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검의 영묘(2)
시험 시작 신호가 떨어진 지 20여 분.
난 시험장소인 베르켈 대삼림 초입부를 거닐며 이곳의 장관을 눈에 담고 있었다.
시험 내용은 간단했다.
최종 목적지는 눈앞에 보이는 산, ‘검의 영묘’.
저 산의 정장에 올라, 그곳에서 검 한 자루를 뽑아오는 것.
북부 기사들이 으레 그렇듯 간단하고, 또 담백한 시험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쉽냐고 하면 글쎄올시다.
오솔길조차 찾을 수 없는 빼곡한 숲에 험준한 산세.
그리고 도처에 도사린 산짐승들을 생각한다면, 난이도 자체는 제국 기사시험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그 이상으로 힘든 시험이겠지.
‘하아….’
그렇지만 지금 내 심사가 뒤틀리는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등산은 질색이기도 하고!
몸이 힘든 건, 곧 죽어도 싫은 건 맞는데!
아무튼, 그건 지금 내 표정이 뚱한 이유가 아니다.
아무튼 아니라고.
“저… 저기, 그….”
팔짱 낀 내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시험 내용에 앞서, 저것이 내 복장을 뒤집어놓는 가장 큰 이유!
나와 같이 시험에 참여한 기사 생도라는 놈들이, 내 주변을 이리저리 서성이며 날 보며 쭈뼛거리고 있는 것이다!
“에이 씨, 답답하게 진짜!”
“으어어?!”
참다못한 내가 짜증과 함께 뒤를 돌아보자, 화들짝 놀란 기사 생도들이 비명을 질렀다.
덩치는 산만한 것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내 눈치를 보는 걸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왜 뒤에서 쭈뼛거리는데?!”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내가 그렇게 외쳤음에도, 생도들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 그게….”
내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우물쭈물한 채 말을 망설이는 생도들.
그들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것은 일종의 경외감이었다.
두려워한다기보단, 섣불리 말을 거는 것조차 불경하다 여기는 듯했다.
‘내가 무슨 델라인도 아니고, 왜 이리 호들갑인지.’
북부 검사들에게 있어 라인란트의 존재는 성역과도 같다.
오히려 둘째인 나니까 이 정도로 끝나는 거지.
머리로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그들의 시선을 받아보니 속이 절로 쓰려왔다.
“그럼,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오?”
내 말을 듣고 결심이 선 것인지, 기사 생도 중 한 명이 내게 물어왔다.
그래도 뚝심 있는 녀석이 한둘은 있는 것 같다.
“공자님께서는…. 왜 이 시험에 참여하신 겁니까?”
숲길을 걷던 내 발걸음이 멈추고, 잔뜩 긴장한 생도들 역시 멈춰 섰다.
“저흰 검은방패 기사단의 일원이니, 북부의 시험을 받는 게 당연합니다.”
“북부 말고는 시험을 칠 수 없기도 하고 말이지?”
가감 없는 현실을 입에 담자, 그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너희들을 모두 제국 시험에 응시시키기에는 라인란트의 재정이 모자라고, 그걸 개인이 충당할 수 있을 정도로 기사단이 부유한 것도 아니고.”
그들 자신으로서도 입에 꺼내기가 힘든 라인란트의 치부, 돈.
공자인 내가 그것을 직접 입에 담자, 처음 말을 꺼낸 생도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그런, 그런 의도로 말하려던 게 아니라…!”
“그런 의도로 말해도 돼. 사실이니까.”
라인란트를 몰락시킨 가장 큰 무기는 돈이다.
제국과 헬리안에게는 넘쳐흐르고, 라인란트에게 턱없이 부족한 돈.
굳건했던 라인란트의 기사단을 약화시킨 것도 돈.
방계가 본가의 자리를 넘보는 이유도 돈.
헬리안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라인란트를 지켜온 이들을, 이런 패배주의에 빠트린 것 역시 돈이다.
‘재물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기사의 덕목일지어라… 개소리지.’
기사이기 이전에 사람이고, 명예 이전에 생활이다.
기사도를 부르짖는 이들 모두는 기사이기 이전에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아들이며,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아버지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곳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끝까지 라인란트의 이름을 짊어지려 하는 기사들.
이들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라인란트를 욕할 자격이 있겠는가.
“지금이야, 제국 기사시험이 백방 이득이긴 해. 정치적으로나, 내 미래를 위해서나.”
그렇게 운을 띄우자, 시무룩해진 생도들은 내게 되묻듯 시선을 겹쳐왔다.
