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55화 (55/209)

055. 모전자전

누군가 말했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니, 섣불리 그곳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전생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 역시 그 말에 공감했다.

이전에는 대륙을 뒤엎고자 했고, 지금은 베르켈의 가문을 부흥시키고자 하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아내나 가족을 만든다는 것은, 약점을 스스로 만드는 것과 진배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어찌 알았겠는가.

나는 생각하지도 못한 제국 수도와 아일라시스 영지에서.

실력 좋은 장의사 두 명이 내 무덤을 파고 있었을 줄이야…!

“아아…. 아아아…!”

프리실라가 저택에 도착한 지 사흘이 지난 라인란트 저택.

넋을 잃은 채 의자에 앉아있는 내 눈앞으로 아린의 손바닥이 이리저리 지나다녔다.

“도련님, 눈이 죽어있는데요?”

“침 삼키세요 도련님. 더럽습니다.”

양옆으로 흘러내린 내 눈동자도, 줄줄 흘러내리는 내 머릿속도 갈 곳을 잃은 채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렇게 싫으시면 파혼하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했지.”

파혼하겠다는 얘기를 안 해본 것이 아니다.

하인켈도 찾아갔고, 프리실라 공후는 당연히 찾아갔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민데, 결혼할 여유가 어디 있겠냐!’

온 힘을 다해 그렇게 읍소했지만, 이에 응수하는 하인켈의 대답이 아주 걸작이었다.

“가문을 위해 힘쓰려 하는 것은 기특하지만, 넌 아직 어리다. 좀 더 때를 기다려도 늦지 않아!”

라고 하며, 눈물 어린 신파극을 연출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아버지. 그게 아니라, 전 그냥 약혼을 취소….”

“넌 이미 충분히 네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아니, 그러니까…!”

“자신을 몰아세워선 일을 그르칠 뿐이야! 네 행복을 찾아야지!”

…이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니, 미칠 노릇이다.

‘신경 써주는 건 좋은데, 타이밍이 너무 안 좋잖아…!’

유일한 희망이었던 하인켈이 이 모양이니,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프리실라를 포섭해놨을 줄이야…!’

나에 대한 집념의 발로인지, 시엘의 계획은 철두철미했다.

가문 대소사의 전권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프리실라라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먼저 접근해 아군으로 만들었으니.

이제 와서 파혼을 요구해봤자, 허락이 떨어질 리 만무했다.

‘게다가 이제는 가문 사람들의 신임까지 얻고 있으니….’

지금에서야 인정받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난 가문의 애물단지나 다름없었다.

그런 나와의 약혼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심지어 먼저 결혼하자고 나섰으니.

애 가진 부모 입장에서는 환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도련님은 시엘 공녀님이 싫은 거예요? 엄청 이쁘시던데.”

싫은 것은 아니다.

그녀의 출생과 과거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동정하는 마음이 없지도 않다. 그렇지만 그것이 결혼을 받아들일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이 결혼을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

아일라시스의 마법사들을 도륙 내던 그녀의 눈.

그곳에 서린 광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쁘면 다냐? 정작 중요한 내용물은…!”

“시엘 공녀님 같은 영애가 어디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역시.

그녀의 성격에 대해 뭐라고 말을 꺼내려 하는 순간, 듄켈이 먼저 나서서 그녀를 변호했다.

‘그래! 맨날 이런 식이라고!’

눈앞에서 사람을 시뻘건 정육면체로 우그러트리는 걸 봤는데, 그 장본인이 내 약혼녀다.

약혼자 앞에서 사람 머리를 터쳐놓고 ‘저 잘했죠?’ 하고 웃는 여자가 내 약혼녀다!

근데 이걸 믿는 인간이 아무도 없네?

이러니 내가 정신이 안 나가고 배기겠냐고?!

“어떻게든 결혼만은 피해야 한다. 정 안되면 야반도주를 해서라도…!”

그렇게 생각의 생각을 거듭하던 내게, 불현듯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그래…. 야반도주 까짓거, 하면 되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횡설수설하고 있을 때, 혼잣말을 들은 듄켈이 날 만류했다.

“안 그래도 폴와이번 쪽 동향 때문에 영지 전체가 경계태세입니다. 갈 곳도 없을걸요?”

“아니, 있어.”

그렇게 말한 내 머릿속에서는 장벽에서 돌아온 직후, 하인켈이 내게 했던 말이 재생되고 있었다.

‘네가 기사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췄다는 가문의 인증이다. 제국 기사시험의 응시조건이기도 하지.’

‘가까운 시일 내에 응시하거라.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거다.’

기사시험.

견습기사 신분이 아닌, 정식기사가 되어 기사단에 입단하게 된다면?

‘기사단 입단을 핑계로, 결혼식에서 도망칠 수 있지!’

결혼식 얘기가 오가는 중에 기사시험을 치러 간다.

다른 귀족가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기사 가문인 라인란트에서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방법일 터!

“듄켈!”

“예, 예?”

별안간 큰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깜짝 놀란 듄켈이 되물었다.

“현 시간 기준으로, 가장 빠른 기사시험이 언제지?”

기사시험.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듄켈이었지만, 대답이 나오는 속도는 빨랐다.

“아마, 서부 접경지대에 있는 베르켈 대삼림에서 열리는 북부 기사 시험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거야!”

뭔가 더 말하려던 듄켈의 말을 끊고, 곧바로 책상에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원래는 남들 하던 대로 제국에서 칠 생각이었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온 힘을 다해 펜을 놀렸다.

글씨체는 최대한 정갈하게, 온갖 미사여구를 담아서.

시엘에게 남길 편지를 작성한 난 곧바로 듄켈을 향해 외쳤다.

“마차 준비해 줘! 빨리!”

