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동행
“몇 달 못 본 사이,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셨군요.”
“넌 그만큼 더 위험해졌고 말이지.”
공작가 내부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날 대하는 개리슨의 말투는 예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하하! 공자님도 참, 위험하다니요?”
농담이라도 들은 듯 너털웃음을 지은 개리슨의 몸이 살짝 부풀어 올랐다.
“가증스러운 네크로맨서를 눈앞에 두고도 쳐죽이지 않고 있는데, 어찌 그런 서운한 말씀을 하십니까?”
투기와 살기를 조금도 감추지 않은 채 존댓말이라.
소름이 돋는다.
역시,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세 배는 더 위험해졌다.
“그래서, 나를 경호하겠다고? 교단의 대행자께서 굳이?”
“하하하, 경호라니요. 당치도 않는 소리를.”
내 비꼼을 그렇게 받아넘긴 개리슨이 미소로 얼굴을 뒤덮었다.
“단지 같은 목표를 지녔을 뿐, 가증스러운 네크로맨서가 죽든 말들, 신경이나 쓸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아, 그러셔?”
저 모습을 보니 새삼 깨달았다.
저 미치광이 신부는 못 본 새 세 바퀴는 더 돌아버린 것 같다고.
“그래서, 목표가 같다는 말은?”
헬리안을 일컬으며 그렇게 묻자 개리슨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힘과 욕망에 미쳐 괴물이 된 여자입니다. 당연히 때려죽여야지요.”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 했던가.
하인켈이 개리슨을 저택에 들인 이유가 이제 납득이 됐다.
“아, 그렇지.”
그렇게 무언의 대치가 계속된 끝에, 나와 개리슨은 어느덧 내 방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이것. 아린 양에게 전해주십시오.”
개리슨은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꾸러미를 내밀었다.
주머니 속에는 그가 밖에 나갈 때마다 가져오던 사탕이 가득 들어있었다.
“네가 직접 건네주면 더 기뻐할 텐데?”
내심 떠보듯 그렇게 말하자, 잠시 대답이 없던 개리슨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불가능합니다.”
그림자에 가려진 그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마차에서 뵙죠. 도망치면 죽여버리겠습니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작별인사를 마지막으로, 개리슨은 등을 돌렸다.
“야, 신부!”
등 돌린 그의 등을 향해 외치자, 멈춰선 개리슨이 고개만 돌려 날 보았다.
“그땐 살려줘서 고마웠다.”
장벽으로 출발할 때의 일을 말하자, 개리슨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닥쳐라, 네크로맨서.”
친하게 말 걸지 말라는 듯 그의 말투가 돌변했다.
‘어우, 살벌하기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깊게 빡친 개리슨의 얼굴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더러운 정치놀음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 말을 끝으로, 개리슨은 사라졌다.
“후우….”
안도의 한숨인지 아쉬운 탄식인지.
나조차도 그것을 구분하지 못한 채,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도련님!”
“자, 신부가 너한테 주라고 하더라.”
날 맞이하는 아린에게 그렇게 말하며 사탕 꾸러미를 건넸다.
“와~!”
“앞으로는 자주 만나기가 힘들 것 같으니까. 많이 준비했다더라.”
그렇게 말하며 아린의 머리를 쓰다듬던 사이, 천으로 감싼 기다란 무언가를 든 듄켈이 내게 다가왔다.
“도련님.”
“완성된 건가?”
날 향해 들고 있던 물건을 건네는 듄켈.
“역시 우리 집 도공들은 일 처리가 빨라.”
천을 풀어 그것의 상태를 확인한 난,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해볼만 하겠어.”
기사 작위와 더불어 뜻밖의 수확도 있었다.
몸이 상한 건 예상외였지만, 이 정도는 견뎌낼 수 있을 터.
이걸로, 대부분의 준비는 다 갖춰진 셈이다.
“참…. 절묘한 시점이군요.”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내 행동을 유심히 보면 듄켈이 별안간 날 향해 말했다.
“절묘하다니, 뭐가?”
짐짓 모른 체하며 그렇게 묻자, 표정을 굳힌 듄켈이 팔짱을 꼈다.
