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약혼자(2)
“야야, 저기….”
“우와아….”
하녀들의 손에 너덜너덜해진 몸을 이끌고 도착한 라인란트 시.
나들이복으로 거리를 걷는 시엘의 모습에 행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도시 안이라고 해도 북부입니다. 그런 옷차림이면 감기 걸려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다가간 난 마리아가 준비해 준 외투를 건넸다.
“직접 걸쳐주지는 않으시나요?”
“아, 원래 그렇게 하는 거였습니까?”
시엘의 말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고보니 레이디한테 이런 걸 건넬 때는 뭐 따로 예법이 있다고 했었지?
…알 게 뭐야. 알아서 하라지.
“실례했습니다. 누구 말마따마, 이런 일이 처음이라서요.”
“아, 아니에요! 그냥….”
망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시엘이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
“그냥…. 너무 좋아서….”
내가 건넨 외투를 받아든 시엘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왜 나한테 이런 반응이냐고…?’
의중을 떠보기 위해 그녀를 관찰한 것이 약 세 시간.
그동안 난 라인란트 시의 골목이란 골목은 전부 다니며, 시엘 공녀의 추억여행에 끌려다니는 처지였다.
“여기 기억나세요? 그때 같이 타던 나무가, 이젠 이렇게 커졌어요!”
“그… 렇습니까?”
지금의 나로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장소들.
그렇지만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날 이끄는 시엘은, 그 어린 시절 스쳐 지나갔던 모든 장소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멀리 나갔었다니, 그땐 나도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이네.‘
시엘의 설명을 듣자 그제서야 기억나는 장소들.
난 그것들을 돌아보는 동시에 시엘을, 정확히는 시엘에게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마력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때는 어렴풋이 밖에 못 느꼈는데, 이제 알겠군.'
시엘 공녀에게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마력,
그것을 확인한 난 아일라시스가 그녀를 탐낸 이유, 그리고 그녀를 쓸 수 없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는 격이 맞지 않는 상대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뒷사정이 있었군.’
의문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혐오감이 치솟았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클라인 공자님?”
날 부르는 시엘의 목소리에 난 하던 생각을 멈춘 뒤 곧바로 답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뇨, 다른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는 시엘은 걱정이 되는 듯, 연신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더 귀찮아졌어.’
누가 봐도 돌아볼 정도의 미인.
그렇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은 옅은 피로감과 어색함 뿐이었다.
내 목적은 라인란트의 부흥.
눈앞에 쌓인 문제가 산더미인데, 팔자 좋게 결혼생활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어차피 정략결혼이니 때를 봐서 파기할 생각이었으니….’
그녀가 내게 호의를 보내는 이유는 어느 정도 짐작이 된다.
본래 어린 시절의 추억은 미화되는 법이니까.
그렇지만 그걸 받아줄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차일피일 미뤄봤자 감정의 골만 커질 터. 지금 확실히 말해두는 게 최선이겠지.’
고민을 마친 난 옅은 한숨과 함께 그녀를 불렀다.
“시엘 공녀님.”
“네?”
“계속 그렇게 제 눈치 안 보셔도 됩니다.”
그렇게 운을 뗀 뒤, 천천히 말을 골랐다.
난 어차피 결혼이나 이성관계에는 관심 없는 인간이니, 약혼은 빠른 시일 내에 파기하자.
그렇게 말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치칙-!
어깨에 그려진 계약문에서 신호가 왔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하늘에 띄워놓은 밴시가 보낸 신호.
그녀가 감지한 것은, 적의를 가진 생령 다섯.
그리고 전원, 마나 코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라인란트 전체에서도 이 정도 코어를 지닌 마법사는 손에 꼽지.‘
말인즉, 이건 외부에서 온 마법사들이라는 뜻이다.
‘원래 같았으면 자기들끼리 뭔 짓을 하던 신경 쓸 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내 손은 재빠르게 수인을 그리고 있었다.
‘영지민들이 휘말리게 된다면, 얘기가 다르지.’