***

“델라인은 여전하더군요. 올곧고, 때묻지 않고.”

장벽에서 온 보고서를 훑어보던 프리실라가 그렇게 말하자, 뒤이어 하인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때묻지 않아서 걱정이지.”

그녀의 말에 답한 하인켈은 뒤이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실리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성격이니, 중요한 순간에 판단을 그르칠 때가 있어.”

“훌륭한 인품이긴 하지만, 정치가의 자질은 아니지요.”

자신의 친아들을 향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리실라의 평가에는 한 치의 틀림이 없었다.

북부의 영웅으로서의 라인란트, 그리고 제국 공작으로써의 라인란트.

한쪽은 고결한 영웅이어야 하며, 다른 한쪽은 냉혹한 정치가여야 한다.

전대 공작, 루델 라인란트는 그것을 해내지 못한 채 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현 공작, 하인켈 라인란트는 자신의 반려와 함께 그것을 실현했다.

그렇다면 그다음 세대는 어떠한가?

“기사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재목이지만….”

“그래도 방법이 없지는 않아요.”

프리실라의 그 말에, 하인켈이 확인하듯 물었다.

“클라인을 말하는 것이오?”

“네.”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한 둘째, 클라인.

그가 해낸 일들을 떠올린 프리실라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콘웰 백작과 헥토르를 처리한 방식. 한편으로는 과격해 보이지만, 동시에 가장 깔끔하기도 해요.”

콘웰은 자백과 정신분열.

헥토르는 제국군과 폴와이번 사이의 오인사격으로 인한 사망.

기사 가문인 라인란트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냉혹한 술수였지만, 그만큼 효율적이었다.

“클라인이 당신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거요?”

“아직은 희망사항이죠. 하지만….”

그렇게 말을 흐린 프리실라는 이전 가정교사들이 남긴 클라인에 대한 평가들을 보았다.

‘행정, 통계, 수학, 정치학, 군사학. 거기에 마법 이론까지….’

특정 과목에만 두각을 나타내는 델라인과 달리, 클라인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했다.

‘제국 아카데미에서 정식 교육을 수료한다면, 문제없이 관료가 될 수도 있어.’

기사 가문에서 태어난 것이 되려 불운이라고 할 정도로 우수한 성적.

열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결단력과 추진력.

거기에 자신을 방어할 수준의 무력까지.

정치계에서 잔뼈가 굵은 프리실라의 시선에서 보자면, 클라인의 자질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국으로 돌아갈 때 데려가고 싶을 정도이니.’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프리실라는 하인켈이 건넨 차를 입가로 가져갔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멈추고, 차를 홀짝이는 소리가 서재를 가득 채웠다.

“…대단하네요.”

“대단하다니?”

한 모금 차를 마시며 입을 연 프리실라에게 하인켈이 되물었다.

“언제 와서 마셔도 향이 변하지 않잖아요?”

“허허, 뭘 새삼스럽게.”

프리실라의 칭찬에 겸양을 떤 하인켈 또한, 자신의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검 휘두르는 걸 제외하면 유일한 재주 아니겠소?”

“그렇기는 하죠.”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는 건가.

작은 푸념이 들려왔지만 프리실라는 웃어넘길 뿐이었다.

“…클레어도, 이 차를 좋아했었죠.”

“…….”

“이름 없는 꽃을 우려낸 이 향이, 이곳 사람들을 보는 것 같다면서.”

하인켈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이 이번에는 좀 더 길게 그들 사이를 머물렀다.

“프리실라….”

“걱정 말아요. 하인켈.”

그녀를 위로하려는 듯 손을 내밀자, 프리실라가 그것을 맞잡았다.

“이제 괜찮으니까.”

은은한 미소를 띤 채 그렇게 말한 그녀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그 옆에 있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음?”

그렇게 장벽에서 온 보고서를 훑어보던 프리실라의 시선이 한 지점에서 멈췄다.

“음? 무슨 특이한 거라도 있나?”

“아, 여기 이 부분이요.”

큰까마귀 단장 코락스가 보낸 보고서.

클라인의 행적이 빼곡히 기록된 보고서 한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장벽 기사와 병사들을 상대로 점술을 써서 친밀감을 얻음.’

“점술…. 이라.”

그 문구를 속으로 곱씹던 프리실라는 오래전, 아련한 그 시절의 장면이 떠올렸다.

낮설었던 라인란트 저택.

아직 감수성 많던 철부지 영애였던 자신.

그리고….

‘오, 프리실라 마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이시는데, 점 한번 안 보실래요~?’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채,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둘째 공작부인.

‘클레어….’

“후훗.”

“음? 왜 그러시오 부인?”

어리둥절한 채 그렇게 묻는 하인켈이었지만, 프리실라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퍼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듯했다.

“정말이지…. 자기 엄마랑 아주 판박이야.”

자신의 친구이자, 스승이자, 자신의 연적이었던 여인.

아련한 추억 속에 남아있는 그녀를 떠올리며, 프리실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똑똑.

그러는 사이, 정중한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장 버크만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헬리안 측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인가?”

이전에 프리실라가 전해준 정보를 떠올린 하인켈이 그렇게 물었지만, 다행히 버크만은 고개를 저었다.

“클라인 공자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뒤이어진 소식에 한동안 말이 없던 하인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에게 되물었다.

“사… 라지다니?”

그런 하인켈에게, 버크만은 품에서 편지 한 장을 떠내 그의 앞에 보였다.

내용인즉, 베르켈 대삼림에서 치러지는 북부 기사 시험에 응시할 테니, 찾지 말라는 내용.

편지를 읽으며 넋이 나간 듯 말이 없는 하인켈.

프리실라는 그 광경과 과거의 추억을 겹쳐보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이런 것까지 널 닮을 필요는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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