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67화 (67/209)

067. 거래

“무모하시군요. 클라인 공자.”

팔리만이 내게 말했다.

개리슨을 막기 위한 방벽을 거두지 않은 채였다.

“지금의 저와 당신에게 있어, 거래가 성립될 것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그 말과 함께 팔리만이 공중에 뜬 책에 손을 댔다.

쿠웅-!

“크!”

개리슨이 흐름을 끊어놓은 신성력이 단숨에 원래의 자리를 찾고, 지긋이 날 찍어누르려 했다.

“전 당장이라도 당신을 죽일 수 있지만, 당신은 절 위협할 재료가….”

“없긴 왜 없어?”

팔리만의 말을 끊은 난, 그대로 검을 뽑았다.

“지금 뭐 하는…!”

거기까지 말하던 팔리만의 목소리가 멎었다.

“어때, 이 정도면 구미가 좀 당기나?”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노르드빈트의 서슬 퍼런 칼날.

“……!”

“당신…?”

팔리만의 여유에 생긴 균열이 점점 더 깊어져 감을 느꼈다.

“지금 네게 필요한 건 성혈의 순도를 올리기 위한 기술.”

그 변화에 흡족해하며, 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저 성혈의 진짜 제조법이 들어가 있다.”

그렇게 말한 난, 검을 들어 그대로 내 목을 향해 겨눴다.

“그런 내가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면, 좀 곤란하지 않겠어?”

“하…!”

팔리만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었다.

“자기를 죽이겠다는 인간을 협박하는 재료가, 자기 목숨이라니….”

“그렇게 생각하면 한번 죽여 보든가.”

이제 저자는 날 죽일 수 없다.

아키몬드의 지식.

그것이 내 머릿속에 있다고 공언한 이상, 이제부터 난 저들의 걸림돌이나 척살 대상이 아닐 테니까.

오히려 그 반대.

자신들의 연구를 완성시킬 지식의 보고이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어야 하는 귀중품이 된 것이지.

“왜, 쫄려?”

그를 향해 그렇게 말하자, 팔리만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진짜 모습을 숨긴 악당?

배후에서 모든 일을 감시하고 쥐락펴락하는 흑막?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애송이가.’

대륙의 공적으로서 수십 수백의 영웅을 죽였다.

그리고, 그 몇 배나 되는 악당도 죽이고, 발아래에 엎드리게 했다.

그런 내게 이제 와서 저따위 어설픈 악당이 나타나봤자, 간에 기별조차 갈 리 없지.

제깟 것이 아무리 무게를 잡아 봤자, 그 또한 욕망에 사로잡힌 노예일 뿐이다.

“하하하…!”

그러니, 내가 말한 이 미끼에 걸려들 수밖에 없는 거고.

“좋습니다! 훌륭해요! 클라인 공자!”

즐거워 죽겠다는 듯, 팔리만이 양팔을 벌린 채 내게 말했다.

“살려드리죠! 우리의 이 만남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가 날 향해 말했다.

‘어떻게 저놈의 교단은 제정신인 놈이 한 명도 없냐.’

귓불 바로 밑에까지 걸린 저 입꼬리를 보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그럼 당신은 제게 뭘 주시겠습니까?”

“그러네. 뭘 주면 좋을까….”

그렇게 말한 팔리만을 보며, 난 한 손으로 턱을 만지며 짐짓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잘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뿐만 아니라….”

“중앙회로. 속박의 룬이 새겨진 33번 구축식.”

“!”

던져놓은 미끼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선,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겨야 하는 법.

갑작스럽게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팔리만이 흠칫했다.

“성혈의 조합술식. 어떻게 당신이…?”

경탄에 가까운 그의 목소리를 받아넘기며 계속 말했다.

“중추 연결 회로를 다섯 개로 늘려. 3% 정도는 올라갈 거다.”

“……!”

이것은 내가 제안하는 거래 재료이자, 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

그 자리에서 성혈의 구조와 문제점. 그리고 대안까지 튀어나왔다.

