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검의 영묘(1)
다각, 다각….
말발굽 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라인란트 저택을 보니 마음이 절로 홀가분해졌다.
“이걸로, 한 2주 동안은 숨 좀 돌리겠네.”
“근데 우리 어디로 가요?”
“베르켈 대삼림. 모레가 시험이니 오늘은 도중에 야영을….”
옆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대답하려는 찰나.
“어우, 깜짝이야?!”
“꺄악?!”
화들짝 놀란 내 비명 소리에 아린 또한 놀랐는지, 나와 반대 방향으로 튀어 올라갔다.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아니, 어떻게 따라왔어?”
내가 그렇게 묻자, 아린은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말했다.
“히히, 또 나가면 늦게 오실 거잖아요! 그래서 따라왔어요!”
티 없이 밝은 아린의 얼굴.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양손은 내 옷깃을 꼭 붙잡은 채였다.
‘불안해하는 건가?.’
계속해서 내게 달라붙는 아린.
두 달 동안의 장벽 생활을 떠올린 난,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하긴, 이렇게 오래 떨어진 건 난생처음이었을 테니.’
내심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손의 떨림이 가시지 않은 아린이 날 보며 말했다.
“두 달 동안 떨어져 있었잖아요. 이제 저 두고 가지마요.”
토라진 건지, 아니면 심통이 난 것인지.
참 종잡기 힘든 녀석이라는 생각을 하며, 아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걱정 마. 나 어디 안 간다.”
“진짜로요? 진짜 어디 안 가요?”
“당연하지.”
옷깃을 통해 느껴지는 미약한 떨림.
그것을 느낀 난 그 옛날, 교화소 지하실에서 처음 만난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상처투성이인 몸에, 겁에 질린 눈동자.
거기에 그녀의 존재를 묶어 둔, 그 사슬은….
“쯧.”
떠올리기만 해도 토악질이 치밀어올랐다.
“마음대로 돌아다니면 안돼. 알았지?”
“네에~!”
“대답은 잘해요, 하여튼.”
손가락으로 아린의 이마를 지그시 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뭐, 이 지루한 마차여행에서 말동무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니.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쿠콰아앙-!
폭음과 함께 나무벽이 터져나가고, 그곳에서 그림자들이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아가씨!”
“탈출로를 뚫겠습니다! 모두 따라오세요!”
한 손에 메이스를 든 소녀.
라이아는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을 향해 그렇게 외친 뒤 달려드는 검은 물체를 향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쿠콰아앙-!
마치 포탄이 떨어진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폭음.
상반신이 통째로 날아간 그것은, 두 다리만을 남긴 채 두어 걸음을 더 걸어가다 쓰러졌다.
“다른 사람들은요?!”
“저택을 나갔다는 보고는 받았습니다만, 이후로는 소식이 없습니다.”
세검을 든 채 라이아의 사각을 방어하던 고든이 그렇게 말했다.
곳곳에서 들리는 비명과 괴성.
용살자의 요새라 불리던 폴와이번 성은, 이미 지옥으로 변한 뒤였다.
“헬리안. 어떻게 이런 짓을…!”
좁은 골목 위로 뻗어있는 거대한 성탑.
헬리안과 그녀의 기사들.
아니, 기사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괴물들이 쏟아져나오는 그곳을 보며 라이아는 이를 악물었다.
“크워어억!”
“키이이-!”
그러는 사이, 앞뒤로 쏟아져 나온 기사들을 보며 라이아와 기사들이 이를 악물었다.
“젠장, 근위병들이…!”
“이미 중앙군은 전부 감염된 건가?!”
폴와이번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채, 피와 고름을 뚝뚝 떨어트리는 병사들.
이미 백태가 낀 눈은 그것이 더 이상 살아있는 인간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었다.
“거기까지입니다. 라이아 공녀.”
더 이상 손쓸 수 없이 포위된 상황.
