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약혼자(1)
기억을 더듬어, 일곱 살 때 만났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맨 처음 떠오른 것은, 썩은 동태눈을 한 채 날 보고 있는 검음 머리의 소녀.
그리고 잔뜩 찡그린 하인켈의 얼굴이었다.
“공작 전하. 결단하셔야 합니다!”
“아일라시스 가문의 영애와 클라인 공자님이 혼약을 맺으신다면, 이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입니까?”
교화소에서 나온 지 1년이 채 되지 않는 어린 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여겨지던 내게 혼담이 들어오자, 가장 신이 난 것은 방계의 귀족들이었지.
“아직 어린아이들이오. 벌써부터 혼사를 정하는 것은….”
“공작가를 위해서입니다. 전하!”
“이 혼약으로 이뤄질 두 가문 사이의 화합을 생각하십시오…!”
‘화합은 개뿔. 뒤로 받아 처먹은 게 있으시겠지.’
탐욕에 미친 돼지들을 비웃던 그때였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제안을 쉽사리 받을 수는 없소. 오늘은 돌아가시오!”
하인켈이 시엘과 함께 찾아온 고관들을 향해 그렇게 일갈했다.
“저, 전하!”
다급히 그를 부르는 방계귀족들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하인켈은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뭐야. 샌님인 줄만 알았더니, 한 성깔 하네?’
만난 지 얼마 안 된 하인켈의 모습을 보며, 내가 내심 신선해하던 찰나.
“허어, 저리도 완고하실 줄이야…!”
혼담의 결정권자인 하인켈이 방을 나서자, 방계의 귀족들과 아일라시스의 고관들 역시 그를 뒤따랐다.
“재고해 주십시오. 전하! 이는…!”
“가문 사이의 유대를 위해서입니다. 애초에 클라인 공자께서는 별 가치도…!”
하인켈을 따라가는 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나와 시엘은 돌보는 하인 하나 없이, 허름한 놀이방에 남겨진 채였다.
“….”
“…….”
이윽고 퀭한 그녀의 눈을 얼마간 바라보던 난, 나지막이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도저히 못 봐주겠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짜고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었지.
“따라와! 여기 있으면 숨 막혀 죽겠다!”
그렇게 말하는 날 보며,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던 시엘이 물어왔다.
“가요? 어디로요?”
“어디긴 어디야!”
아직까지도 흐릿한 시엘의 눈.
어린아이가 가져서는 안 될 어둡고 탁한 눈을 보며, 난 짐짓 큰 소리로 외쳤다.
“놀러간다!”
***
“얼마 만에 만나는 건지 모르겠어요. 클라인!”
“아, 예…. 오랜, 만입니다….”
맑은 목소리가 옛 기억에 빠진 날 깨웠다.
어렴풋이 기억해낸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니, 괴리감이 더욱 심해졌다.
‘예전에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어.’
내가 시엘 공녀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8년 전.
그때 본 그녀의 모습은 지금과는 정반대였으니까.
‘문제는 얘가 왜 여길 왔냐는 건데….’
눈을 굴려 저택 창문을 바라보자, 급히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는 하녀들이 보였다.
‘역시, 예정에 없던 방문이야.’
분주한 하인들을 보며 내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아일라시스에서 날 감시할 속셈인가? 아니야. 접점이라고는 없는 가문인데, 굳이 이런 식으로 자극할….’
그렇게 온갖 상황을 가정하며 내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을 때.
이 자리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델라인이 그녀를 향해 예를 표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엘 공녀.”
군더더기 없는 델라인의 예법.
그에 답하듯, 시엘 역시 입고 있는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려 마주 예를 표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델라인 공자님.”
한 치 흐트러짐도 없는 단아한 모습.
그것을 보며 머리를 굴리던 내 옆구리를 델라인의 손가락이 찔러왔다.
“뭐해? 얼마 만에 만나는 약혼녀인데.”
우물쭈물 내 눈치를 보는 시엘을 가리키며 델라인이 그렇게 말했지만, 내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이상하잖아!”
“이상하다니, 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델라인을 보니 피로감이 절로 밀려왔다.
“생각을 해 봐. 8년 동안 감감무소식이더니, 왜 갑자기 정략결혼 상대를 찾아오냐고!”