마치 문제를 알려주는 선생님처럼.

“그래…. 그러면 되는 거였어…!”

그사이 추론을 마친 것일까.

팔리만의 눈에 서린 욕망이 점점 더 크기를 키워갔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런 팔리만의 모습을 본 난, 개리슨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내 네놈의 열의를 특별히 여겨, 저 성서의 약점을 알려주마.”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투확-!

땅속에서 솟아오른 스켈레톤의 손이, 팔리만의 발목을 낚아챘다.

“뭣?!”

“역시 발밑까지 경계할 수는 없었나 보지?!

그의 몸을 지키는 성법기, 타나크.

개리슨의 강권을 틀어막는 방어막을 펼치면서도, 그 자신은 아무런 제약이 없는 기묘한 성물(聖物).

그 방어막의 약점은 다름 아닌, 땅이었다.

“만일 방어막을 바닥에까지 펼친다면,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 있을 수조차 없을 테지!”

“크윽……!”

균열이 가득한 그의 평정이 깨지고,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

“네가 그렇게 당황하는 건 처음 보는군. 팔리만 엘.”

“개리슨…!”

미리 준비하고 있던 개리슨이, 그대로 팔리만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뻐억-!

정통으로 꽂힌 개리슨의 강격.

뒤늦게 타나크의 방벽이 가동했지만, 충격을 전부 흡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쿠콰아아앙-!

십 미터는 넘게 날아간 팔리만의 몸이 땅바닥을 굴렀다.

“커허, 우윽?! 크어어…!”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복부가 꿰뚫렸을 정도의 공격.

그렇지만 팔리만은 고통스러운 듯 배를 움켜잡고 있을 뿐,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저쪽도 괴물이군.’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우우웅-!

자신의 주인을 지키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위협을 느낀 것인지.

스스로 공중에 떠오른 타나크가 팔리만을 둘러싼 보호막의 농도를 더해갔다.

“쯧, 절호의 기회였는데.”

거의 태양이라 불러도 될 정도의 광채.

저 정도 농도의 신성력이라면, 공격은 고사하고 닿자마자 녹아 없어질 판이다.

파아아앗-!

팔리만을 감싼 보호막이 하늘로 떠오르고, 눈 부신 빛이 온 사방을 밝혔다.

“공격인가?!”

“아니, 성서는 응징자가 아닌 수호자. 스스로 다른 존재를 해하지는 않는다.”

급히 경계한 나와는 달리, 얼굴을 찌푸린 채 설명하는 개리슨.

투화악-!

이윽고 눈부신 섬광이 멎었을 때, 그곳에 팔리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갔군.”

짧은 한숨과 함께 등을 돌렸다.

이걸로 정말 상황 종료.

남은 건 성혈을 회수하고, 마차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는 것뿐이다.

“아린 녀석 말대로, 진짜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

성혈과의 거래를 위해 가져온 마차는 다섯 기.

이걸 몰려면 나와 개리슨 만으로는 역부족이지.

쿠르르르…!

주둔지 군인들의 정신건강을 배려해, 스켈레톤이 아닌 데스나이트를 불렀다.

- 전투인가!

- 폴와이번의 명예를 위해! 이 혼을 다 바쳐 싸우리…!

“아아, 미안한데 그런 거 아니고.”

나와의 계약에 응한 열 명의 기사들.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 분기탱천한 그들을 보며, 난 손가락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 말 몰 줄 알지? 가서 하나씩 잡아.

계약자의 직권을 남용한, 망자의 목소리와 함께.

- ….

- …….

***

“이, 이봐! 저기!”

제국군에 의해 진입로가 막힌 라이아 공녀파의 진영.

며칠째 소식이 없는 라이아를 기다리며 점점 지쳐가던 기사들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성문을 열어라! 공녀님이, 라이아 공녀님이 돌아오셨다!”

쿠르르르르!

굳게 닫혀있던 성문이 위로 올라가고, 앞장선 라이아와 함께 사람들이 들어왔다.

“저분들은?!”