지금도 내 주변을 거니는 사람들을 보며, 난 곧바로 그 자리에 스켈레톤을 소환했다.
[부르니 답하라. 그대의 길잡이가 부르노라.]
쿠르르르…!
급히 생성시킨 영체였기에, 추가 무장은 하지 않은 상태.
그렇지만 난 곧바로 그것을 움직여 시엘의 등 뒤를 막아냈다.
쿠콰아아앙-!
“꺄아악?!”
“뭐야, 포, 폭발인가?!”
“모두 도망쳐! 도망쳐-!”
폭음과 함께 곳곳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사상자는 없다. 그렇지만….’
날아온 마법이 무엇인지 파악한 내 눈에 분노가 서렸다.
도시 한복판에서 작렬한 공격 마법.
불 계열 마법사들이 가장 널리 사용하는 공통주문, 화염구였다.
“원거리에서 눈치채시다니, 소문 이상이시군요.”
높은, 그리고 타인을 깔보는 듯한 오만한 음성이 귀를 때렸다.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다섯 명의 인영.
그들 모두가 붉은빛을 내는 로브를 입고 있었다.
“복장을 보니 플리시안은 아닌 것 같고, 아일라시스인가?”
그들이 두른 로브의 재질을 지적하자 로브 사이로 삐져나온 입술이 휘어졌다.
“눈치도 빠르시고. 그럼 얘기하기가 한결 편하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선 한 명이 천천히 두르고 있던 로브를 걷었다.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시엘과 같은 검은 머리의 여성.
처음 들었던 목소리처럼, 오만한 눈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문이 무성한 클라인 공자를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는 것 치고는, 인사가 꽤 과격한데.”
가볍게 목례하는 마법사들에게 답하며 손에 담은 마기를 한층 끌어올렸다.
방금 전 공격에 놀라 모두 도망쳤는지, 주변에 생명 반응은 없었다.
“공작가의 일이 급하여, 부득이하게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표정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시엘 공녀님께서는 본가의 허가 없이 외출하셨기에, 속히 데리고 복귀하라는 공작 전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저쪽에서 먼저 낮춰본다면, 나 또한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지.
차가운 비웃음과 함께 여자의 말을 받았다.
“데리고 돌아오라는 게 공녀 본인이 아니라 시체였나? 방금 그 마법은 명백히 살수였다만.”
“하하! 설마요.”
짐짓 과장되게 웃는 여자가 날 보며 말했다.
“공자님과는 다르게, 시엘 공녀님 정도 되시는 분께 이 정도는 경고일 뿐이거든요.”
그렇게 말한 여자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내 등 뒤에 선 시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엘 라 아일라시스 공녀님.”
그녀를 부르는 말에 시엘이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지난 8년 동안 어디에 계셨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돌아가시….”
“돌아가? 누구 맘대로?”
그렇지만 내가 이 정도로 물러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지.
여자의 말을 끊은 내 목소리에, 그녀의 얼굴에 한 줄기 불쾌감이 스쳤다.
“그쪽 가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인란트에 도착한 이상, 시엘 공녀는 본가의 손님이다.”
그렇게 운을 떼며 앞으로 나선 난 그들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그 손님에게 위해를 가하려 해 놓고, 한 마디 사과도 없이 그냥 넘어가겠다?”
그런 내 말에 얼굴을 찌푸린 여인이 뭐라고 하려는 순간.
“아일라시스 가문의 일입니다. 관여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만.”
뒤에서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남자가 그녀 대신 입을 열었다.
‘슬슬 열이 오른다 이거지?’
그들 사이에 흐르는 작은 감정의 기류.
그것을 감지한 난 도발에 박차를 가했다.
“간섭받기 싫으면 그쪽 영지에서 진작에 처리하던가. 남의 집 마당에서 이게 무슨 행패지?”
“……!”
“도시 한복판에서 마법을 질러놓고, 너희들의 일이니 신경 쓰지 말라?
이제 날 보는 저들의 시선에 명백한 적의가 서린다.
“왜, 나도 지금 당장 아일라시스 영지 한복판에 가서 칼춤이라도 춰 줄까?”