“갑자기 보고 싶었나 보지?”
“아니 그게 무슨…!”
답답해서 말을 잇지 못하던 때,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델라인이 내게 다시 말했다.
“야, 그럼 넌 저 얼굴이 정략결혼 상대를 보는 얼굴로 보여?”
“그…!”
델라인의 그 한마디에 시엘을 곁눈질했다.
눈치채자마자 활짝 웃으며 내게 답하는 시엘.
얼굴에 홍조가 올라온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그러니까, 왜 저런 표정인데…?’
얼굴에서 진심이 느껴지니 더 미칠 노릇이다.
아니, 약혼자라고 해봤자, 8년 전이잖아?
만난 것도 한 번뿐이고.
근데 왜 저런 얼굴로 날 보고 있는 건데?
그렇게 델라인과 한창 귓속말하던 사이, 내 얼굴을 보던 시엘이 물어왔다.
“혹시…. 실례였을까요?”
불안한 듯한 그 목소리에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아닙니다.”
머릿속에 든 의문과는 별개로, 시엘은 엄연히 내 약혼녀.
라이아를 대할 때처럼 마냥 무미건조하게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다행이에요!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많이 불안했거든요. 그래서…!”
내 말 한마디에 시엘의 표정이 곧바로 밝아졌다.
그러더니 시엘은 갑자기 다가와 내 손을 잡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장벽은 굉장히 험준하다고 들었는데, 다친 곳은 없으신 건가요? 어딘가, 불편한 곳은….”
내 주의를 끌려는 듯, 필사적으로 말을 붙이려는 시엘.
그 모습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미치겠네. 아일라시스 정도 되는 집안 영애가, 왜 나한테 달라붙는 거야?’
아일라시스.
제국 3대 공작가 중 하나이며, 제국에서는 더욱 독보적인 마법사 가문이다.
몰락해가는 라인란트와는 달리, 3대 공작 중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대귀족.
그런 가문의 영애가 내 말에 일희일비한다는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전에 만났을 때보다는 좋아 보이니, 그거 하나는 다행인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날 보며 내내 히죽거리던 델라인이 내 어깨를 잡았다.
“그래서, 약혼녀를 계속 연무장에 세워둘 생각이야?”
“어, 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내가 그렇게 되묻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델라인이 시엘에게 말했다.
“동생 녀석이 이런 일에는 조예가 얕습니다. 준비시킬 테니, 먼저 마차로 가시죠.”
“아, 감사합니다. 델라인 공자님!”
델라인의 말에 화색을 띈 시엘이 기사의 안내를 받으며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준비라니, 뭔 소리야?”
“뭐긴 뭐야.”
날 보며 그렇게 말한 델라인이 곧바로 등을 옆으로 떠밀었다.
“야 델라인, 지금 뭐 하는…?”
갑작스러운 델라인의 기습에 휘청거리는 내 몸.
텁.
그리고 그것을 받아든 것은, 코락스만큼 우락부락한 덩치의 하녀장이었다.
“마리아…?”
라인란트 저택의 군기반장.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림자에 가려진 듬직한 얼굴이 흰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먹잇감을 발견한 하녀들이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라인란트 제 2공자의 첫 데이트다. 실수 없이 준비할 수 있겠지?”
델라인의 한마디에, 순간 생각이 멈췄다.
…잠깐만, 데이트라고?
내가?
시엘 공녀와?
하녀들에게 명하는 델라인을 보며 내가 얼이 빠진 사이, 그녀들은 빈틈없이 내 몸을 옭아맸다.
“맡겨주세요. 공자님!”
“허구한 날 기사들 땀내 나는 제복이나 수련복만 닦아대던 와중에, 우리 도련님이 데이트를 하신다니!”
“얼마 만에 들어온 하녀다운 일인데, 이걸 안 할 순 없죠!”
하녀들의 대답에 흡족한 듯 웃는 델라인.
그 의미를 알아챈 내 얼굴이 하얗게 질렷다.
그래, 그제서야 이해가 갔다.
이 망할 형님의 목적이!
“약혼자와의 데이트를 빌미로, 나 하나 희생해서 시간을 버시겠다?”
“바로 그거지.”
