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 라인란트(1)
쿠르르르…!
거친 쇠사슬 소리와 함께 닫힌 성문이 열리고, 성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야, 저거…!”
“그냥 검은 갑옷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물론, 눈에 들어온 것은 성의 풍경뿐만이 아니었다.
맨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경계.
데스타니트를 향한 공포의 눈빛이었다.
- 하하하! 이것들이 제 조상님도 몰라보는구만?!
- 어쩔 수 없지. 알고서 계약에 응한 것 아닌가.
오래전, 폴와이번을 수호했던 용살자들.
그렇지만 이제 이들을 알아보는 이들은 없었다.
혼의 본질과 자아를 남겨줬다 한들, 이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데스나이트.
헬리안이 그랬듯, 폴와이번을 혼란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꺼림칙한 힘의 부산물이었으니까.
덜컹-!
다섯 대의 마차가 성 안에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성문이 닫혔다.
촤르륵-!
이어지는 것은 호위가 아닌 포위.
사정을 알지 못하는 기사들과 병사들은 곧바로 날 향해 검을 빼 들었다.
“다들 멈추세요!”
그렇지만 이내 들려온 라이아의 목소리가 그들을 제지했다.
“공녀님!”
“아무리 우군이라 한들, 성에 언데드를 들일 수는 없습니다!”
몇몇 기사들이 그렇게 반박하자 라이아가 답답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단순히 네크로맨서라는 이유는 아니겠지.’
멀찍이서 날 바라보는 공녀파 귀족들의 안색을 살폈다.
경계, 당혹.
그리고 그 이상의 공포.
내 출생과 내게 얽힌 소문을 떠올린 탓이겠지.
“경계하는 건 이해합니다만.”
그렇게 말하면서 마차에서 내리자, 화들짝 놀란 병사들이 주춤했다.
‘경계하던가 무서워하던가. 하나만 좀 하지.’
그런 그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난 엄지손가락으로 등 뒤의 마차를 가리켰다.
“우선 이 사람들을 좀 보호해주지 않겠습니까?”
“…사람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잔뜩 힘이 들어간 기사들이, 순간 맥이 풀린 듯 되물었다.
“헬리안이 납치한 폴와이번의 영지민입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내가 아닌 개리슨.
언데드가 모는 마차에서 신성교단의 신부가 내리자, 기사들의 표정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갔다.
“아니, 저….”
“왜 신부님께서 네크로맨서, 아니, 클라인 공자와 함께….”
얼이 빠진 채 그렇게 말하는 기사들을 뒤로 한 채, 개리슨이 손짓했다.
“저, 그게….”
영지민이라는 말이 나온 이상, 확인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바.
확인을 위해 쭈뼛쭈뼛 마차로 다가간 기사들이 두꺼운 철문을 열었다.
철컹-!
그리고 그곳에 있는 것은….
“으, 으아악?!”
“여기가 어딥니까! 우린 왜 여기에…!”
잔뜩 겁먹은 채 마차 구석에 움츠린 영지민들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왜 본성의 영지민들이….”
“일단 이 사람들부터 추슬러요. 설명은 이따가 해 줄 테니까.”
그들을 구하긴 했지만, 난 라인란트에서 온 외부인.
다른 가문의 도움으로 구해졌다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
‘뭐, 언데드를 보고 겁먹은 것도 있지만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던 때, 내 말뜻을 깨달은 라이아가 곧바로 사람들에게로 다가갔다.
“다들 괜찮아요?”
“고, 공녀님…?”
“다들 봐! 라이아 공녀님이야!”
라이아의 얼굴을 알아본 몇몇이 그렇게 외치자, 겁에 질린 사람들의 눈에 안도의 빛이 감돌았다.
‘언데드를 부리는 내가 달래는 것보단, 이게 훨 낫지.’
라이이가 자신을 구했다는 사실에 경계를 푼 영지민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급양관! 식사를 준비하게!”
“부상자는 이쪽으로 오세요! 병동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라이아가 나선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곧바로 모포와 들 것이 준비되고, 성 안에 있던 아낙들이 나와 사람들을 추슬렀다.
‘이걸로, 헬리안을 칠 수 있는 명분도 더욱 강화되겠지.’
악덕 영주에게서 구해낸 시민들을 정성껏 보살피는 영주.
그것을 보며 난 이후의 정황을 생각했다.