언데드로 이뤄진 군대의 양옆이 열리며, 갑옷 차림의 남자가 라이아를 향해 걸어왔다.
“헬리안 휘하의 기사입니다.”
“기사? 저게요?”
자신에게 검을 겨눈 남자의 몰골을 보며 라이아가 되물었다.
얼굴 전체에 돋아난 실핏줄과 힘줄.
그 기괴한 모습과 넘치는 마력량은, 기사가 아니었다.
저것은 힘에 미쳐 인간을 포기한 자의 말로.
헬리안의 힘을 주입해 만들어낸, 끔찍한 괴물이었다.
“제국의 기사가 공작가의 일원에게 검을 겨누다니요.”
메이스를 들어올리며 그렇게 말한 라이아가 남자를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이 일을 좌시하지 않으실 겁니다!”
합당한 이유가 없는 이상, 제국 귀족들 간의 항쟁은 황명으로 엄격히 금지되어있다.
그것이 제국의 국경을 담당하는 3대 공작가라면 더욱 엄격할진대, 이렇게 섣불리 일을 벌이다니.
심지어 이런, 비열하고 더러운 술수를 써서…!
“크하하하하-!”
라이아가 거기까지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을 때, 그 말을 들은 남자가 온 성이 떠나가라 웃어댔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력과 귀기.
이미 살심을 품은 것이 분명했다.
“멍청하긴, 황제 폐하께서 이 일을 모르실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
제국 기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
그 말을 들은 라이아는 메이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얌전히 투항하십시오. 라이아 공녀. 공후 마마의 명이 있으니 죽이지는….”
“그래, 이것이 제국을 따른 결과라는 말이지요?”
기사의 말을 끊고 흘러나온 라이아의 목소리.
거기에 담긴 살기를 느낀 기사는 더 지체할 것 없이 라이아에게로 달려들었다.
“결국 이렇게 명을 재촉하다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기사가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공녀라는 지위로 올라간 기사단장 따위, 이 힘이라면…!’
무방비 상태인 라이아를 보며 그렇게 생각한 기사의 검이, 라이아의 어깨를 갈랐다.
콰직-!
정확히는, 갈랐어야 했다.
“어, 어…?”
부러졌다.
마력을 머금은 기사의 검이.
갑옷은커녕, 겉옷조차 걸치지 않은 외출복 차림의 소녀의 어깨를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난 것이다.
“아니, 이게 무슨…?”
“폴와이번은 유서 깊은 용살자의 후예.”
고저 없는 라이아의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메이스가 하늘을 가리켰다.
“제 몸에 생채기라도 내고 싶다면, 공성용 발리스타 정도는 가져오세요.”
그 말과 함께, 하늘로 치켜든 메이스가 땅을 후려쳤고.
쿠콰아앙-!
산산조각 난 바닥의 먼지가 걷혔을 때, 기사의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고든!”
“예, 아가씨.”
부름에 곧바로 답한 고든을 향해, 라이아의 명이 내려졌다.
“잔존 기사단은 전원 퇴각. 라인란트 접경지역에서 합류합니다.”
“…그분을 부르실 생각이십니까?”
고든이 되묻자 라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헬리안이 다루는 정체불명의 힘.
그리고, 괴물로 되살아난 헬리안의 병사들.
이 분야의 전문가라면, 그녀가 알기로는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
“공자님, 도착… 했습니다.”
“흐어…!”
마차여행이 지루하다는 말 취소.
아니, 애초에 대삼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마차로 갈 생각 자체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고생 많았어. 마차 값이랑 수고비는 본가에 청구하고, 이건 경비로 써.”
“감사…. 합니다….”
북부지방에 한하여, 지금은 일 년 중 유일하게 눈이 녹는 시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마차여행을 감행한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얼었던 흙이 녹아 진창으로 변한 도로.
그곳에 빠진 마차바퀴는 도저히 굴러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결국은 마차를 버리고 말에 올라야 했다.
“도련님 괜찮아요?”