“별안간 저택에서 도망치시더니 기사 작위를 얻어오시고, 폴와이번의 내전에 딱 맞춰 저것이 완성되었잖아요.”
탁자에 놓인 기다란 꾸러미를 보며 그렇게 말한 듄켈이 확인하듯 물어왔다.
“처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염두 하고…. 준비해오신 겁니까?”
“했지. 이렇게까지 막장으로 치닫을 줄은 몰랐지만.”
그렇게 말한 난 책상 서랍을 열어 시약들과 연구기록, 술식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하아….”
그런 내 모습을 본 듄켈은 어깨를 늘어트린 채 낮게 한숨 쉬었다.
“이런 거 보면, 진짜 의심됩니다.”
“의심된다니, 뭐가?”
그렇게 너스레를 떨자, 팔짱 낀 손을 풀지 않은 채, 듄켈이 날 향해 말했다.
“용의주도한 게, 진짜 악당 같다고요.”
“하하,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 난 짐가방에 든 재료들을 검토하며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나 악당 맞다고.”
***
“라인란트 제 2공자, 클라인 라인란트 님 도착하셨습니다!”
보초병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라이아가 칩거중인 제국군 주둔지.
요새 안은 이미 제국군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더럽게도 많이 모아놨네.”
이곳은 제국이 아닌 폴와이번의 땅.
그렇지만 이미 요새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한 제국군들로 인해 누가 이곳의 주인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 되어있었다.
“미치고 팔짝 뛰겠군.”
요새를 둘러보는 내 심정은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완전히 주객이 전도되었어.”
요새의 중요 거점에 빠짐없이 제국군을 배치시켜 놓았다.
첨탑, 망루, 그리고 경계병들까지.
“잘 짜여진 배치군요.”
“잘 짜여졌지. 누가 보면 중재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개리슨의 말에 그렇게 답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기사단의 수도 만만치 않아. 이건 마치….’
단순히 중재를 위해 주둔한 군사라기엔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마음만 먹으면 헬리안 파벌을 제압할 수도, 반대로 라이아의 파벌을 진압할 수 있는 병력이군.’
그렇게 마차에서 내려, 짐을 정리하고 있던 무렵.
“클라인 라인란트 공자님.”
딱딱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저 멀대 같은 새끼는 또 뭐야?’
도저히 무관으로는 보이지 않는 호리호리한 체형에, 위로 치켜뜬 눈.
그리고 사람을 내려다보는 특유의 거만한 몸짓까지.
귀족 특유의 특권의식이 의인화라도 한 듯한 사내가,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소문이 자자한 분을 뵙게 되어 대단히 반갑습니다.”
화려한 제국 군복을 갖춰 입은 그의 모습과 요새의 전경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 이 녀석이 이 점령군의 수장인가 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웃는 가면을 쓴 채 그의 인사에 화답했다.
“라인란트 제 2공자, 클라인 라인란트입니다.”
흰 장갑을 낀 손을 맞잡으며 그렇게 말하자,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치안 유지군 사령관, 펜스타 랜든 백작입니다.”
“펜스타…. 백작님.”
펜스타라는 이름을 들은 난 맥이 풀린 듯 그 이름을 되뇌였다.
‘평화유지군이 아니라 진압군이었군.’
제국 중서부에 위치한 대지주 가문, 펜스타 백작가.
극도로 높은 세율 탓에 일 년에도 수십 번의 봉기가 일어나는 영지.
그리고 그것을 유혈진압하기로 악명높은 군사가문.
그리고 라이아의 명단에 있었던, 헬리안과 비밀리에 뇌물을 주고받는 동업자이기도 했다.
‘평화유지나 중재는 빌미일 뿐. 이 인간도 이미 헬리안 파벌이나 다를 바 없어.’
이대로 간다면 헬리안과 대치 중인 라이아의 세력은 바람 앞의 등불인 상황.
즉, 이 내전은 처음부터 제국의 의도대로 짜여진 판이라는 거다.
“못 봐주겠군.”
펜스타 백작을 잠시 훑어본 개리슨은 그렇게 내뱉은 뒤 등을 돌렸다.
이 광경을 마주한 내 마음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헬리안을 잡는 것만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뒷공작을 걸어올 줄이야….’