그렇게 말한 델라인이 하녀들에게 붙잡힌 내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예정에 없던 방문이라, 저택에서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리거든.”
“……!”
“라인란트 시 외곽에서 시간 보내고 있어. 준비가 끝나면 데리러 갈 테니까.”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한 델라인이 하녀들을 향해 짧게 명했다.
“끌고 가.”
라인란트 제 1공자의 명령에, 하녀들은 곧바로 날 방으로 연행했다.
“아니, 야! 내가 알아서 걷는다니까? 좀 놔봐…! 옷은 또 왜?!”
오랜만에 전공을 되찾은 하녀들의 손에 이끌린 날 기다리는 것은, 끔찍한 학대의 현장이었다.
“너네 전부 귀족 모독죄로 고발할 거야아아아-!”
그녀들의 손에 이끌려 세탁되고, 외출복으로 갈아 입혀지고, 마차에 태워질 때까지.
내 절규는 끊임없이 라인란트 저택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시엘 공녀와 클라인….”
하인켈의 서재.
창밖으로 보이는 라인란트의 마차는 도로를 따라가며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방금 그 말이 사실인가?”
그것을 지켜보던 하인켈은 하녀장 마리아를 향해 재차 물었다.
“예, 전하.”
곧바로 그렇게 답한 마리아가 하인켈에게 말했다.
“두 분께서 외곽으로 나가신 사이, 아일라시스 측에 마력통신을 넣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이내 기억을 더듬어 당시의 대화를 떠올렸다.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혹시 필요한 것이 있는지 수배할 생각이었지요.”
“헌데, 반응이 이상했다?”
“예.”
하인켈의 물음에 마리아 하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 쪽에서 굉장히 당황한 듯했어요. 갑자기 어수선한 소리가 나더니, 달리는 발소리도 들리고요.”
“당황한 것이로군.”
버크만이 그렇게 말하자 하녀장이 맞장구쳤다.
“아예 시엘 공녀가 이곳에 있는 것이 확실하냐고 되묻더니, 곧바로 통신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 말을 들은 하인켈은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자기 가문의 공녀가 다른 가문을 방문하는데, 그 사실을 모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마법명가인 아일라시스라면 더더욱.
“전하.”
하인켈의 옆에 선 버크만이 아일라시스에 대한 정보를 입에 담았다.
“시엘 공녀는 8년 전부터 지금까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8년 전?”
“예.”
하인켈의 질문에 답한 버크만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현 후계자, 아이긴 공자가 태어난 해 부터입니다.”
집사장의 정보를 들은 하인켈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후계자의 출생 이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공녀.”
나무판을 두드리는 소리를 느끼며, 하인켈은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했다.
“그런 그녀가, 다른 곳도 아닌 라인란트에서 발견 되었다라….”
턱을 감싸 쥔 채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때.
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가 집무실에 깔린 고민을 뒤흔들었다.
“들어오거라.”
생각에 잠긴 하인켈을 대신해 버크만이 그렇게 말하자, 문이 열리고 마력관측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일라시스 공작가에서 공간이동 마법 사용허가를 요청했습니다!”
“아일라시스가?”
차오르는 숨을 애써 고르던 관측사의 한 마디.
그 말에 하인켈이 곧바로 상념에서 깨어났다.
“위치는?”
“라, 라인란트 시 시내에 위치한 골목입니다. 주소는 3번가 12번길….”
관측사의 보고에 곧바로 장소를 알아챈 버크만이 하인켈에게 말했다.
“방금 전 공자님과 시엘 공녀님이 향한 곳입니다.”
그 말에 하인켈이 낮게 읊조렸다.
“마법사 다섯이 우리 측 연락을 받자마자 마법사를 파견한다는 것은, 시엘 공녀를 데리러 갈 속셈이겠지.”
“어찌하시겠습니까?”
버크만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하인켈이 입을 열었다.
“제국 3대 공작가에서 요청이 왔는데, 이를 넘길 수는 없겠지. 공간이동을 허가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버크만을 불러세운 뒤 굳은 표정으로 지시했다.
“듄켈과 휘하 기사단을 라인란트 시로 보내서, 클라인과 시엘 공녀를 보호하게. 최대한 빨리.”