‘뚫어지겠다. 이 녀석들아.’
저들에 비해 한참 어린 몸이지만, 내 정신은 그렇지 않다.
젊은이들이 으레 가지고 있는 불안함을 느끼며, 난 그들에게 한 줌 기대감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5년 후에는 어떨까?”
“……?”
낙담하던 분위기가 멈추고, 생도들이 고개를 들고나와 눈을 마주했다.
“10년 후면? 20년 후라면?”
5년은 이들이 라인란트의 기사가 되었을 시기.
10년은 그 이상.
20년은 더욱 그 이상의 경지에 올랐을 때일 것이다.
“그때에도, 라인란트라는 이름의 가치가 지금과 같을까?”
말하는 나조차도 알고 있었다.
말만 번지르르한 허세.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난 그렇게 생각 안해.”
늘어진 그들의 어깨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몸의 떨림이 멎고, 눈빛에 깃든 망설임과 불안이 그 색을 잃어갔다.
“난 그런 생각으로 여기 온 건데, 너희들은 어떻지?!”
허풍과 허세를 가득 담아 그렇게 외쳤다.
이들은 검은방패 기사단의 견습 기사.
장차 라인란트 기사단의 허리를 담당하게 될 이들.
“기사가 되고, 온 대륙에 내 검을 증명한다면!”
그런 이들에게 이런 말밖에 해줄 수 없는 지금이 너무나 야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내 외침에 흔들림은 없었다.
“제국이 뭐냐! 그 누구도 라인란트라는 이름을 괄시할 수 없을 거다!”
그들에게 기사로서의 자긍심을 부여하는 것이, 라인란트의 이름을 지고 태어난 내 책무일 테니까.
“기사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완장이 아닌, 그 검의 가능성일지니….”
처음에 내게 질문했던 기사 생도가 눈을 크게 뜬 채 중얼거렸다.
초대 공작, 베르켈 라인란트의 격언.
그것을 읊조리는 그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쌓인 게 많았겠지. 라인란트 공자 면전에서 그런 질문을 할 정도니.’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탄식하던 찰나, 울음을 참듯 이를 악문 생도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맑은 목소리로 외치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생도들도 이에 공감한 듯,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었다.
“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
“제국 기사놈들, 막상 만나면 별 것 아니죠!”
결연한 외침과 함께 나와 생도들 사이에 뭔지 모를 뭉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동료의 유대감, 동질감이려나.
…어우 씨, 닭살.
더는 못 버티겠다.
“야야, 그만. 그만! 다 집어치워!”
“엑?”
견디다 못한 난 손을 휘휘 저으며 이 감동적인 분위기의 산통을 깼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두 배는 더 격해진 그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탓이었다.
“이렇게 잔뜩 분위기 잡아놓고 정작 내가 떨어지면, 내가 너네 얼굴을 어떻게 보냐?”
진중한 분위기를 털어버리며, 난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툭 건드렸다.
“아니, 그….”
“나 안 그래도 저질 체력인데, 이런 분위기면 수틀렸을 때 업어달라고도 못할 거 아냐~!”
“풉…!”
노인네처럼 허리를 부여잡은 채 그렇게 말하자, 긴장이 풀린 생도들 몇몇이 황급히 입을 가리고 웃어댔다.
“걱정 마십쇼! 공자님은 꼭 붙으실 겁니다!”
“떨어지면 뭐, 라인란트 공자 업어봤다고 집에다가 자랑해야죠.”
‘비밀로 할 생각은 추호도 없구만?’
처음 질문한 생도는 날 응원했고, 나와 같이 짓궂은 표정을 한 생도는 그렇게 말하며 날 놀려댔다.
“야, 내기할래? 우리 공자님 정상까지 오르나 못 오르나?”
“이것들이 가만 듣고 있자니까!?”
푸하하하하-!
결국, 긴장의 끈을 놓은 생도들은 서로의 어깨를 부여잡은 채 온 삼림이 떠나가라 웃어댔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지.’
날 보며 쭈뼛거리던 처음의 모습과 내 어깨를 붙잡은 채 떠드는 지금의 모습.
어느 쪽이 더 좋냐고 묻는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부턴 경쟁입니다!”
“가다가 쓰러지지 마십쇼 공자님-!”
본격적인 시험장소인 숲에 들어가기 전, 내게 그렇게 외친 생도들은 저마다의 경로를 향해 흩어져갔다.
- 놀랍군. 그 아키몬드가 이 정도로 사람을 다룰 줄 안다니.