이런 내 속을 짐작한 것인지 펜스타 백작은 어깨에 달린 황제의 인장을 내보이며 말했다.
“공녀님의 요청이니 특별히 들여보내드렸습니다만, 부디 이 인장의 의미를 떠올려주시길 바랍니다.”
“…….”
총사령관직을 인증하는 황제의 인장.
황제가 임명한 자인 이상, 제국의 일원인 우리는 저자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클라인 공자.”
그 말과 함께, 펜스타 백작은 등을 돌려 본영을 향해 걸어갔다.
‘망할 놈들.’
그렇게 생각하며 부글거리는 분을 삭이고 있을 때였다.
“클라인!”
한구석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서 라이아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 얼굴은 좋아 보이니 다행입니다. 라이아 공녀.”
“이 상황에 농담이 나와요? 누구는 지금 가문이 풍비박산이 났는데!”
이젠 내 앞에선 내숭 떨 생각도 안 하는 거냐.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난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팔팔한 거 보니까 경호는 필요 없으신 거 같은데.”
“한 마디를 지지 않는군요 정말.”
그렇게 말하면서, 라이아는 날 자신의 저택으로 안내했다.
“설마, 제국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어요.”
이전에 찾아왔을 때와는 달리, 한산한 저택.
이상함을 느낀 난 그녀의 등을 향해 물었다.
“그쪽 기사들, 전부 어디로 간겁니까?”
그렇게 묻자 그 자리에 멈춰선 라이아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고든과 십수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행방불명이에요. 아마 이미 그들은….”
“아뇨.”
어깨를 늘어트린 라이아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살아있습니다.”
확신에 가까운 내 말에 라이아가 눈가를 좁혔다.
“위로할 생각 말아요. 어떻게 그걸….”
“아니, 진짜 살아있다니까요?”
그렇게 말한 난 그녀의 눈앞에 스크롤 하나를 펼쳐 보였다.
장벽에서 만들어낸 밴시의 생명감지 지도.
그것을 간략화하여 스크롤에 적용한 물건이었다.
“이건…. 마법?”
“마법은 아니고, 좀 다른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난 스크롤에 검은 마기를 집어넣었다.
‘헬리안을 죽인다면, 차기 공작은 라이아가 유력하지. 이 기회에 완전히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리고….’
라이아의 허리춤에 갈무리된 메이스를 보며 생각했다.
헬리안의 군대를 뚫기 위해선, 그녀의 힘 또한 필요할 터.
설득하기 위해선, 언제까지고 내 정체를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입니다.”
파스스스스…!
마기에 반응하여 푸르게 빛나는 선이 폴와이번의 전경을 그렸다.
“이건…?”
“보세요. 저 하얀 점들.”
그렇게 말하며 난 폴와이번의 지도를 확대해, 성 지하에 위치한 공간을 표시했다.
한곳에 모여있는 흰색 점들.
망자의 영혼이 아닌, 산 자의 생령이었다.
“사람들을 전부 지하 감옥에…!”
성의 내부 구조를 알아낸 것인지, 깜짝 놀란 라이아의 눈이 커졌다.
“말씀하신 것과는 달리, 생존자가 없지는 않군요.”
어두웠던 라이아의 얼굴에 한 줄기 희망이 감돌았다.
“저들이 얼마나 버틸지 몰라요! 당장…!”
“구해야죠. 그래서 절 부른 거 아니었습니까?”
라이아를 향해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날 바라보았다.
“…뭡니까? 사람을 뚫어져라.”
“당신, 도대체 뭐에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라이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대륙의 어느 마법사도, 이렇게 자세한 감지마법은 쓰지 못해요.”
맞는 말이지.
“게다가 영혼을 감지한다니, 이건 마법이 아니라….”
“사령술이죠.”
내 대답에 라이아는 할 말을 잃은 듯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헬리안의 무도회가 있었던 그날.
난 홀로 낙엽에 대항해 그들을 생포했고, 헥토르의 죽음을 네크로맨서의 소행으로 위장시켰지.
어떻게 그 모든 일이 가능했는지, 모든 의문이 풀린 듯했다.
“당신의 동업자는 네크로맨서였습니다. 라이아 공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