“행방불명된 영주님들에, 기사들, 행정관들까지…!”

고초를 많이 겪어 수척해진 이들.

그들의 면면을 살핀 지휘관들의 눈이 커졌다.

헬리안의 거병과 함께 연금된 본성의 귀족들.

공녀파의 허리를 담당해온 귀족들과 행정인력이 전부 한곳에 모은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공녀님!”

헬리안에 맞서 저항군을 조직한 일선 지휘관들이 라이아를 맞이했다.

“늦어서 미안해요.”

“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헌데….”

그렇게 말하며 말을 흐린 지휘관을 향해 라이아가 입을 열었다.

“헬리안 공후가 연금해 둔 분들이세요. 본성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우릴 도와주시기로 했죠.”

“?!”

그 말을 들은 지휘관들이 깜짝 놀란 듯 어깨를 떨었다.

“저, 저분들이 전부…?”

라이아가 구출한 귀족들은 기존의 공녀파 귀족들 뿐만이 아니었다.

폴와이번이 담당하는 국경은 서부 해안과 남부의 갈라무.

해적과 유목민에 대항하여 국경을 지켜온 변경백들이, 라이아가 구출한 귀족들 속에 포함된 것이었다.

‘중립을 유지하던 변경백들까지 잡아넣다니….’

따르거나, 아니면 죽거나.

회색분자를 용납하지 않는 헬리안의 방침이 이런 기회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국경지대의 영주들이 라이아를 지지한다면, 단번에 폴와이번 중앙을 포위하는 구도가 만들어지는바.

이제 전열을 가다듬고 때를 기다린다면, 역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었다.

“아가씨.”

라이아의 등 뒤에서 들려온 고든의 목소리.

“찾지 못했나요?”

“예. 남아있는 기사들이 계속 둘러보는 중입니다만….”

그 말에 라이아가 주먹을 쥐었다.

지금의 이 성과를 만들어낸 가장 큰 공로자, 클라인 라인란트.

그렇지만 그는 돌연 사라져, 모습을 감춘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위치는 헬리안의 진형 한가운데였습니다. 홀로 떠나신 걸 생각하면….”

“…….”

얼굴을 찌푸린 라이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절망적인 전황을 뒤집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쾌거.

그렇지만 그 모든 일을 마치고도, 라이아의 얼굴은 편하지 않았다.

“이런 데서 죽지 말라고.”

처음 그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러니, 거래를 하죠.’

낙엽과 헬리안의 위협을 정면으로 받아넘기던 중.

그는 당당하게 자신을 향해 거래를 제안했고, 활로를 열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여기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 것이다.

지금도 그랬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완벽한 그물망.

그렇지만 그는 늘 그렇듯 털레털레 걸어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향해 물었다.

‘밖으로 나갈 수 있으면 되는 겁니까?’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자신을 탈출시켰지.

마치 책 속에 나오는, 영웅 서사의 주인공처럼.

“아직,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고개 숙인 라이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울분에 찬 채로 거기까지 말한 순간.

“저, 저기!”

보초병의 목소리와 함께, 보고가 들려왔다.

“본성으로 접근하는 병사들이 있습니다! 헌데, 가문의 문양이….”

못 볼 걸 봤다는 듯 말을 흐리는 병사.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 라이아는 자신도 모르게 발을 움직여 성문 위로 올라왔다.

“아, 아가씨!”

고든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올라간 성벽.

그곳에 보이는 건 시커먼 갑옷으로 온몸을 두른 기사들과, 그들이 모는 마차 행렬.

그리고 그 선두에 앉아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이었다.

“하여튼, 저 바보…!”

마치 마실이라도 나갔다 오듯, 나른한 자세를 보며, 라이아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된 겁니까 공녀님?! 왜 라인란트가 이곳으로…!”

그렇게 묻는 병사를 향해, 한결 가벼운 표정의 라이아가 외쳤다.

“성문을 여세요!”

그가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담아.

“저분은 클라인 라인란트! 우리의 동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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