“이 정도도 못하면 그 많은 영혼들이 날 따랐겠어?”
계약한 이후 내내 말이 없던 데스나이트, 레이븐이 웬일로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딱히 다루려고 한 것도 아니야. 내가 생각한 걸 있는 그대로 말한 것뿐이지.”
- 그리고 그대는, 저 어린 기사들의 신임을 얻었고.
시험이 시작한 이상, 허투루 할 수는 없었다.
밴시를 불러 숲의 전체적인 형태를 파악하고, 경로를 탐색하는 사이, 레이븐이 다시 내게 물어왔다.
- 그대가 저들에게 장담한 것. 실현할 수 있는 건가?
“안될 건 또 뭐야?”
불신이 가득한 그의 눈총을 받아넘기며 말했다.
라인란트의 이름이 제국 기사에 뒤져지지 않게 하겠다.
최초의 라인란트 기사였던 그 앞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교황도, 황제도, 대륙 연합군도 죄다 갈아버렸는데.”
복수심에 미쳐 폭주한 전생의 나.
앞으로 뻗은 내 손이 그때의 언데드 군세를 호령하듯, 굳게 주먹 쥐어졌다.
“천하의 아키몬드가 마음을 먹으면, 그깟 가문 하나 일으키는 게 대수겠어?”
레이븐의 어깨 갑주를 손가락으로 두드린 뒤, 그를 지나쳐 숲을 향해 걸어갔다.
이미 숲과 산길을 둘러본 밴시가 정상까지 향하는 최단 경로를 표시해 줬으니.
남은 건 시험장소까지 유유자적 등산을 즐기면 될 일이었다.
- 하, 이것 참.
허탈한 듯 날 돌아본 레이븐이 연기처럼 흩어지며 말했다.
- 적이었을 땐 그리도 버겁던 것이, 아군이 되니 이렇게나 든든하다니.
그렇게 말하는 레이븐이 좀 웃은 것 같은데, 아마 잘못 봤을 것이다.
***
“동생 녀석에 대해선….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시엘 양.”
아일라시스 공작가로 향하는 마차에 탄 시엘에게 말하는 델라인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아무리 결혼할 생각이 없어도 그렇지, 약혼녀를 바람맞히고 가는 약혼자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냐고….’
귀족가의 자제라면 생각할 수조차 없는 비상식적인 상황.
그 상황의 주인공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동생이라니.
요즘 들어 참 놀랄 일이 많아진 델라인이다.
“괜찮아요. 갑작스럽게 찾아오기도 했고, 얼굴도 직접 뵈었으니 오히려 좋은걸요.”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이쪽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약혼자한테 바람을 맞았는데, 왜 아무렇지도 않냐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책을 펼치는 시엘을 보며 델라인은 더욱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다른 영애들 같았으면 파혼이니 뭐니 노발대발했을 텐데.
‘어렸을 때 이후로 얼굴도 본 적 없다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그렇게 생각하던 델라인은 짧은 한숨과 함께 상념을 털어냈다.
어차피 이건 시엘과 클라인 사이의 일.
자신이 더 생각해봐야 득 될 것이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시엘 양. 정말 괜찮겠어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넨 것은 프리실라 공후였다.
“아일라시스에서 온 침입자들은 공녀를 노리고 있었어요. 헌데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니….”
“걱정 마세요. 부인.”
위험에 빠진 당사자는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시엘은 되려 걱정하는 프리실라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쪽에서 먼저 그렇게 나와줬으니, 일이 더 쉬워진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일이… 더 쉬워지다니요?”
대답하는 대신, 시엘은 보고 있던 책을 덮은 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더 묻지 말라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예 공녀님. 출발하겠습니다.”
시엘이 마부에게 그렇게 말하자, 그녀를 태운 마차는 라인란트 정문을 나가 아일라시스 영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공간이동 마법을 쓰지 않고, 직접 이동하는 것도 수상하군요.”
배웅을 위해 나온 버크만이 그렇게 말하자 프리실라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저건 마치…. 들키지 않게 몰래 침입하려는 것 같아요.”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낀 프리실라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마차에 탄 시엘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그녀의 팔을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
그것을 눈에 담자, 만면에 띈 그녀의 미소가 점점 빛을 잃어갔다.
“그 사이 조금이라도 변했을 줄 알았는데, 그랬을 리 없지.”
인형처럼, 목석처럼, 감정 없는 무기처럼.
텅 빈 그녀의 동공이 나타내는 것은 명백한 적의였다.
“내 앞을 막아선 이상, 예정대로 전부 부숴버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