무단으로 권력을 탈취하고, 영지민을 핍박하는 헬리안.
그리고 이들은 헬리안의 폭정을 증언해 중 증인들이다.
‘이들을 이용해 소문을 퍼트리면 다른 영지에서도 동요가 일어날 터. 그렇다면 그다음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저, 저기!”
허리쯤에서 들려온 힘없는 목소리.
혹시나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차 안에 갇혀있던 어린애 한 명이 내게로 다가와 있었다.
“…무슨 일이지?”
미심쩍은 눈으로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라이아와 병사들이 자신들을 챙기고 있으니, 내게 올 필요는 없는데….
“이, 이거요!”
잔뜩 겁에 질려있는 아이가 조그만 두 손을 뻗어 내게 내밀었다.
고사리 같은 두 손에 들어있는 건….
“…꽃?”
인형이었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는지, 꽃잎 끝이 쭈글쭈글해진 하얀 꽃.
어안이벙벙한 채 그것을 보고 있자, 아이는 날 향해 다시 말했다.
“나 알아요! 기사님이 구해줬죠?”
“기사라니, 난….”
그 말에 난 순간,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민 손을 그대로 둘 수도 없었으니, 난 손을 뻗어 아이가 건넨 꽃을 받아들었다.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기사님!”
그렇게 외치며 고개를 꾸벅 숙인 아이는, 이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사람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하하, 이것 참.”
헤진 가죽 장갑 위에 놓인 너덜거리는 꽃.
“기사… 라고.”
그것을 보며 쓰게 웃은 난 그렇게 중얼거렸다.
가슴 한 켠이 벅차오르는 기묘한 감각.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 감정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나 같은 네크로맨서한텐 좀 과분한 칭호인데 말이지.”
이용가치, 정치적 영향력, 이들로 말미암을 라인란트의 이익.
그것만을 생각하며 한 행동이었다.
같잖은 기사도니 의협심이니, 내게는 어울리지 않다 생각했으니까.
그렇지만 그런 내 행동이, 저 아이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나 보다.
약자를 보호하고 위험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그런 영웅으로.
누구나가 동경하던 기사의 모습으로.
“영웅이 된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베르켈.”
이제는 아련하게 느껴지는 전생.
얼음성에서의 전투를 떠올렸다.
“저런 눈을 봤으니,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
짧게 웃으며 손에 놓인 볼품없는 꽃을 손수건으로 감쌌다.
귀중한 보석을 챙기듯, 소중하게 그것을 품어 가슴팍에 갈무리했다.
“게다가, 이렇게 귀한 물건까지 받았으니.”
어울리지 않게 다짐하며, 굳게 닫힌 성문을 바라보았다.
“그 잘나신 영웅 행세, 훌륭하게 해 보이마.”
빠르면 이틀, 늦어도 이번주.
곧 있을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선, 할 일이 산처럼 많았으니까.
***
빠각-!
라이아와 클라인의 머리가 순식간에 부서져 바닥을 굴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모습을 한 기괴한 액체 괴물.
클라인이 만들어 낸 언데드, 도플갱어였다.
“잘 보호하고 있으니 경거망동하지 말라?”
라이아 진영과 헬리안의 본성 사이를 가로막은 제국군의 본영.
잔뜩 분노한 채 검집을 휘두른 것은 헬리안 공후였다.
“참 철통같은 감시였군요.”
헬리안은 얼굴을 잔뜩 구긴 채 그렇게 쏘아붙였다.
제국군 사령관을 향한 불손한 언행.
선을 넘는 행위였지만, 펜스타 백작은 도무지 할 말이 없었다.
“그 가증스러운 라이아가 본성에서 그 난리를 치는데, 정작 제국군은 이따위 가짜에게 놀아나고 있었다니!”
콰작-!
떨어진 라이아의 머리를 밟아 으깬 헬리안이 펜스타 백작을 노려보았다.
“그, 그렇지만 어쩔 수 없지 않소! 우리 측 네크로맨서들도 처음 보는 언데드라고…!”
애써 핑계를 대는 사이, 제국에서 파견된 네크로맨서들은 도플갱어의 파편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인간의 신체 구조를 마력으로 만들어내다니?!”
“언어 활동에 식사까지 가능한 언데드라니, 이건…!”
그들에게 있어선 시체를 사용하지 않고 언데드를 만들어낸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할 터.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경지를 괄목한 네크로맨서들은 자신들의 본분도 잊은 채 도플갱어의 파편에 몰두했다.
