트리는 과정에서, 그들의 발버둥과 몰락을 지켜본 악당의 경험이었다.
“…이것이, 제국이 진짜 노림수였군요.”
내 말을 들은 라이아가 주먹을 떨며 말했다.
‘놀라운데? 거기까지 유추하다니.’
전생의 기억을 지닌 나와는 달리, 라이아는 아직 어린 공녀.
그녀가 짊어진 짐은, 이 나이대의 어린아이들에게는 버겁기 짝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제의 의도겠죠.”
그런 그녀의 성장에 감탄하면서도, 난 보충설명을 이어갔다.
“내부로부터 분열하기 시작한다면, 제국이 그 틈을 파고들기도 쉬울 테니까요.”
서로 간의 내전으로 민심을 잃은 폴와이번을, 제국군이 관리한다.
다른 공작가나 귀족들의 반발을 최소화한 채, 폴와이번을 집어삼킬 수 있는 최고의 명분.
옥좌에 앉아 있는 황제는, 이미 이 지점까지 내다보고 있던 것이다.
“그,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겁니까?”
날 향해 귀족 중 한 명의 질문이 들어왔다.
“이미 내성에는 제국군과 헬리안의 병사가 득시글합니다!”
다른 참모들 또한 말을 보탰다.
“소수정예로 침입한다 해도, 기사들이 모자랍니다.”
“공녀님의 푸른 성창 기사단 외에는, 헬리안의 기사들에게 상대가….”
폴와이번을 장악한 이후, 헬리안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이 기사단이었다.
금전, 명예, 정 안되면 협박까지.
그런 상황에 답답함을 토로하던 순간, 난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
내 말에 귀족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순간.
뿌우우우우-!
성벽 밖에서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기사단, 기사단의 나팔소리입니다!”
그 말과 함께 논의에 한창이던 귀족들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저, 저건…!”
멀리서 요새를 향해 다가오는 200명 정도 되는 기사들.
나팔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그들의 선두에는, 라인란트의 인장이 박힌 군기(軍旗)가 휘날리고 있었다.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힌다니까.’
멀리서 보이는 하인켈과 델라인의 모습을 확인하며 그리 생각했다.
“폴와이번의 합당한 지배자, 라이아 렌 폴와이번 공녀님께 보고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라인란트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난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하인켈 라인란트 공작 전하 휘하 검은방패, 붉은수레, 가시망치 합동 기사단 213인.”
눈을 크게 뜬 라이아가 날 돌아보았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냐는 듯, 경악에 찬 눈빛.
덤덤히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공동의 적을 위해 진영에 합류하고자 합니다. 윤허해주소서.”
***
“갑작스러운 요청에 응해주어 감사하오. 라이아 공녀.”
“라인란트와 같은 전선에 설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라인란트의 수장이자 제국 3대 공작 중 하나.
하인켈 라인란트의 등장에 온 요새가 시선을 집중했다.
“하인켈 라인란트 전하…!”
“대륙 최강의 병사가 우리 편이라니!”
“이길 수 있어! 라인란트가 함께라면…!”
열띤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주로 병사들과 기사들이었다.
제국군의 선봉에 서서, 불가능하다 여겨진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설적인 기사 가문.
그 수장이 합류한 것에 더불어, 그 기사단까지 자신들을 도우러 온 것이다.
“약소하게나마, 요새 사람들을 위한 물자를 준비했소.”
거기에 군량과 화살 같은 소모품들까지 한가득 들고 왔으니, 보급관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헬리안 공후를 단죄한다면, 본가에서 꼭….”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소.”
공작가의 수장과 공녀의 대화.
그렇지만 하인켈은 라이아를 대함에 있어 격식과 예절을 잊지 않았다.
3대 공작 중 한 명인 그가 몸소 행동함으로써, 라이아를 차기 공작으로 지지한다는 의사표시였다.
‘천하의 아버지가 스스로 이런 쇼를 하실 리는 없고….’
아마 미사여구는 집어치우고, 주어진 일만 하려고 했겠지.
이런 정치적인 행동을 하라고 전한 것은 아마 프리실라 공후일 것이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이렇게 협력해왔으니까.
‘진짜 나랑 있을 때랑은 완전 딴판이네.’
라이아의 뒤편에 선 내가 특유의 가식으로 가득 찬 미소를 보며 피식거리고 있을 때.
“클라인.”
내 쪽을 돌아본 하인켈이 입을 열었다.
“보고는 들었다. 우리가 도착하기까지, 홀로 힘내줬구나.”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이토록 많다면, 저택에서처럼 격 없이 대할 수는 없는 법.
고개를 숙인 채 그렇게 말하자, 하인켈은 잠시 만감이 교차하듯 표정을 흐렸다.
“…뭐 잘못된 것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아니다. 단지….”
그렇게 말한 하인켈의 시선은 내 허리춤에 걸린 검, 노르드빈트를 향해있었다.
‘역시, 알아본 건가?’
저택에서 그랬던 것처럼, 잠시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던 하인켈.
역시 영묘에 꽂아놓고 얼 걸 그랬나 생각하던 와중, 하인켈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클레어의 말이, 이렇게 현실이 되었구나.”
“예?”
클레어?
죽은 내 어머니가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그 말에 의아해하던 찰나, 고개를 저은 하인켈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덕분에 폴와이번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싸움이 가까우니 채비하거라.”
“아, 예….”
어딘가 허한 듯, 공허하게 말한 하인켈은 등을 돌려 요새 내부로 걸어갔다.
“클라인!”
그렇게 하인켈의 등을 보던 찰나, 뒤따라온 델라인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것은….
“듄켈.”
오랜만에 무장을 갖춘 듄켈이 날 보며 쓰게 웃고 있었다.
“도련님!”
“그 사이 별짓을 다 하고 다녔다며?”
반갑게 날 맞이하는 두 사람을 보며 마주 웃어주었다.
“바람 잘 날 없는 하루하루지.”
“루델 요새 쪽도 일촉즉발이야.”
“방계 쪽에서?”
내가 그렇게 묻자 델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헬리안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곳곳에서 난리가 났어. 헬리안을 위한 구출대를 파견하라면서….”
“그리고 아버지는 이렇게 화답하셨군.”
이미 헬리안은 가문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진 상태.
헬리안을 타도한다면, 가문의 이권을 침탈하던 방계 세력은 구심점을 잃을 터.
“말씀하신 대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내 상념을 깨우고, 듄켈이 내게 손을 뻗었다.
천에 싸인 기다란 꾸러미.
“그래. 이제 때가 되었지.”
그렇게 말하며 난 그것을 풀어, 안에 있는 내용물을 꺼냈다.
“이게 뭐야?”
“비수.”
그것을 본 델라인의 말에 답하며, 손잡이를 뽑아보았다.
스으으으으으…!
하얀 연기와 함께 퍼져나오는 냉기.
검집 안에서 뽑혀 나온 검신의 재질은, 쇠가 아닌 얼음이었다.
질은, 쇠가 아닌 얼음이었다.
“이게 뭐야? 투명한 검신이라니….”
“설화수정.”
얼음성 지하에서 가져온 물질을, 검의 형태로 벼려낸 것.
“헬리안을 죽일…. 내 비장의 무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