그 말에 계속해서 분을 참고 있던 여자의 인내가 바닥난 듯했다.
“라인란트 따위가, 감히 아일라시스의 행사에…!”
“따위? 따위라고?”
그렇게 계속해서 저들의 성질을 긁어대던 찰나였다.
“그만!”
팽팽한 기류를 단번에 끊어낸 남자가 날 보며 경고했다.
“이 이상 본가를 자극하지 마십시오, 클라인 공자.”
위협이라도 하려는 듯 마력을 내보인 남자를 보며 입가를 비틀었다.
겨우 저따위 마력으로 협박질이라니.
가소롭기 짝이 없지.
“얌전히 시엘 공녀님을 저희에게 넘기십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그렇게 나와 남자의 설전이 계속되려던 그 순간.
공기가 바뀌고, 이변이 일어났다.
“컥?!”
갑자기 말을 멈춘 남자가 몸을 떨더니, 갑자기 그 자리에서 몸을 웅크리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갑자기 뭐 하는….”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남자의 상태를 확인한 나 역시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든 몸을 펴려는 남자의 의지와는 달리, 점점 쪼그라드는 그의 몸.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사방에서 그를 짓누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클라인 공자가 이런 수작을?!”
“아니, 이건 사령술이 아니야, 마법이다! 다들 디스펠을…!”
계속해서 쪼그라드는 남자를 해방시키기 위해 다른 네 명의 마법사들이 마력을 퍼부었다.
“크으으으으…?!
그렇지만 그들이 아무리 마력을 퍼부어도, 남자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염동력이 아니야. 마치, 공간이 통째로 움직이는 듯한…?’
남자의 상태를 확인한 내가 뒤를 돌아본 순간.
“고, 공녀님 그만두십시오! 이게 무슨…?!”
남자의 비명과 함께, 이 이상 현상의 원인이 입가를 비틀어 미소를 만들어냈다.
빠득! 빠각!
경악할 틈도 없이, 쪼그라드는 남자의 몸에서 기괴한 소리가 났다.
뼈가 뒤틀리고, 부러지며, 깨지는 소리.
“아! 아악?! 끄아아아아-!”
이윽고 소름 끼치는 남자의 비명과 함께, 좌중의 모든 소리가 멎었다.
이후 그곳에 남아있는 건, 사람이 아닌 붉은 색 정육면체.
사람을 압축시켜 만들어낸, 네모 반듯한 핏덩이였다.
“……!”
“아니, 이게 무슨…?”
당혹, 경악, 공포가 한데 뒤섞인 침묵.
그렇지만 나와 마법사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뿌드드득-!
공중에 떠오른 여덟 개의 돌덩이들이 그 자리에서 뒤틀려, 날카로운 송곳으로 형태를 바꿔갔다.
“시엘…?”
방금 전까지 순수한 미소를 짓던 그녀의 얼굴이 사라지고, 진짜 표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엉망진창으로 엉켜있는 시커먼 눈과 살기를 넘어선 귀기.
시엘 라 아일라시스는 그 모든 것을 한 몸에 지닌 채,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을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안돼요. 여러분, 8년 만에 하는 데이트를 방해한 것도 모자라서, 클라인에게 망발이라니요.”
마치 봉제인형에 억지로 박아넣은 듯, 곡선을 그린 입이 그녀의 얼굴에 미소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쿠웅-!
일대의 중력이 한층 무게를 더해갔다.
특별한 마법이나 술식이 아닌, 단순한 마력방출에 의한 압력이었다.
“이게 뭐야, 이건 가주님 수준의…?!”
경악에 찬 마법사들이 그렇게 목소리를 삼키던 때.
“어때요? 클라인.”
웃는 얼굴 그대로 날 바라본 시엘이 날 향해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 8년 동안 이렇게 강해져서 돌아왔답니다.”
온몸이 저릿해지는 압도적인 마력.
그것을 받아내는 동시에, 시엘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얼굴이 좋아졌다는 말, 전부 취소.
내 약혼녀는, 상상 이상으로 미친년이 되어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