“액토플라즘에 마기를 주입할 생각을 하다니, 이런 방법이 가능했단 말이야?”
“엄청난 기술이다. 이것만으로도 사령술 개론서를 다시 써야 할 정도야…!”
온갖 전문용어를 늘어놓는 그들이었지만, 이것은 그들의 이해를 벗어난 작품이었다.
알아낸 것은 단 두 가지.
이것의 재료가 마력을 담은 액토플라즘이라는 것.
그리고 마기를 통해 만들어낸 언데드라는 것뿐.
“그렇지만, 이걸로 확실해졌어.”
하지만 그 정보를 들은 헬리안은 이제 알았다는 듯, 들고 있는 검집으로 바닥을 찍었다.
쿵-!
검집으로 바닥을 찍자, 성 전체가 한 번 크게 울렸다.
마치 공성 병기에 공격받은 듯, 거대한 충격이었다.
“으억?!”
깜짝 놀란 몇몇 기사들이 침음성을 냈지만, 헬리안은 그것이 들리지도 않는 듯 이를 갈아붙였다.
“네놈이었어… 헥토르를 죽인 게 네놈이었어…!”
의심은 확신이 되고, 증오의 대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내 아들을 죽여놓고, 슬픔에 날뛰는 자신을 윽박지르며 기고만장했었지.
저주받을 라인란트의 떨거지가!
감히 나를!
“부관-!”
윽박에 가까운 헬리안의 외침에 곧바로 대기 중인 부관이 나타났다.
“부, 부르셨습니까. 공후 마마….”
자신보다도 높은 귀족들을 도축장 돼지처럼 찢어 죽인 여자.
겁에 잔뜩 질린 부관을 향해 헬리안의 명령이 내려왔다.
“지금 당장 병사들을 모으세요.”
“무, 뭐라?!”
그 말에 발끈한 것은 펜스타 백작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헬리안 공후! 공녀파가 완전히 규합된 상황에, 섣불리 병사들을 움직이면, 후방이 공격당할 가능성이!”
“제국군이-!”
펜스타 백작의 말을 끊고, 헬리안의 고함이 성을 울렸다.
쿠르르르르…!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사정없이 흔들리는 별실.
그 가공할 힘에, 펜스타 백작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신의 제국군이 본성을 방어하면 되잖아.?”
“……!”
이제는 격식조차 집어치운 완전한 반말.
모욕감을 느꼈는지, 펜스타 백작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안 하면, 당신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돌아가는 거야.”
그가 반박할 틈을 주지 않은 채, 헬리안이 펜스타 백작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약속했던 영지, 황제가 내릴 포상. 그리고 나와 주고받던 그 모든 거래들!”
“……!”
완전히 이성을 잃은 채 날뛰는 헬리안이었지만, 그녀의 말에 틀림은 없었다.
‘이미 영지의 민심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더 방치했다간 라이아 측의 의도에 넘어가는 꼴이니….’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계산했다.
제국군이 노골적으로 헬리안의 손을 들어줬을 때, 변방에서 일어날 반발.
그것을 대가로, 제국이 얻을 수 있는 이익.
그리고 마지막으로, 헬리안과 자신의 거래까지….
‘이때를 놓친다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그렇게 판단을 마친 펜스타 백작은 자신의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전 병력은…. 폴와이번 성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말하자 기사들 몇몇이 깜짝 놀라 외쳤다.
“백작님?!”
“그건 황명에 위배 되는…!”
거기까지 말한 순간.
“전장에선 내 명령이 곧 황제 폐하의 명령이다!”
총사령관의 권위를 들먹여, 반발하는 기사들의 발언을 찍어눌렀다.
“……!”
“저게…!”
그의 어깨에 달린 인장을 보며 기사들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돌발상황. 목표가 통제불능이다.’
‘확인. 한 명은 정보부에 소식을….’
‘마법사들을 준비시키겠다.’
서로 수신호를 통해 뭔가를 주고받은 네크로맨서들이 슬쩍 자리를 비웠다.
“전 병력, 이동 준비!”
불안감을 다 지우지 못한 펜스타의 구령과 함께.
“이번에야말로, 폴와이번을 내 것으로 만들리라!”
탐욕과 원한에 사무친 헬리안의 음성이, 요새를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