“아니.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딱 그 짝이야.”
체력 소진으로 헥헥거리는 나와 달리, 아린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멀쩡했다.
‘어쩔 수 없이 데려온 건데, 얘 아니었으면 도중에 집으로 돌아갈 뻔했어….’
생각지도 못한 아린의 합류 덕분에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클라인 라인란트 공자님…. 맞으십니까?”
숲 한편으로 멀어져가는 마부를 배웅하며 그렇게 구시렁대던 그때,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제가 클라인 라인란트입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자, 특유의 검은 제복을 차려입은 기사가 날 보며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검은방패 기사단. 이번 시험 감독관인가 보지?’
베르켈의 열두 기사 중 한 사람, 검은방패 이아손.
그의 무구를 본뜬 방패 문양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우선, 시험장에서 재확인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내 머리색과 같이 있는 아린을 유심히 보던 기사는 곧이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뒤, 날 시험장으로 안내했다.
‘재확인이라니, 얘네 나 못 알아보나?’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린 난, 이윽고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으, 거지꼴이 따로 없네.’
진창에서 마차 빼느랴, 주저앉은 말 다시 일으키랴.
정갈하고 깔끔했던 내 외출복은, 그 과정에서 튄 흙더미 때문에 넝마가 되어있었다.
명색이 공작가 아들내미가 이런 추레한 행색이라니.
내가 저 기사여도 안 믿는 것이 당연하게 보일 정도였다.
“공자님이 온다는 소식에 다른 생도들이 난리입니다.”
“…내가 온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데?”
“전서구가 말보다는 빠른 법이죠.”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가리키자, 흰 비둘기 두어 마리가 저택 방향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튀어 봤자 손바닥 안이었군.’
소식을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하인켈이 포기한 것인지.
결혼 얘기는 꺼내지 않는다는 것에 그나마 위안이었다.
“시험은 나 혼자서 치는 건가?”
“아니요. 이번 분기 저희 기사 생도들도 응시합니다.”
개인 자격이 아니라, 기사단 단위로 치르는 시험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검은방패 기사와 난 시험장소에 도착했다.
“어…!”
“라인란트, 정말로 왔어….”
시험장소는 삼림 한복판에 위치한 널찍한 공터.
한데 모여있던 생도들이 내 존재를 눈치챈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 어서 오십시오! 클라인 공자님!”
“라인란트의 일원을 만나봬어 영광입니다!”
어색한 예법으로 내게 인사하는 기사생도들.
인사에 화답해주며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마력과 자질은 갖췄으나, 가문의 지원을 받지는 못한 이들이군.”
“…정확합니다.”
내 말에 맞장구친 기사는 무안한 듯 뒤통수를 긁었다.
라인란트를 제외한 대륙의 기사생도들은 대부분 제국 기사시험에 응시한다.
대륙에서의 공신력, 만날 수 있는 인맥, 각 귀족가의 이목까지.
신출내기 기사, 특히 자유기사에게 있어서는 모든 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사소한 단점이 있다면, 지나치게 호화롭다는 것 정도일까.’
제국 수도의 살인적인 물가.
거기에, 기사로 임명되었을 때 이어지는 각종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선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
그렇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의 대부분은 돈 없는 시골뜨기.
귀족사회의 예절을 익힐 시간에 검을 휘둘러 온 외골수들뿐이었다.
“와아~”
날 따라온 아린이 시험장의 풍경을 보며 신기한 듯 탄성을 내질렀다.
“그렇게 신기해?”
“네! 저기 봐요! 엄청 높잖아요!”
그렇게 말한 아린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깎아지른 듯 높이 솟아있는 거대한 영산.
그 위압감에 몇몇 생도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영상의 꼭대기가 북부 기사시험의 최종 목표인 ‘검의 영묘.’
세상을 떠난 라인란트 기사들의 검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장소이며.
초대 라인란트 공작, 베르켈 라인란트의 검.
노르드빈트가 잠들어있는 곳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